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Theantares/박헌영 외신 인터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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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외신 인터뷰 사건이란 박헌영(朴憲永, 1900 ~ ?)이 1946년 1월 5일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합의된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는데, 국내 언론 보도와는 달리 뒤늦게 전해진 외신보도는 그가 "소련 1개국만의 신탁통치를 원하며, 10~20년 후 조선이 소련 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하여 이 때문에 벌어진 논란을 말한다.

사건의 개요[편집]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朴憲永, 1900 ~ ?)은 1946년 1월 5일 내외신 기자 회견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이튿날 국내 신문에 실린 기사에는 박헌영이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하며 반탁진영을 비난했다는 발언 요지가 실렸다. 좌파 진영은 연말의 반탁 입장에서[1] 새해 벽두에 찬탁 입장으로 돌아선 것이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큰 논란은 벌어지지 않았다[2][3]. 그런데, 1월 15일 청취된 샌프란시스코(桑港) 방송에서 뉴욕타임즈에 보도된 존스턴(Richard J. H. Johnston, 1910~1986)[4][5] 기자의 서울발 기사를 인용하여 "박헌영이 인터뷰에서 소련 1개국만의 신탁통치를 원하며, 나아가 10~20년 후 조선이 소련 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는 보도를 하여, 이에 격분한 사람들과 정당, 단체들이 박헌영 측에 거세게 항의하고 비난하는 파문이 일어났다.

이에 1월 17일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은 기자회견에서 그런 발언을 한 일이 없다며, 명백한 오보이고 사실무근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기자 회견에 참석했던 국내기자들도 박헌영이 그런 발언을 한 일이 없다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그래도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에 대한 항의와 비난은 그치지 않았으므로, 조선공산당은 1월 26일에 책임비서 박헌영의 명의로 미군정청에 문제의 기사를 쓴 뉴욕타임즈 존스턴 기자를 추방해달라는 공문서를 접수시킨다.

사태를 주시하면서도 민간의 일이라 직접 개입하지는 않고 있던 군정청은 불가피하게 진상 조사를 시작하게 되고, 그 결과 존스턴 기자의 기사가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2월 18일 발표한다. 공식적으로는 사건은 이로서 종결되었지만, 조선공산당은 한 차례 항의 성명을 발표하고, 한민당 등은 박헌영의 매국적 발언이 사실로 확인되었다며 공격하는 등 한동안 여진이 계속되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일들에 묻히게 된다. 이 사건은 남한에서 박헌영의 입지를 좁히고, 몰락의 단초가 되었다.

그런데 근래의 대다수 연구자들은 찾아낸 일부의 당시 신문 기사와 미군정청 문서를 토대로 존스턴의 기사는 오보이며, 미군정이 오보인 줄 알면서도 은폐하고 조작된 조사 결과를 발표하여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을 탄압하는 데 이용했다고 주장한다. 또 학계와 일반에는 이것이 널리 사실로 인정되고 있는 듯하다. 인터넷에 "박헌영 존스턴"으로 검색해 보면 온통 이런 식의 주장만 나오고, 이에 대한 반박 글은 거의 전무하다.

그러나 새로 발굴된 당시의 주요 문헌들을 보면 이런 주장은 성급한 판단으로 잘못된 것이고, 당시 미군정청의 최종 조사 발표가 맞다는 것이 재차 확인된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대로 미군정청이 박헌영과 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하여 음모를 꾸몄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새로 발굴된 자료들까지 검토하여 사건의 진상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946년 1월 5일의 박헌영 내외신 기자 회견은 내신과 외신 구분하여 따로 열렸으므로[6][7], 국내신문 기사와 기자들의 성명 및 이를 근거로 존스턴의 기사가 오보라고 판단한 미군정청 일부 인사들의 기록이 외신 보도가 실제 오보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모든 연구자들이 존스턴 기자의 박헌영 인터뷰 기사는 뉴욕타임즈에 실린 적이 없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1946년 1월 10일자 기사로 실렸다.[8] (음모론의 근간이 무너짐.)

존스턴 기자의 뉴욕타임즈 기사[9], UP 통신이 타전한 기사[10][11][12], 군정청 홍보장교(PRO) Tucker 대위가 당시에 기록한 메모[13] 등에 나오는 박헌영의 외신회견 발언은 서로 부합하며, 미군정청의 최종 조사 발표문[14][15]에 나오는 것과도 일치한다.

뉴욕타임즈 기사를 인용한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서울중앙방송국이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을 국내에 중계하여 청취된 것이며[16], 이는 당시 매일 해 오던 프로그램 진행 방식이었으므로[17] 미군정의 음모가 개입되었을 여지는 없다.

박헌영측은 그가 외신회견에서 문제의 발언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외신 기자들의 기사나 증언이 아니라 관계없는 국내 신문 기사와 기자들의 성명을 제시하여 사람들을 속이려 하였다.[18][19][20][21][22]

결론 : 존스턴은 기사를 조작하지 않았고, 미군정청이 이를 공산당 탄압에 악용할 음모를 꾸민 적도 없으며, 진상조사 발표문을 조작하지도 않았다. 박헌영은 외신회견에서 실제로 "소련 1개국만의 신탁통치를 원하며, 10~20년 후 조선이 소련 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되기를 희망한다"는 문제의 발언을 하였다.


박헌영이 발언할 때마다 민주주의라는 말을 남용하는 것에 대해 미군정청 기록들도 꼬집고 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는 정반대의 대척점에 있는데 박헌영은 입만열면 다른 사람들은 반동으로 몰고, 공산주의자들만 민주주의자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을 얄팍한 사탕발림이라고 하고 있다.[23] 해방 당시에도 공산주의식 용어혼란 전술이 만연해 있었고, 박헌영은 그런 방식을 가장 애용하는 선동가였다. 박헌영식의 논리라면 그가 추종하는 스탈린이 가장 민주적인 지도자가 되고, 미국은 파시스트 반동국가가 되는 듯하다.

기존 연구와 그에 대한 반박[편집]

이 사건과 관련한 후대의 주요 연구 문헌은 아래와 같다.

  • Bruce Com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 pp.224~225.[24]

“우익이 좌익을 매도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또 다른 사건은 1월 5일 박헌영이 외신기자들과의 면담에서 뉴욕타임스 서울특파원인 존스톤에게 신탁통치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었다. 존스톤은 박헌영이 “조선에 대한 소녈의 일개국 신탁통치를 전대 지지하며 5년 후 조선은 소련의 일연방으로 참가하기를 희망한다”고 기사화했다. 이러한 내용이 보도되자 한민당은 즉시 존스톤의 말을 인용하면서 “박헌영을 타도하자”라는 팸플릿을 배포하였다.…이 사건으로 인해 박헌영의 명성은 크게 상처를 입었다. 심지어는 좌익들 가운데서도 그는 조질적인 친소주의자로 낙인찍혔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1월초부터 우익집단들은 공산주의자들을 ‘한국을 소련의 일부로 만들고자 하는 나라를 팔아먹는 소련의 꼭두각시들’로 매도했다는 점이다.”

《브루스 커밍스 지음, 한국전쟁의 기원 하, 청사,1986, 김주환 옮김》




서중석, 현대사 사료의 문제(서중석) > Ⅱ. 해방시기 사료의 문제①-국내자료(남한) 國史館論叢 第73輯 (국사편찬위원회, 1997) : 하지는 진상을 알고 있었는데도 박헌영이 말했다는 부분에 대한 존스턴의 보도가 정확했다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성명서가 나오자 우익 신문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이를 대서특필하였다. - 이는 아무 근거 없는 주장임.


정용욱,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 (중심, 2003년 08월 05일) pp. 72~73에 정리해 놓은 이 사건의 경과
정용욱, 『해방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pp. 171~176.



위의 연구들은 거의 모두 존스턴의 오보라거나 미군정청의 공산당 탄압을 위한 음모가 개입되었다고 주장한다. Bruce Commings의 경우는 미군정이나 우파세력이 박헌영의 발언을 그를 공격하는데 이용했다고 지적하는 정도로 그친다. 처음으로 이 사건을 심도있게 연구한 방선주의 경우는 Bruce Commings의 책을 보고,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에서 미군정 기록들을 샅샅이 뒤져 이 사건과 관련된 많은 자료들을 발굴했으나, 국내 언론 기사들은 일부 밖에 보지 못해 사건을 잘못 이해하여, 오판을 하고 결론도 잘못 내린 것으로 보인다. 후속 연구자들은 몇 가지 국내 문헌을 더 찾아낸 것 외에는 거의 방선주의 연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를 답습하여 똑같이 잘못된 결론을 내리고 있고, 미군정의 음모론을 확대 재생산한 정도에 그친다. 이들의 잘못된 연구가 일반에는 거의 사실인 것처럼 알려져 있고, 이에 대해 반박하는 연구는 아직까지 나온 것이 보이지 않는다.


