아이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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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전쟁
보신 전쟁의 일부
BattleOfAizu.jpg
아이즈 와카마쓰 성 공격
교전국
Flag of the Japanese Emperor.svg 신정부군 측:
Maru juji.svg 사쓰마 번
Alex K Hiroshima Mori kamon.svg 조슈 번
Japanese crest Tosa kasiwa.svg 도사 번
Alex K Hiroshima Asano kamon.svg 히로시마 번
Kuyo.svg 오가키 번
사도와라 번
Flag of the Tokugawa Shogunate.svg 에도 막부 측:
Flag of Ouetsu Reppan Domei or the Northen Alliance in Japan.svg 오우에쓰 열번 동맹
Flag of Aizu domain.svg 아이즈 번
지휘관
구로다 기요타카
사이온지 긴모치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타가키 다이스케
기리노 도시아키
이지치 마사하루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사이고 다노모
야마가와 시로시
가야노 곤베이
다나카 도사
사이토 하지메
나가노 다케코
병력
약 15,000 약 5,000
피해 규모
알려지지 않음 알려지지 않음

아이즈 전쟁(会津戦争, 1868년)은 보신 전쟁의 국지전 중 하나이며, 아이즈 번의 처우를 둘러싸고 사쓰마 번, 도사 번을 중심으로 하는 메이지 신정부군과 아이즈 번과 이를 지원하는 오우에쓰 열번 동맹 등의 구 도쿠가와 막부 세력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현재 후쿠시마현 아이즈 지방이 주요 전장이 되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진행했던 나가오카 번을 둘러싼 전투는 호쿠에쓰 전쟁으로 따로 부른다.

배경[편집]

1862년 아이즈 번의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교토수호직에 취임하면서 신선조를 거느리는 등 존황양이의 지사들의 단속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금문의 변에도 불구하고 막부의 핵심으로서 존황양이파들을 배제시켰다.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막부군이 패배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함께 에도로 후퇴한 가타모리는 새 정부의 토벌 명령을 받은 요시노부의 공손히 순응한다는 방침에 따라 스스로도 공순의 자세를 나타내며 아이즈 번에 귀국하여 근신한다. 그러나 번 내에서는 주전론이 지배적이었으며, 그것을 감지했던 새 정부 측에서도 아이즈 번의 공순 자세를 믿지 않았다.

1868년 3월 11일, 에도 성이 무혈로 열리고(에도 개성), 도쿠가와 요시노부미토에서 근신하면서 사쓰마 번, 조슈 번을 중심으로 한 새 정부의 화살은 사바쿠의 중진으로 적대시 되고 있던 가타모리에게 돌아가게 된다.

토벌을 명령받았던 센다이 번, 요네자와 번 등 동북 제번은 아이즈 번에 동정적이어서, 아이즈 번을 사면해달라는 탄원을 벌이는 한편 오우에쓰 열번 동맹을 결성하고 유대를 강화했다. 오우에서 14번에 걸친 회의를 열어 아이즈와 쇼나이 번을 사면 청원할 목적으로 새 정부의 오우진무 총독 구조 미치타카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동정대총독부 휘하 참모 하야시 미치아키(林通顕)에 의한 “아이즈는 실질적으로 죽음을 내리는 수밖에는 없다”는 기본 방침을 이미 결정하고 있었으며[1], 조정에 직접 건의(태정관 건백서)도 받지 않았다.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결성 시점(시라이시 회의)에서는 사면 청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즈 번이 메이지 신정부의 통지에 대해 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사과도 거부하는 답변을 했으며, 메이지 신정부의 진무사인 세라 슈조가 센다이 번사에 의해 살해된 사건으로 인해 전쟁으로 기울게 된다.

전투[편집]

아이즈번의 가로 사이고 다노모는 전황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것을 보고,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나 가타모리는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징병에 나섰다. 또한 번에서 도망낭노 농민과 서민들에게도 무기를 주어 싸우도록 명했다. 그러나 다른 번과 마찬가지로 아이즈도 영지민에게 가혹한 세금을 부과했다. 졸지에 무거운 세금에다 전쟁까지 치르게 된 영지민들의 사기는 바닥을 쳤고, 도주자가 끊이지 않았다. 의기양양하며 도바·후시미 전투의 설욕에 불타는 아이즈 번사들과는 대조적이었다.

특히 번의 군자금 확보를 명목으로 자산의 대부분을 징발당한 아이즈의 서민들로서는 정복자인 신정부군을 ‘관군님’(官軍様)이라고 하였고, 아이즈 번사를 ‘회적’(会賊)이라고 부르며 경칭을 생략 했다.

또한 신정부군의 거점 확보를 저지하기 위해 일부 마을을 태워버린 것도 영지민들의 원한을 산 행동이었다. 따라서 이후 진군해 오는 신정부군이 아이즈 영지의 마을에서 많은 인부, 말, 군자금 등을 징발하여도 반발하기는커녕 환영하였고, 이에 응하는 사람까지 있는 형편이었다.

각주[편집]

  1. 大山柏『戊辰戦争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