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즙 신도비

심집 신도비
(沈楫 神道碑)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파일:심집 신도비.jpg
종목유형문화재 제32호
(1995년 11월 14일 지정)
면적127.5m2
수량1기
시대조선시대
소유청송심씨 첨정공파 종중회
위치
인천 공촌동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인천 공촌동
인천 공촌동
인천 공촌동(대한민국)
주소인천광역시 서구 경명대로 725-26 (공촌동)
좌표북위 37° 33′ 26″ 동경 126° 41′ 29″ / 북위 37.55722° 동경 126.69139°  / 37.55722; 126.69139
정보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심집신도비
(沈楫神道碑)
대한민국 인천광역시기념물(해지)
종목기념물 제14호
(1994년 11월 4일 지정)
(1995년 11월 14일 해지)
정보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심집 신도비(沈楫 神道碑)는 인천광역시 서구 공촌동에 있는 조선시대신도비이다. 1994년 11월 4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14호 심집신도비(沈楫神道碑)로 지정되었다가, 1995년 11월 14일 인천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32호 심집 신도비(沈楫 神道碑)으로 지정되었다.

개요[편집]

신도(神道)란 죽은 사람의 묘로(墓路)를 뜻하며,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운 비석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의 신도비는 2품 이상의 품계를 지닌 자에 한해 세우는 것으로 제도화되었다.

이 신도비는 조선 인조 때의 문신 심즙(1569~1644)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다. 심즙의 자는 자순(子順)이고 호는 남애(南崖),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1597년(선조 30) 문과에 급제한 뒤 형조·공조·예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이괄의 난이 일어나 인조가 공주로 몽진(蒙塵)할 때 호종(扈從)하여 호종공신이 되었다.

심집의 묘는 원래 경기도 시흥시에 있다가 인천시 서구 공촌동으로 이장하였으며, 이때 신도비도 함께 옮겼다. 비는 사각형의 받침돌[비대(碑臺)] 위에 길쭉한 직사각형의 몸돌[비신석(碑身石)]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돌[비개석(碑蓋石)]을 올린 모습이다. 비의 전체 높이는 1.9m이고, 너비 0.85m, 두께 0.53m이다.

거유(巨儒)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짓고, 홍봉조(洪鳳祚:1680∼1760)가 글씨를 썼으며, 유척기(兪拓基)가 비에 새기었다.

현지 안내문[편집]

{{인용문|심즙(1569~1644)은 28세인 선조 30년(1597)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형조·공조·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 났을 때 인조가 공주로 몸을 옮겼는데 그때 왕을 호위한 공으로 호종공신(扈從功臣)이 되었다. 심즙의 묘는 본래 시흥에 있었으나 근래에 지금 자리로 이장하였으며, 신도비도 그 때 함께 옮겼다. 신도비는 높이 1.9m, 너비 0.85m, 폭 0.53m의 크기이며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홍봉조(洪鳳祚)가 썼으며, 유척기(兪拓基)가 전서하였다.[1]

각주[편집]

  1. 현지 안내문 "심즙 신도비(沈楫 神道碑)

참고 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