이들이 존스턴의 기사가 오보라고 단정하는 주된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샌프란시스코(桑港) 방송으로 전해졌다는 박헌영의 문제 발언은 그 보다 먼저 보도된 당시 국내 신문의 기사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 당시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국내 기자들도 박헌영이 존스턴의 기사에 나오는 것과 같은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 미군정청 인사들이 남긴 기록에 존스턴의 기사가 국내신문 기사와 다르다고 지적한 것이 많이 있고, 그 중에는 오보로 판단한 것도 다수 있다.
  • 기자 회견에 참석했던 태평양판 성조지(Pacific Stars and Stripes) 기자 Cornwall 중사가 자신은 박헌영이 존스턴의 기사에 나오는 그런 발언을 한 것을 듣지 못했다고 했다며 서울신문, Seoul Times 등이 보도했다.
  • 박헌영같은 노련한 정치인이 발언의 파장도 예상하지 못하고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이런 정도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음모론도 만들어 내었다.

  • 뉴욕타임즈를 샅샅이 뒤져 보았으나 문제의 박헌영 발언이 나오는 존스턴의 기사는 없었고, 하지(John Hodge) 장군의 메모철에도 그 기사는 실리지 않았다고 했으므로, 문제의 기사는 뉴욕타임즈에 실린 적이 없다.[14][25][26][27]
  •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실제로는 없는 뉴욕타임즈 기사를 인용하여 조작 방송을 했는데, 여기에는 미군정청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크다.[28]
  • 당시 국내 사람들이 샌프란시스코 방송을 직접 들었을 것 같지도 않으니 미군정청이 이를 청취한 후 '보도자료'를 만들어 국내 언론에 배포하여 보도하게 했다.[27][29][30]
  • 미군정청 문서에 일부 인사들이 존스턴의 기사가 오보라고 판단한 것이 다수 있으므로, 하지 장군도 이 기사가 사실이 아닌 줄 알고 있었지만 박헌영을 궁지로 몰기 위해 진상조사 결과를 조작하여 발표하도록 지시했다.[29][31]


그러나 기존 연구자들의 위와같은 주장들은 새로 찾아낸 몇 가지 핵심 자료들에 의해 모두 부정된다.

  • 박헌영의 기자회견 당시 국내 신문들은 대다수가 내외신 기자 회견이라고 하여 마치 국내 기자와 외신 기자들이 함께 회견한 것처럼 오해하기 쉽게 보도했고, 미군정청 사람들도 처음에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신과 외신 두 회견은 구분하여 따로 진행되었고[6][7], 외신 회견에서는 박헌영 본인도 영어로 문답하였다. 후대의 연구자들은 모두가 두 회견이 분리해서 따로 열렸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 따라서 외신 회견에 참석하지 않은 국내 기자들이 쓴 기사나 증언들은 존스턴의 기사가 오보라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따로 열린 두 회견에서 박헌영의 발언 내용이 달랐을 수도 있다.
  • 미군정청 사람들이 쓴, 존스턴의 기사가 국내신문 기사와 다르다고 지적한 기록도 두 회견이 따로 열렸으니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존스턴의 기사를 오보라고 판단한 기록도 거의 모두 국내 신문 기사와 다르다거나 국내 기자들이 박헌영은 그런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을 근거로 판단한 것이므로 존스턴의 기사가 실제 오보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
  • 모든 연구자들이 존스턴의 기사가 뉴욕타임즈에 실리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1946년 1월 10일자 뉴욕타임즈에 "Communist leader favors Russian control over Korea"라는 제목으로 실렸으며, 필자도 Richard J. H. Johnston인 것이 확인된다.[8]
  • 따라서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없는 기사를 조작 인용하여 보도를 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 당시 국내에서 청취 가능한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정체불명의 괴방송이 아니라 단파로 송출되던 "미국의 소리(VOA, Voice of America)" 한국어 방송이며[32][28], 1945년 12월 1일부터 서울중앙방송국이 매일 아침 7시 5분에 시작하여 30분간 이를 국내에 중계방송하였다.[17] 따라서 라디오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들을 수 있었다.
  • 박헌영의 외신 회견에 관한 보도도 이런 경로로 국내에서 청취가 된 것이며, 통상적으로 하던 방송의 일환에 지나지 않으므로 특별히 꾸며낸 일이 아니다. 중앙신문은 1월 17일자 기사로 문제의 박헌영 인터뷰와 관련한 샌프란시스코 방송을 국내에서 청취한 경로를 정확히 쓰고 있다.[16]
  • 뉴욕타임즈의 박헌영 외신 회견 보도를 국내로 전달하기 위해 미군정이 방송 과정에 특별히 개입할 이유도 없다. 우리 말로 국내에 방송된 내용을 미군정청이 특별히 "보도자료"로 만들어 배포했다고 하는 것은 더욱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 박헌영이 1월 15일의 샌프란시스코 방송으로 문제의 외신회견 발언이 국내에 알려지기 전인 1월 8일에 존스턴을 찾아가서 기사 취소를 요구한 것은 그가 국내 기자 회견에서와는 달리 외신 회견에서는 국내에 알려지면 문제가 될만한 발언을 실제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그런 발언을 하지 않았다면 기사 내용이 알려지기도 전에 그것이 논란이 될 줄 미리 알고 취소를 요구하기는 어렵다.
  • 박헌영 측은 외신 회견에 참석한 외신 기자들의 기사나 증언이 아니라, 외신회견에 참석하지도 않은 국내 기자들의 기사나 증언으로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려는 속임수를 부렸다.
  • 미군정청이 박헌영의 존스턴 기자 추방 요구로 진상 조사를 할 때는 이에 속지 않고 내외신 기자 회견이 구분하여 따로 열렸다는 것을 알았고, 외신 회견에 참석한 미국인 기자들만 조사하여 2월 18일에 존스턴의 기사가 사실이라고 발표하였다.[14][15][33] 그 근거는 존스턴 기자가 제출한 기사와 군정청 홍보장교 Tucker 대위의 메모장 내용이 일치하고, 태평양판 성조지(Pacific Stars and Stripes) 기자 Cornwall 중사가 이를 보고 사실이 맞다고 확인했으며, 이미 출국한 Massock (소속 미상)도 출국전 주위 사람들에게 박헌영이 문제의 발언을 했다고 말한 것 등이다.
  • 하지 장군이 조사도 하기 전에 존스턴의 기사가 잘못이라고 알았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으며, 진상을 알면서도 조사 결과를 박헌영에게 불리하게 조작하여 발표하도록 지시했다는 근거는 더더욱 없다.
  • 이 조사결과 발표 이후로 미군정청 인사들이 존스턴의 기사에 대해 계속 의혹을 표명한 기록은 전혀 없으므로, 일부 사람들이 처음에 품었던 존스턴의 기사에 대한 의심은 모두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청이 2월 18일 발표한 조사 결과가 사실이라는 것은 아래 기록으로도 증명된다.

  • 존스턴의 박헌영 회견 기사와 거의 같은 내용을 UP 통신도 보도했다.[11][10][12] (이것은 뉴욕타임즈 기사로 이미 시끄러워진 직후 뒤늦게 국내 신문에 보도되어 당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지나갔고, 후대의 연구자들도 이런 기사의 존재를 모른다. 이 UP 통신 기사도 샌프란시스코 방송과 거의 같은 시기에 국내에 알려졌으므로, 미군정이 굳이 방송에 개입해서 뉴욕타임즈 기사를 국내에 알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 박헌영의 외신 회견에 참석했던 미군정청의 공보장교(PRO) Tucker 대위가 당시 기록한 메모에도 존스턴의 기사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는 것을 대동신문이 1월 23일 보도했다.[13] (미군정청은 나중의 진상조사에서 이 메모를 확인했음)

위와 같이 새로 밝혀진 사실들로 존스턴 기자의 기사가 오보이고 미군정 측의 음모가 개입되었다는 기존 연구자들의 주장은 모두 반박된다. 실제로 외신 회견에 참석했던 7인 중 뉴욕타임즈 존스턴 기자의 기사, UP 통신의 기사, Tucker 대위의 메모가 일치하고, Massock와 Cornwall 중사의 이에 대한 확인 등 5인이 존스턴 기자의 기사가 맞다는 입장에 있었고, 나머지 2인의 의사만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박헌영은 국내기자회견에서와는 달리 외신회견에서는 뉴욕타임즈의 기사와 같은 발언을 한 것이 사실이며, 미군정청이 1946년 2월 18일 발표한 조사결과도 조작이라고 볼만한 어떤 근거도 없다.

다만 외신회견에 참석했던 Cornwall 중사가 자신은 박헌영이 존스턴 기자가 말하는 그런 발언을 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고 서울신문 등이 보도한 것 1건만은 문제가 될 수 있다[34][27]. 하지만, Cornwall 중사는 미군정청의 공식적인 진상조사 때는 Johnston의 기사와 Tucker 대위의 메모를 확인하고 그것이 옳다고 동의했다고 발표문에 나온다.[14][15][33] 두 내용은 서로 상충하나 공식적인 조사에서 다른 사람들의 메모를 확인하고 말한 것이 더 정확할 것으로 보인다. 최악의 경우 Cornwall의 말은 어느 쪽이 맞는지 알 수 없다고 본다고 해도 나머지 다른 증거들로 인해 기존 연구자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는데 큰 무리가 없다.


2월 18일 미군정의 공식 조사 발표가 있은 후에 조선공산당은 한차례 반박성명을 내기는 했지만 존스턴의 기사가 오보라고 입증할만한 어떠한 추가 증거도 내놓지 못했다. 그로부터 불과 19일 밖에 지나지 않은 3월 9일에 박헌영은 본인이 공동의장으로 있던 민주주의민족전선[35] 의장단의 외신 회견에 자신이 추방을 요구했던 바로 그 뉴욕타임즈 존스턴 기자와, 역시 자신이 문제의 발언을 한 것으로 보도한 UP 기자를 초청하여 외신 기자회견을 열었다는 것은[36][37] 그조차 존스턴의 잘못이 없다는 미군정의 조사 발표를 인정했다는 증거로 보인다. 박헌영은 내외신 기자 회견을 따로 해놓고도, 국내 신문 기사나 국내 신문 기자의 주장을 증거로 내세우며 자신이 외신회견에서 문제의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여 고의적으로 사람들을 속이려 했으나 당시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내놓아 후대의 연구자들을 속이는 데는 크게 성공하고 있다.


《주한미군사》는 박헌영의 뉴욕타임즈 인터뷰 기사로 벌어졌던 논란을 정리하여 기록하면서 끝에 아래와 같은 코멘트를 달았다.[38]

중도적이거나 보수적인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미군에게도 경각심을 일깨워 준 이 일화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효과적인 협조가 종말을 고하는 시작을 의미하였다. (This episode, which alarmed moderate and conservative Koreans as much as it alarmed Corps, was the beginning of the end so far as effective cooperation with the Communists was concerned.)


미군정청의 음모론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박헌영이나 공산주의자들은 항상 옳으며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훌륭한 사람들이고, 미군이나 남한의 우익들은 그들을 탄압하기 위해 나쁜 음모를 꾸미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는 신화를 믿는 듯하다. 이런 연구자들에게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을 대하면서 터득한 진리를 말해주고 싶다.[38]

당연히 공산당의 협조 여부는 무슨 말을 했는가보다는 무슨 행동을 했는가를 기준으로 판단되어져야 했다.(the measure of a party's cooperation had to be taken by what it did rather than by what it said)

박헌영의 외신 발언의 배경[편집]

마지막으로 남는 의문은 노회한 정치인 박헌영이 상식적으로 만인의 지탄을 받을 것이 뻔한 외신 보도와 같은 신탁통치 관련 발언을 과연 했을까하는 것이다. 그도 그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실제로 국내 기자들을 대상으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박헌영이 국내 기자 회견에서는 임정과 김구 및 이승만을 주로 비난한데 비해[39], 외신 회견에서는 미군정이 자신들과 같은 진정한 민주주의자(?)들은 탄압하고, 반동들만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해 준다면서 하지 장군을 주로 비난했다는 것을 보아도[14][33][12] 두 회견에서 다른 발언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외신 기자들을 상대로는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있었을까? 영어로 하는 외신 인터뷰는 적절한 영어표현 등 사전 준비를 상당히 했을 것이므로 단순한 말 실수가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발언으로 보이는데, 그런 발언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가 문제이다. 박헌영 본인 외에는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당시 그가 처했던 상황으로부터 두 가지 정도로 유추해 볼 수 있다.


하지 장군은 존스턴의 기사 내용을 보고 흥미를 가지면서 박헌영이 상부로부터 지시를 받은 것 같다고 했는데[40], 박헌영의 상부라면 소련 외에는 없다. 박헌영은 1월 초 하지와 자주 만났는데, 1월 1일에 만났을 때는 강한 반탁입장을 표명했다가 1월 3일에는 찬탁으로 돌아서 있었다고 한다[41]. 하지가 소련의 지시를 받는다고 여길만도 하였다. 당시 서울의 소련 부영사에 지나지 않는 아나톨리 샤브신이 박헌영은 자신의 심복(henchman)이라고 말하고 다녔고[38], 스티코프 일기에도 박헌영이 현안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자주 물었다고 나온다.[42] 여러 경우에 그가 소련으로부터 지침을 받았던 것이 분명하다. 소련은 1946년 2월 9일에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켜 사실상의 북한지역 임시정부 역할을 하도록 하면서 이를 소련군 민정사령부의 관리 아래에 두는 방식의 체제를 구축하는데, 이는 사실상 북한을 소련 1개국이 신탁통치하는 형태이다. 이러한 통치 방식을 남한에까지 확대 적용하는 것이 소련의 목표로 보이므로, 이런 계획하에 박헌영으로 하여금 외신 회견에서 전조선을 소련 1개국이 신탁통치 하기를 원한다는 문제의 발언을 하도록 지침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스티코프가 미소공동회담을 위해 1월 15일 새벽 서울에 도착한 직후 문제의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있었고, 이로 인해 박헌영 발언 폭탄이 터졌으므로 그는 2월 7일 귀환할 때까지 서울에서 박헌영 사건의 파장에 대해 보고를 받으며 지켜보았을 것이다.


다른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그는 김일성과 지도자 경쟁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1945년 12월 28일부터 이듬해 1월 2일 사이에 평양을 다녀왔다는 박병엽의 증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43][44], 어떤 경로로든 소련으로부터 신탁통치에 대한 지침은 받았을 것이고, 평양 현지의 분위기와 소련 군정의 의도에 대해서도 전해들은 바가 있을 것이다. 소련이 반탁을 굽히지 않는 조만식을 연금하고,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킬 계획이라는 것을 들었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지도자 경쟁에서 김일성이 결정적인 우위에 서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스티코프가 1월 중순 서울에 온다는 것도 미리 알았을 수 있다. 미군정청도 1946년 봄에 이미 남한 좌익들 사이에서도 김일성에 대한 지지가 박헌영보다 높았다고 하였는데[38], 그 자신도 이런 기류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도자 결정은 인민이 아니라 소련이 하므로, 소련에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인터뷰에서 국내용으로는 소란이 일 것이 뻔한 발언은 하지 않고, 외신에만 소련에 대한 아부성 발언이 보도되어 자신의 속마음을 소련이 알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외신보도가 국내에 알려지지 않으면 다행이고, 운이 나빠 국내에 알려지면 국내 신문 기사를 들이대며 그런 말한 적 없다고 잡아 뗄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기사는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운이 나빠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이를 인용 보도하는 바람에 국내가 발칵 뒤집힌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원래 계획했던대로 국내신문 기사를 들이대며 잡아뗐고, 국내기자들도 존스턴 기사에 대한 항의 성명을 발표해 주었다. 그래도 자신에 대한 성토가 그치지 않으니 미군정청에 존스턴의 추방을 요청했다. 그러자 미군정청은 외신회견과는 관련이 없는 국내 신문 기사와 국내 기자들의 말은 무시하고, 외신 회견에 참석한 기자들만 조사해 진상을 밝혀내서 발표하는 바람에 자충수를 둔 꼴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박헌영에 대한 국내 평판은 곤두박질 치고, 미군정의 박헌영에 대한 시각도 싸늘해졌다. 1946년 5월에 터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등으로 인해 공산당은 불법화 되고, 박헌영에 대한 체포 명령까지 떨어지자 북한으로 도주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미군이 정말 음모적 시각에서 이런 일을 기획했다면 존스턴을 의심하는 애매한 기록을 남겼을 리도 없다. 그런 기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처음에는 그들도 진상을 몰라 혼선을 빚고 있었다는 증거 밖에 되지 않는다. 진실이 금방 드러날 수 밖에 없는데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듯이 있지도 않는 뉴욕타임즈 기사를 근거로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조작보도를 하게 해서 국내에 전해지게 했을 리도 없다.

박헌영이 부렸던 교활한 술수는 당시에는 자충수였고, 남한에서 그의 몰락을 자초하는 단초가 되었지만, 후대에 빛을 발한다. 미군정청이 진상을 모를 때 일부 사람들이 써서 남긴 애매한 기록이 빌미가 되어 오늘날 학계에서는 그 일은 존스턴과 미군정청이 공모하여 조작 기사를 퍼뜨려서 박헌영 등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한 사건으로 둔갑하여 기정 사실화 되어 있다.


스탈린은 1945년 9월 초 하바롭스크 88여단에 있던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 시험을 보고 그를 북한지도자로 이미 내정한 상태였다.[45][46] 그러나 박헌영의 지속적인 이의 제기로 스탈린은 1946년 7월 초 두 사람을 함께 모스크바로 불러 다시 면접 시험을 보는 형식을 취했지만, 김일성을 그대로 지도자로 정하고, 박헌영에게는 격려의 말만 해 주었다.[47][48][49]

신자료를 추가하여 재구성한 사건 일지[편집]

아래에 이 사건과 관련하여 기존 연구자들이 찾아낸 자료와 새로 발굴된 자료들을 종합하여 날자별로 있었던 일에 대한 일지를 만들어 본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고 1945년 12월 27일부터 국내언론에 보도되자, 좌우 가릴 것 없이 대다수 정파가 반탁을 표명하고, 반탁운동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났다. 조선공산당 내에서도 반탁 기류가 상당했으나, 다른 정파와는 달리 공식적인 입장표명은 없었고,[50] 정태식이 개인적으로 반탁입장을 밝히는 정도였다.[1] 한편 박헌영이 김구와 임정세력이 주도하여 1945년 12월 30일 결성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상임위원)이 되었다고 당시 국내 언론이 보도하고 있으므로[51] 이 기사대로라면 그도 1945년 말에는 적극적인 반탁입장을 표명한 것이 된다.

미군측 기록에 의하면 박헌영은 새해 첫날 1월 1일에 하지(John Hodge)와 만났는데 이 때는 강력한 반탁의지를 표명했으나, 1월 3일에 다시 만났을 때는 이미 찬탁으로 입장이 전환되어 있었다고 하였다.[41] 박헌영의 신탁통치에 대한 입장은 1월 2일에 바뀐 것으로 보이는데[2][3], 이날을 기준으로 모든 좌파들이 연말의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표변하였다[52] 이런 당시 기록들로 보아 박헌영이 신탁통치에 대한 소련의 뜻을 파악하려고 12월 28일 밤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서 지침을 받고, 신년 행사에 참석한 후 1월 1일 밤 3.8선을 넘어 서울로 귀환했다고 하는 전 노동당 간부 박병엽(朴炳燁)의 증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43][44]


1월 3일에 좌파들의 대규모 반탁 집회가 예고되어 있었으나 실제 행사는 찬탁 집회로 돌변시켜 일대 혼란이 일어났고, 반탁 현수막등을 준비해온 사람들이 화를 내며 돌아가기도 했다. 미군정청은 이런 사태가 외부에서 지령이 내려온 때문으로 보고 있었다.[53][54][55]


박헌영은 1월 5일 내외신 기자들을 초청하여 신탁통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였다. 그 내용은 국내 신문에는 이튿날 보도가 되었지만, 1월 15일에 뉴욕타임즈 기사를 인용한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그가 외신 회견에서 "소련 한 나라만의 신탁통치를 원하며, 10~20년 후 조선이 소련 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되기를 바란다"고 한 것으로 보도하여 큰 논란이 빚어지게 된다. 이 일의 전말을 새로 발굴된 자료까지 추가하여 일자순으로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일자사건의 진행 상황비고
1월 4일 박헌영은 문제의 외신회견 하루 전날인 1월 4일 두 미국인 기자와 회견하였는데, 오후 3~5시 사이에는 미국 공산당원과, 6시부터 한국을 방문 중인 Edgar Snow(1905~1972) 와 만났다.[56][57] 회견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Snow가 1월 6일 미군정 사람들과 만나 Johnston 기자의 기사에 대해 이야기한 기록을 보면 Snow와의 회견에서는 특별히 논란이 될만한 발언을 하지는 않은 것 같다.[58]X
1월 5일조선공산당 대표 박헌영이 내외신 기자회견을 가지고 신탁통치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힘. 참여자는 국내 기자 12명과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의 존스턴(Richard J. H. Johnston, 1910~1986)[4][5] 기자를 포함한 외신기자 7명.[25] 회견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2시간임.[59][60]
다수의 국내 신문이 이튿날 회견 내용을 보도함.[61][60][6][59][39][62][63]

국내 신문 기사는 그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의 사항을 적극 지지한다는 찬탁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고, 반탁운동 및 관련 인사들을 비판했다고 함.
자유신문은 AP 기자도 참석했다 하고, 박헌영이 존스턴과 뉴욕타임즈의 신탁통치에 대한 의견을 존중하는 듯이 말했다고 보도.[6]

같은 시각 오전 11시에 광화문에서는 12월 30일 암살 당한 한민당 당수 송진우(宋鎭禹)의 영결식이 열리고 있었고,[64][65] 우파 언론사 기자들은 대다수가 그쪽으로 가고, 박헌영의 회견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박헌영이 고하의 영결식에는 얼굴도 내밀지 않고 같은 시간에 기자회견이나 열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우파들과는 공존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증거로 보인다.

이날 평양에서는 소련군이 신탁통치에 끝내 반대하는 조만식을 친일파로 몰아 고려호텔에 연금시켰고, 이후 누구도 반탁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강제했다.
기자회견은 외신과 내신 구분하여 두 차례 하였으며[61][6][7][66], 외신회견에서는 박헌영 본인도 영어로 문답함.[67][33]


이 사건에 관한 연구자들은 거의 모두가 박헌영의 기자회견이 내외신 통합하여 같이 열린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음.

외신 회견에서 그가 한 발언이 얼마 후에 국내에 알려져 큰 논란이 벌어지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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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 회견 참석자

미군정 조사발표문[14][15] : 3명의 미특파원(美紙特派員), 존스톤(Johnston, NYT)氏, 마속크(Massock)氏, 콘월 군조(軍曹, 중사, Sergeant), 미군사령부(美軍司令部) 피·알·오 장교(將校) 턱카 대위(Tucker 大尉) 등 7명.
Cornwall 중사가 Pacific Stars and Stripes reporter이다. PRO = Public Relations Officer.
3명의 미특파원은 INS 통신의 Howard Handleman(1914~1994), UP 통신의 Palmer Hoyt(1923 ~ 2005), AP 통신의 Robert Myers 로 보인다.[68][69]

(UP와 INS가 나중에 합병하여 UPI가 됨.)
1월 6일하지 (John Hodge) 장군은 주한 미군 사령부 정례 참모 회의에서 니스트(Nist) 대령에게 존스턴의 박헌영 인터뷰 기사, 외부로 나가지 않은 존스턴 기자의 메모가 매우 흥미롭다고 주의를 환기시키고, 박헌영이 상부(소련)로부터 지시를 받은 것같다고 함. 이 참모 회의에 참석했던 군사관(軍史官) 킵(Albert Keep)은 인터뷰에 참석했던 미군 장교가 존스턴이 박헌영의 발언을 곡해하여 써 놓았다고 발언했음을 같은 날짜의 「사관기장(史官記帳, Historical Journal)」에 남김. 공보국의 뉴먼(Glenn Newman) 대령도 이 보도의 진위를 의심하여 당시 한국을 방문중인 스노(Edgar Snow, 1905~1975) 기자에게 이를 문의하였는데, 스노는 이 인터뷰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박헌영의 견해가 아닐 것이라고 말함.[40][25][26]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않은 Edgar Snow의 말은 단순히 자신의 생각일 뿐 증거로서의 가치가 없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미군 장교라면 Tucker 대위 한 사람 뿐인데, 그는 다른데서는 일관되게 존스턴의 기사가 맞다고 진술했다.[13][33] 당일 참모회의 기록의 맨 뒤에 기입한 주석의 내용으로 보아 기록자 Albert Keep 중위는 박헌영에 상당히 우호적인 듯하다.

하지 장군은 박헌영이 1월 1일에 만났을 때는 강한 반탁의사를 표명했으나 1월 3일에 다시 만났을 때는 찬탁으로 바뀌어 있었다고 했는데[41], 이러한 태도의 표변은 소련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을 것이다.
미군정사령관 하지 장군의 고문 베닝호프(H. Merrell Benninghoff, Foreign Service Officer, Political Advisor)가 박헌영 및 존스턴 기자와 대면하여 그 발언에 대해 이야기함.[7] 이때 박헌영이 자신의 발언의 심각성을 깨닫게 됨.
(베닝호프는 지난 해 12월 27일 부임했음.[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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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7일CINCAFPAC ADV (Tokyo, Japan) 와 CINCAFPAC MANILLA에 보낸 01/07일자 Radiogram의 'G-2 Summary'에 문제의 박헌영과 존스턴 인터뷰 내용에 대한 언급이 나옴.[71] Johnston 기자의 기사 내용을 소개하며, 국내 언론 기사는 표현이 이보다 훨씬 더 완화된 것이라고 언급.
CINCAFPAC : Commander in Chief, Army Forces in Pacific
아래 1월 8일자 "G-2 정보 일지(G-2 Periodic Report)"의 내용과 같은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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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8일박헌영이 오전에 존스턴을 찾아가 지난 번 인터뷰 기사 취소를 요구하다 거절 당하고, 지난 발언을 수정하는 인터뷰를 하여 기사화해 달라고 함. 수정된 재인터뷰 기사가 1월 10일자 NYT에 실림.[72] 존스턴이 송고한 최초 인터뷰 기사는 송신 문제로 NYT에 실리지 않았으나, 1월 10일자 기사에 최초의 발언도 함께 나옴.
박헌영은 자신이 존스턴을 찾아간 날이 1월 12일이라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1월 8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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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 주간 정보 요약(G-2 Weekly Summary)’ 17호[73]는 소련 일국에 의한 신탁 통치를 원하고 10년 내지 20년 이내로 소 연방에 가입이 가능하다고 암시했다(hint)는 박헌영 회견 내용을 간략히 소개.
’G-2 정보 일지(G-2 Periodic Report)’[74]는 기자 회견 내용을 요약하면서, 남한 언론이 이 문제를 실제 성명보다 상당히 밋밋하게 다루었으며, 소련 단독 신탁 통치나 일정 기간 유보 후 소 연방 가입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지적.[26]
1월 10일박헌영의 최초 인터뷰 기사는 송신문제로 기사화 되지 못하고, 재인터뷰 기사가 1월 10일자 New York Times에 실림.[72][8] 기사 본문 중에 박헌영의 수정 발언 이전 최초 발언도 나온다.

NEW YORK TIMES, THURSDAY, JANUARY 10

U.S. Chief in Korea Receives Note From Russian Zone's Commander
By RICHARD J. H. JOHNSTON
By Wireless to THE NEW YORK TIMES.
SEOUL, Korea, Jan. 8 (delayed) --...

Communist Revises Views
Expressing fear that views voiced two days ago in a press conference "might be misunderstood in the United States, Pak Heun Yung, general secretary of the Communist party here, issued this morning a "restatement of his attitude" on the questions of a trusteeship for Korea and the possibility of the inclusion of Korea in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In a conversation with me this morning Mr. Pak demanded that I "correct the impression." When I refused to do other than stand by the story written two days ago, Mr. Pak agreed that he had not been misquoted, as he originally contended, but that "language difficulties may have been responsible for the misinterpretation.”
[The story referred to was incomplete because of transmission difficulties and hence was not published.]
Two days ago Mr. Pak said he had "no objections to a single-nation Soviet trusteeship for his country and that "the inclusion, after ten or twenty years of democratic development, of Korea into the Soviet Union” was a possibility.

New Version of Opinions
Mr. Pak, whose command of English is unusually good and who previously had never failed to get his ideas across clearly to the press, said he wanted to reword his opinions as follows:
"I cannot speak about the question of a one-nation trusteeship. It is not decided upon by the United Nations.
"About the incorporation of Korea into the U.S.S.R., at no time can I speak about this--present or future.
“The question of socialism or sovietism in Korea cannot be discussed now."
Through mysterious and devious sources, Mr. Pak learned parts of my story of two days ago, shortly after it was filed here. Mr. Pak was unable to explain satisfactorily how he obtained the information.

이 기사에서 존스턴은 지난 번 인터뷰 기사가 전송에 문제가 발생하여 기사화 되지 못했다고 하면서 그 내용을 요약해서 다시 밝혔다.
이 기사에서 존스턴은 박헌영이 기사 내용을 사전에 어떻게 알고 자신을 찾아왔는지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 박헌영이 1월 15일의 샌프란시스코 방송으로 문제의 외신회견 발언이 국내에 알려지기 전인 1월 8일에 존스턴을 찾아가서 기사 취소를 요구한 것은 그가 국내 기자 회견에서와는 달리 외신 회견에서 실제로 문제의 발언을 했으므로 이것이 국내에 알려질 때의 파장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학계에서는 거의 모두가 Johnston의 기사가 뉴욕 타임즈에 실린적이 없다고 주장함.
심지어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NARA)의 한국 관련 문서들을 가장 많이 조사한 재미학자 방선주도 자신이 뉴욕타임즈를 샅샅이 뒤졌으나 그런 기사를 발견할 수 없어 존스턴의 해당 기사는 실린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25]

그러나 과연 샌프란시스코 "미국의 소리" 방송이 없는 기사를 있다면서 인용하여 조작 방송을 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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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2일박헌영이 뉴욕타임즈 존스턴 기자를 찾아가 문제의 외신회견 발언 기사를 취소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주장함[75][76].

(실제로 박헌영이 존스턴을 다시 찾아간 날은 1월 12일 아닌 1월 8일임.[72] 존스턴이 쓴 1월 18일자 NYT 기사에는 박헌영이 반역자로 몰리고 있다면서 인터뷰 관련 내용을 간단히 언급함.[77])
1월 15일San Francisco 방송이 오전 7시 5분에 New York Times 기사를 인용하여 "박헌영이 회견에서 소련 1개국만의 신탁통치를 원하며, 조선이 10~20년 후 소련 연방의 일원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는 문제의 Johnston 기자의 기사 내용을 방송함.[9][78][79][80][16]

학계에서는 NYT에 실린적이 없는 내용의 괴방송(?)을 한 배후에는 미군정의 공작이 있을 거라고 의심함.[28]
당시 국내에서 청취할 수 있는 San Francisco에서 송출하는 방송은 정체불명의 괴방송(?)이 아닌 단파 방송 "미국의 소리(VOA, Voice of America)" 한국어 방송이며[81][28], 1945년 12월 1일부터 매일 아침 7시 5분에 서울중앙방송국이 30분간씩 중계함.[17] 이 과정에 미군정청의 공작이 개입될 여지는 없다.

문제의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뉴욕타임즈 기사만 인용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당시도 이 기사를 썼다고 알려진 존스턴 기자만 논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 방송을 최초로 보도한 1월 16일자 동아일보와 대동일보 기사에는 방송이 UP의 기사도 같이 언급한 것으로 나온다.[9][79] 1월 18일자 동아일보 사설은 이런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82] 왜 UP는 박헌영 측이나 반대측 또는 군정청 어느 누구도 거론하지 않아 논란을 피해 갔을까?

박헌영의 외신 회견 발언은 샌프란시스코 방송을 서울중앙방송국이 중계방송하여 이미 널리 알려졌는데도 불구하고, 미군정이 보도자료를 만들어 배포하고 한민당 기관지인 극우신문(?) 동아일보가 대서특필하여 문제가 됐다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인들이 한국어 방송을 못 알아들었을까봐 미군정 사람들이 친절하게 보도자료까지 만들어 돌렸다고 주장하는 것도 어이없지만, 방송을 통해 이미 널리 알려진 뉴스를 동아일보가 또 보도한 것이 무슨 죄인가?
샌프란시스코 방송 보도가 알려지자, 국내에서 각종 단체들이 박헌영을 배격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시위를 벌임.[83][84][85][86][87][88]
1월 15일자 ’G-2 주간 정보 요약(G-2 Weekly Summary)‘ 18호는, 그 어떤 한국 신문에서도 17호에 소개한 따위의 기사는 없었다고 지적.[73][26]
내신과 외신 회견이 따로 진행되었으므로, 국내 신문 기사와 존스턴의 기사가 반드시 같아야할 이유가 없음. 박헌영은 두 회견에서 다르게 말한 것임.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합의 사항 이행을 위한 후속절차 협의를 위해 테렌티 스티코프 등 소련군정 대표와 수행원 13명이 15일 0시 45분에 평양으로부터 기차로 서울역에 도착함.[89]
스티코프가 15일 새벽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아침 7시 5분부터 문제의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국내에 중계되어 박헌영 폭탄이 터졌다. 그는 2월 7일 평양으로 돌아갈 때까지 서울에서 이 사건의 파장에 대해 보고받고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가 이 기간동안 박헌영과도 만났는지는 확인이 안 됨.
1월 16일박헌영, 소련 일국 신탁통치 희망설을 부인하는 담화 발표.[90][91][75][76][92][93]
박헌영은 외신 회견은 따로 해 놓고도 관계없는 국내 신문 기사를 제시하며, 외신 회견에서 문제의 발언을 한 적이 없다고 거짓 주장을 하고 있다. 또 이 문제가 1월 15일 샌프란시스코 방송을 통해 국내에 알려지기 전인 1월 12일에 존스턴을 찾아가 문제의 기사를 취소해 달라고 요구했다는데, 이는 그가 외신 회견에서 국내 신문에 보도된 수준의 발언과는 다른, 문제가 될만한 발언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실제로 문제의 발언을 하지 않았다면 존스턴의 기사가 국내에 알려지기 전에 그 내용을 미리 알고 존스턴을 찾아갈 수가 없다.
우익계 각단체 긴급협의회, 조선공산당 배격 결의[94]
공산당 책임비서(共産黨 責任秘書) 박헌영(朴憲永)이 오후 7시 15분부터 중앙방송국을 통해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의 사항을 준수하자"는 요지의 정견 방송(政見放送)[95][96][97].
방송 연설은 박헌영이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외신회견 발언 논란 때문에 실제로는 정태식(鄭泰植)이 대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98]
1월 17일UP 통신의 박헌영 인터뷰 기사를 국내 언론이 보도함.[10][11][12]

蘇聯 一箇國의 托治 反對치 안는다, UP가 報導한 朴憲永氏談

UP 記者의 報道
共産黨 責任秘書 朴憲永氏가 八日 外人 記者團 會見에서 朝鮮의 信託統治 問題에 關한 談話中 「UㆍP」 通信이 美國에 打電한 內容 全文은 다음과 가치 傳하여 지고 잇다.
서울에 있는 朝鮮共産黨 責任秘書 朴憲永氏가 記者團에 言明하기를 「하-지」 中將은 眞正한 民主主義에 對하야는 彈壓을 하고 反動分子에 對하야는 自由스러운 態度를 取한다. 또한 朴氏는 蘇聯 一個國이 朝鮮을 信託統治하는데 對하야 反對하지 안흐며 朝鮮人이 卽時 蘇聯에 加入하는 것은 조화하지 안치만 獨立한 民主主義 朝鮮이 二十年內로 蘇聯邦에 加入됨을 擁護한다고 말하엿다.
《조선일보 1946년 1월 17일; 工業新聞 1월 18일》

문제의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뉴욕타임즈 기사 외에 UP의 이 기사도 언급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미군정청이 밝힌 외신회견 참석자 명단에는 UP기자의 참석을 명시하지 않았으나, 동아일보, 대동일보 1월 16일자 기사[9][79] 및 동아일보 1월 18일자 사설[82]로 보아 샌프란시스코 방송도 위와 같은 UP 기사를 인용하였으므로 UP 기자도 뉴욕타임즈 기자와 함께 박헌영의 외신 회견에 참석했을 것이다. 당시 서울에 있던 UP 기자는 호이트(Palmer Hoyt, 1923 ~ 2005)였으며, 그는 1월 16일에 서울에 있는 것이 확인되고[99], 3월 9일에도 박헌영 등의 외신 기자회견에 참석했다.[36]

UP의 기사가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전한 뉴욕 타임즈의 존스턴 기사와 거의 같으므로, 존스턴은 기사를 조작하지 않았으며, 박헌영이 외신 회견에서 국내 언론 인터뷰에서와는 다른 말을 한 것이 분명하다. 샌프란시스코 방송으로 박헌영의 발언이 국내에 전해져 이미 시끄러워진 후라 뒤늦게 나온 UP기사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지금의 학계에서도 이를 거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UP의 기사가 뒤늦게 알려진 것은 국내 계약사인 조선통신사가[100] 좌익계열이라 좌파에 불리한 기사는 자발적으로든, 좌익정당의 압력을 받아서든 배포를 하지 않는 것이 일상적이었으므로[101][102], 이런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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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은 1월17일자로 같은 회견에 참석한 미군 기관지 의 기자인 현역 군인 로버트 콘월(Robert Cornwall) 중사(Sgt.)가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외신기자들과 박헌영 사이에 오간 문답록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는데, 그는 박헌영이 “조선인이 조선인을 위해 다스리는 조선”을 원한다고 말했을 뿐 소련 일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나 조선의 소련 연방 편입 등의 발언을 듣지 못하였다고 보도했다.[27]

영문으로 간행되던 <The Seoul Times> 1월18일자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34]

미군정청이 2월 18일 공식 발표한 이 사안에 대한 조사결과에는 콘월 중사도 기자회견에 동석했던 다른 사람들과 같이 존스턴의 기사와 같은 박헌영의 발언이 었었다고 동의했으므로[14][33], 서울신문 기사가 사실 확인을 제대로 한 것인지 의문이 있음.
1월 18일뉴욕타임즈의 존스턴 기자가 박헌영과의 인터뷰 진상을 밝힘.[67]

(問) 朴憲永씨와 만난 일이 있는가?

(答) 지난 8일 내외가자단과 같이 만났는데 내 질문에 대하여 朴씨는 우리에게 영어로 말해 주었다.
......
(問) 그럼 그뒤(8일후) 朴씨와는 만난 일이 없는가?
(答) 朴씨가 나를 찾아 와서 단 두사람이 서로 전번에 한 말은 취소해 달라는 말과 재성명을 발표하겠다고 해서 취재한 일은 있다.
(問) 朴씨는 무엇이라고 하여 취소를 원하던가?
(答) 내(朴)생각에는 내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 같으니 취소해 주오. 그래서 나(존씨)는 잘못 알아듣지는 아니했다고 말한 즉 그(朴씨)는 그럼 다시 성명하겠다고 하여 재성명을 발표하겠다 하므로 나는 내손으로 朴씨의 재성명을 받아 응락을 얻은 후에 다시 타전했으니 18일부 뉴욕타임즈지상에는 게재되었을 것이다.

박헌영은 처음에 존스턴과 뉴욕타임스에 지난 번 인터뷰 기사가 오보이니 기사를 취소해 달라 요구하다 존스턴이 오보가 아니라며 거부하자, 자신이 지난 번 인터뷰 발언을 취소하고, 재인터뷰 하는 형식으로 수정 발언한 것을 뉴욕 타임스에 또 게재하게 함.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 박헌영 발언 보도에 대해 해명하고, 박헌영 배격 운동을 주도한 한민당(韓民黨)에 공개 사과 요구.[103][18][19][20]

조선 공산당의 항의 성명에서 내세운 존스턴의 기사를‘왜곡(歪曲)’으로 본 근거는 “1) 모든 서울의 신문사가 기자회견에 나왔고 다음 날 모든 신문이 보도하였는데 존스턴이 말하는 이야 기는 없었다. 2) 『星條旗』紙의 콘월 기자도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였다. 3) 12일 박헌영이 미국 영사관에 존스턴을 찾아가 항의하였을 때 존스턴은 사과하고 시정하겠다고 언약하였다. ”라는 세 가지이다.

1) 외신 회견은 국내 기자 회견과 따로 이루어졌으므로 국내 신문의 기사는 왜곡의 증거가 아니며, 2) 콘월 기자는 2월 18일의 미군정청 공식 조사 발표문에는 존스턴의 기사가 옳다는 조사 결과에 동의했다고 나오므로[14][33] 조공(朝共) 주장의 진실성에 의문이 있으며, 3) 존스턴이 사과하고 시정하겠다고 했다는 것은 조공의 일방적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내외신 기자회견을 따로 해 놓고도 같이 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사람들을 속이는 행위이다.

18일 『뉴욕 타임즈』는 8면에 존스턴의 서울발 기사로 한국의 분규에서 정당 간의 간격이 더 벌어지고 있으며, 박헌영이 인터뷰 발언으로 반역자(traitor)로 몰리고 있다는 기사를 실음[77][104]. 박헌영 관련 부분을 소개하면 “박헌영은 ‘어제’ 미국 언론과 회견했고, 소련 일국의 조선 신탁 통치에 대하여 아무런 반대가 없다고 말했다. 박헌영은 이 발언을 좌익 언론에 해명하면서 그의 발언이 와전되었고, 그는 언어 장벽(language difficulties)의 희생자라고 말하였다.”[25][26]

[기사 원문] Party rift widens in Korean dispute (Richard J. H. Johnston)
.......
In the latest break the parties on the Right have refused to attend further parleys and the Rightists continue to hurl the accusation of "traitor” at Pak Huenyung, Secretary General of the Communist party. Yesterday in a conference with the American press, Mr. Pak expressed himself as “having no objection to a single nation Soviet trusteeship" for Korea.

In his defense Mr. Pak is quoted in the Leftist press as saying that he was misunderstood and that he was the victim of "language difficulties."

1월 19일<조선인민보>와 영자지 <The Seoul Times> 1월 19일자는 문제의 내외신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국내의 12개 신문 및 통신사 기자 일동의 명의로 된 1월 18일자 성명을 실었다. 이 성명에서 참석 기자들은 박헌영이 소련의 한 연방으로 조선이 참가하기를 희망한다는 발언을 한 사실이 없음을 확인했다.[105][26][27]
내신 기자들은 박헌영의 외신 회견에는 참석하지 않았으므로 정확한 진상은 모른 채, 내신 인터뷰와 같은 내용일 것으로 추정해서 이런 성명을 낸 것으로 보임.
1월 20일군정청 공보부는 「정계 동향(Political Trends)」 17호에서 ‘박헌영 폭탄’이 가져온 여파를 게재. 박헌영은 어디론가 숨었고, 그의 적들은 300,000원의 현상금을 걸었다고 함.[106][25][26]
1월 22일’G-2 주간 정보 요약 (G-2 Weekly Summary)’ 19호는 "박헌영의 1월 5일 인터뷰 국내 신문 기사의 영역문(英譯文)을 보면 문제가 될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샌프란시스코 방송 내용이 보도되어 박헌영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신문과 정치 지도자들이 박헌영을 맹렬히 비난한다. ....박헌영의 부인은 특히 합동기자회견에 참석했던 기자들이 (박의 입장이 옳다는) 공동성명서를 냄으로써 구체적으로 입증되었다."고 하였다.[73][107][26]
이 글을 쓴 사람은 박헌영의 주장이 맞고, 존스턴의 기사가 틀린 것으로 보고 있으나, 제시된 근거가 잘못이며, 내외신 기자 회견이 동시에 같이 진행된 것으로 잘못 판단하는 것 같다. 외신과 내신 회견은 분리 진행되어 국내 신문 기사의 영역문(英譯文)은 실제 외신 회견 내용과 다를 수 있고, 외신회견에 참석하지 않은 내신 기자들이 박헌영의 주장이 옳다고 성명을 낸 것도 존스턴 기사가 오류라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1월 23일대동신문은 박헌영의 외신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Tucker 대위가 보여준 당시 자신이 기록했던 메모장을 번역하여 실으며, 존스턴의 기사와 일치한다고 보도함.[13]
미군정청도 2월 18일 공식적인 진상 조사 결과를 발표할 때 Tucker 대위의 메모장이 존스턴의 기사와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고, 또 다른 참석자 Cornwall 중사도 이 두 사람의 기록이 맞다고 확인해 주었다고 밝힘.[3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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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6일朴憲永氏는 뉴욕타임즈紙 記者 존스톤氏를 朝鮮으로부터 추방하기를 요구한다는 公文書를 朝鮮共産黨 責任秘書의 자격으로 서명 날인하여 美軍司令官에게 제출하였고, 동시에 朝鮮人記者 數名도 존스톤氏에게 대한 비난서에 각각 서명하였다. 즉 朴氏는 1월 5일 記者團會見席上 자기가 발표한 聲明書中에 존스톤氏는 완전히 共産黨 黨首의 聲明을 오해하여 인용하였다는 사실을 특별히 비난하였다. 이에 미군정청은 사안을 중대하게 생각하여 공식적으로 Johnston의 박헌영 회견 관련 기사 내용의 사실 여부 조사에 들어감.[33][15][108]
미군정청 문서 1월 26일자에는 버취 중위(Lt. Leonard M. Bertsch, 1910 ~ ?)[109]가 자신이 쓴 「정계 동향(Political Trends)」 17호[106]의 글이 존스턴의 기사가 박헌영의 발언을 정확히 보도하였다는 인상을 주는만큼 다음 호에 존스턴의 보도는 거짓이었다는 정정 기사를 써도 좋겠느냐고 공보국장 뉴먼 대령(Colonel Glenn Newman)[110]에게 묻는다. 뉴먼 대령은 안 된다고 하면서 그냥 두라고 말한다.[111][25][26][107]

January 26, 1946

Refer to political trend reports of January 20th, #17 relative to Paik Hun Yung's statement and Johnston's report. Lt. Bercsh (Bertsch), the author, admitted that it left an impression that Paik had been accurately reported by Johnston. He asked Colnel Newman if it would be all right if he included in the next political trends report a statement to the effect that it had been verified that Johnston's report was false. Colonel Newman said that he could not do so, that he wished it left just as it was.


이날 조선공산당 대표 박헌영 명의의 존스턴 기자 추방 요구가 담긴 공문서가 미군정청에 접수되었으므로 진상조사가 불가피해져 조사 후에 발표하면 되므로 버취 중위가 지난 번 글을 정정해서 다시 쓸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뉴먼 대령이 그렇게 말한 것으로 보임. 외신 인터뷰 현장에 가지도 않은 버취 중위는 국내 신문 기사와 기자들의 말을 근거로 존스턴의 기사가 거짓이라 판단했을 것이나 내외신 회견이 따로 진행되었으므로 이는 잘못이다. 공식적으로 거짓(false)이라고 확인된(verified) 적이 없기 때문에 정식 조사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 기록이 미군정청이 존스턴의 기사가 거짓인 줄 알면서 은폐하여 박헌영이 계속 여론의 지탄을 받도록 고의적으로 방치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음.
15일 서울에 왔던 스티코프가 미군정의 사전 양해도 구하지 않고 숙소 조선호텔에서 불시에 기자 회견을 열어 타스통신이 전한 3상회의 결정 내용을 발표함.[112][113] 미군정청은 스티코프의 돌발행동을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하여 대응성명 발표를 검토함.[114]
2월 7일하지 장군이 발송한 전문 속의 박헌영 인터뷰 사건 기록 - TFGBI #190, CG USAFIK for Benninghoff to SCAP, 081500/I, dated 7 February 1946.

.......
AMERICAN PRESS AND RADIO VERSION OF PRESS CONFERENCE GIVEN BY PAK HEUN YUNG, COMMUNIST LEADER, ON JANUARY 5, HAS CAUSED WIDE REPERCUSSIONS HERE AND HAS DONE GREAT DAMAGE TO THE PRESTIGE OF THE LOCAL COMMUNIST PARTY. (PD) PAK IS ALLEGED TO HAVE STATED THAT HE WOULD NOT BE AVERSE TO ONE-POWER TRUSTEESHIP BY SOVIETS FOLLOWING WHICH KOREA MIGHT WELL BECOME A SOVIETIZED STATE.(PD) THE TASS NEWS AGENCY RELEASES CONTAINING ALLEGATIONS THAT WE HAVE FOMENTED ANTI-TRUSTEESHIP DISTURBANCES IN OUR ZONE AND THAT AT MOSCOW THE UNITED STATES FIRST PROPOSED A TRUSTEESHIP UP TO TEN YEARS FOR KOREA WHICH THE SOVIETS MANAGED TO MODIFY TO MAXIMUM OF FIVE YEARS HAS CAUSED LITTLE EXCITEMENT HERE.(PD) IT APPEARS RATHER TO HAVE CAUSED A BOOMERANG UPON THE SOVIETS THEMSELVES. THE LOCAL PRESS GRANTING IT ONLY PASSING COMMENT WHICH WAS NOT CRITICAL OF UNITED STATES ACTIONS AT MOSCOW.(PD) ON 26 JANUARY GENERAL SHTIKOV, HEAD OF THE SOVIET DELEGATION, HELD A SURPRISE CONFLRENCE ONLY FOR THE LEFT WING PRESS AT WHICH NO AMERICANS WERE INCLUDED AND IN WHICH HE PRESENTED THE TASS RELEASE.(PD)
......

전문 속의 PD 는 . (PERIOD)를 뜻함.

박헌영의 외신 인터뷰 발언이 그의 위신에 엄청난 손상을 입혔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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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6일에 개막되었던 미소공동회담이 2월 5일 오후 5시 종료됨. 6일에 제3회 공동코뮤니케 발표.[115]

스티코프 등 소련대표 일행은 2월 7일 오전 2시 15분 특별열차로 서울을 출발, 평양으로 귀환하였다. 서울에 23일간 체류함.[116]

7일 아침 평양에 도착한 스티코프는 곧 열린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창립대회를 감독하였을 것이다.
2월 9일사실상 북한 정부인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부위원장 김두봉, 서기장 강량욱. 임시인민위원회는 소련군 민정청의 직접적인 지휘 감독을 받고 있었으므로, 박헌영이 희망한 소련 1개국에 의한 신탁통치 체제가 북한에 만들어진 것임. 위원장이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이 아니라 북조선 분국 책임자 김일성인 것이 문제였을 뿐.
2월 18일미군정청은 조사결과 박헌영이 실제로 Johnston의 기사 내용과 같은 발언을 한 것이 확인되었다고 발표하였다.[33][15][108]

당시 기록한 턱카大尉(Captain Tucker)와 존스톤氏의 手記中에는 질문한 것과 대답한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은 정확한 것으로 콘월 군조(軍曹, 중사)도 其後에 그 정확성을 인정하였다. (마속크氏는 이미 朝鮮에 없으나 그 당시 同氏가 동료들과 말한 중에 同氏는 이와 똑같은 問答을 들었다고 한다) 즉 朴氏와 朝鮮人記者의 비난 중에 인용된 限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質問)(존스톤) 朝鮮을 蘇聯國의 信託統治로 하는 問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對答)(朴氏 英語로) 나는 그 問題에 대해서는 아무 異議가 없다. 즉 우리는 蘇聯 1國信託統治에 異議가 없다.
(問) 將來 朝鮮의 政治的 發展過程에 대한 意見 如何?
(答) 우리는 蘇聯化한 社會主義的 路線에 따라 10년 내지 20년 안에 自主獨立 民主主義國家로 발전되기를 바란다.
(問) 이것은 결국 가까운 장래에 朝鮮을 蘇聯邦의 一聯邦으로 하고자 朝鮮을 蘇聯化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答)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不可能하다.
(問) 왜 只今 不可能하냐?
(答) 현재 朝鮮人은 이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地理的으로 보아서 只今 蘇聯邦에 포함되는 것은 불가능할는지도 모른다.
記者團會見席上 英語로 한 中, 以上 以外는 朴氏가 하지中將이 朝鮮의 진정한 民主主義 精神을 억제한다고 하며 하지將軍을 적극적으로 공격한 것이 대부분이있었다고 출석한 美國人 記者들은 승인하였다.

미군이 발표할 당시 발표문의 영어 원문이 남아 있다.[14] 이 발표문 원문은 방선주의 해제에도 이미지가 나오는데[25], 그는 이것을 보고 존스턴의 기사가 뉴욕타임즈에 실리지 않았다고 잘못 판단했으나, 국내 신문에 실린 최종 조사 발표문에는 존스턴이 송고한 전체기사 중 일부만 채택되어 기사화 되었다고 했다.

미군정청이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미국인들을 상대로만 조사하고, 국내 신문 기사나 국내 기자들의 이에 대한 주장은 조사 대상에서 배제한 이유는 처음에는 내외신 기자들이 같이 회견한 줄로 잘못 알았다가 조사를 시작할 때에는 박헌영이 외신기자들만 따로 회견한 것을 알았기 때문임.

이 공식조사 발표를 마지막으로 미군정 내부 인사들이 남긴 이 사안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없다. 국내 신문 기사들과 기자들의 말을 근거로 존스턴의 기사를 의심하는 기록을 남겼던 사람들도 대체로 공식 조사결과을 수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군정 기록에 존스턴의 기사를 의심하는 기록이 다수 남아 있다는 것도 군정청 사람들이 당시 사건의 경위는 정확히 모른채 각자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었고, 이 사안에 대한 군정청 자체의 방침이란 것이 없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니 애초에 사건을 조작하거나 이용할 계획도 있었을 리가 없다. 민간 차원에서 벌어진 일에 직접 개입할 명분도 없어 관망하다가 박헌영이 존스턴의 추방을 요구하는 공문서를 접수시키자 진상 조사에 나섰을 뿐이고, 하지 장군이 존스턴의 기사가 오보라고 조사 이전에 미리 알고 있으면서도 조사결과를 조작해서 발표하도록 지시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2월 19일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부는 전날 미군정청이 존스턴 기자의 본국 추방 요구를 받아들아지 않고, 오히려 그의 잘못이 없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한데 대해 항의 성명을 발표함.[117][21][22]

軍政廳 發表에 朝共서도 聲明

朴憲永氏 談話事件에 關한 軍政廳 公報局 發表에 對하여 十九日 朝鮮共産黨 中央委員會 宣傳部에서는 『이 事件은 當時 美國 AㆍP 記者와 星條紙의 「콘월」氏 等의 立證과 朝鮮記者團의 證言과 問題의 中心人物 「존스톤」氏 自身이 朝鮮文化人들의 質問에 對하야 事實 無根임을 對答한 事實에 비추워 眞相이 明白하여젓슴에도 不拘하고 이와가치 報道한 것은 謀略이며 同黨으로서는 民主主義的 綱領을 걸고 이것을 實踐하기 爲하여 싸워왓고 또 앞흐로도 이것을 爲하여 싸우겠다』는 意味의 談話를 發表하엿다. 《조선일보 1946년 2월 20일자》

조공의 이 체면치레 성명 발표 이후 더 이상 박헌영 본인이나 조선공산당, 또는 박헌영의 주장이 옳다는 성명을 발표했던 국내 기자들이 미군정청의 조사 발표에 항의하거나 재조사를 요구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고, 왜 국내 신문 기사나 내국인 기자들의 의견은 반영하지 않았느냐는 항의도 없었음. 승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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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군정청의 발표로 박헌영 인터뷰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데 대해 한민당이 조선공산당에 대한 비난 성명 발표.[118][119][120]
해방일보가 조공이 일본에 사람을 보내 일본 공산당과 뜨거운 형제애를 나누었다고 보도한데 대해서 비판함. 중공당과 모택동처럼 외국의 간섭을 배척할 것을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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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조선공산당이 북한과 소련을 찬양하는 담화 발표[121][122][123]

존스턴 기자의 기사에 대한 더 이상의 언급은 삼가하고, 일본 공산당과 제휴한다거나 북한에 수립된 정권과 같은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등의 주장을 내놓아 박헌영의 문제 발언에 쏠린 시선을 다른데로 돌리려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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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일오전 11시에 박헌영이 공동 의장인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35]의 의장단 7명 (의장 3명, 부의장 4명)이 New York Times의 Johnston, UP 의 Hoyt 등 외신 기자와 회견.[36][37]

議長團側에서는 許憲, 朴憲永, 金若山, 洪南杓, 李康國, 張建相, 李如星과 外國人記者는 AP의 탈스바크, UP의 호잇트(Palmer Hoyt, 1923 ~ 2005), 뉴욕타임즈의 존스톤이 출석하였다.

조선일보가 "AP의 탈스바크"라고 한 사람은 자유신문 기사를 볼 때 AP의 Morris Lanzberger이며[124], Robert Myers의 후임자로 보인다. 박헌영 외신 회견에 참석했던 Robert Myers는 한국을 떠났기 때문에 미군정의 진상조사 발표문에 조사 대상으로 언급되지 않았을 것이다.[33][14] 박헌영은 자신에 대한 기사 논란에도 불구하고, 민전(民戰) 회견에 자신이 추방을 요구했던 Johnston을 다시 초청하고 있다. 이는 미군정 조사 발표를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뉴욕타임즈나 샌프란시스코 방송과 거의 같은 내용의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던 UP 통신의 기자도 다시 초청하고 있다. 이러한 일은 박헌영 본인이 이 언론사들의 인터뷰 관련 보도가 사실이라고 인정한 증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새로 온 AP 특파원의 이름은 Morris Landsberg 가 정확하다.[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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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6일조선공산당 서기장 박헌영이 정례 기자회견에서 UP의 호이트 기자가 3월 22일 서면으로 제출한 질문에 대해 응답하였다.[126][127][128]
박헌영이 자신에 불리한 인터뷰 기사를 내보낸 UP 통신과 자주 인터뷰하는 것은 UP 보도가 사실이라고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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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미군정 당시 작성된 "주한미군사(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38]에는 박헌영 인터뷰 논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최종적으로 정리하여 기록하였다. (공식 조사 결과를 발표한 후 어느 시점에서 역사 편찬을 위해 당시 상황을 정리하여 기록한 것이다. 현존의 "주한미군사"는 각 사안이 있을 때마다 정리하여 기록해둔 초고이며, 미완 상태로 남아있다.)

좌익은 1월 3일부터 찬탁으로 돌변 / 1946년 봄부터 남한 좌익들 사이에서도 김일성이 박헌영보다 우위로 됨. / 소련 부영사 아나톨리 샤브신이 박헌영은 자신의 심복(henchman)이라 함.
존스턴 인터뷰 사건 이후 미군정은 박헌영과 공산주의자들을 더 이상 협력대상으로 여기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고 판단해야 된다고 함.


1946년 1월 3일에 “조선공산당 북한 책임비서”가 모스크바 회담의 결정에 대하여 “공산당 전 분야 책임비서”들에게 지시를 하달하였다. 이 지시는 모든 공산당원은 모스크바 회담의 결정을 지지할 것을 명령하였다.[註 038]

1월 3일의 좌파의 시가행진은 처음에는 반탁 시위였으나 몇 시간 뒤에 찬탁으로 바뀌었다. 외부 영향의 증거가 된 이와 같은 사건에 뒤이어 1월 8일에는 박헌영과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의 존스턴(Richard J. H. Johnston) 사이의 논란이 되고 또 많이 알려진 면담이 있었다. 영리하고 민첩한 기자는 공산당 지도자로부터 10~20년 사이에 한국의 소비에트화 계획에 대한 지지와 소련 일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선호한다는 것에 대해 많은 발언을 하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발언은 소비에트의 의미에 대한 설명이나 한국의 완전한 독립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주장으로 보완되었지만 뒤이어 나온 비난에 의해 묻히고 말았다.[註 039] 비록 몇몇 한국 신문들에 의해 지지는 받았지만 박헌영이 자신이 한 발언을 부인하고 존스턴의 추방을 요구하면서 자신의 위치는 더욱 약화되었다.[註 040] 존스턴이 거짓말한 것도 아닌데 그를 추방할 할 근거도 없었다. 존스턴의 발언은 그의 인터뷰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던 미국인 참석자에 의해서도 정당하다고 확인이 되었다. 이에 따라 군정사령부의 조사 이후 존스턴은 공식적으로 혐의를 벗었으며 박헌영은 모습을 감추고 숨었다.[註 041] 박헌영의 적들은 그의 목에 300,000원의 현상금을 걸었다.[註 042] 중도적이거나 보수적인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미군에게도 경각심을 일깨워 준 이 일화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효과적인 협조에 관해서는 종말을 고하는 시작을 의미하였다. 다른 사건들은 이와 같은 틈을 더욱 크게만 하였다.

[註 038] USAFIK G-2 Weekly Summary #32, 21 Apr. 1946, Incl. #2.
[註 039] 미 24군단 홍보장교와 당시 I and H 대리인들이 기록한 조선공산당 지도자 박헌영과 뉴욕타임즈의 통신원 리차드 J. H. 존스턴의 인터뷰, I & H Journal. 또한 TFGBI #190, CG USAFIK for Bennighoff to SCAP, 051560/I, dated 7 February 1946 참고.
[註 040] USAFIK G-2 Weekly Summary #19, p.3, 13 - 20 Jan. 1946.
[註 041] MG Press Release 19 Feb. 1946, Incl. #1 to USAFIK G-2 Periodic Report #156.
[註 042] USAMGIK, Bureau of Public Information, OPO, Political Trends #17, 20 Jan. 1946.

박헌영이 숨었다(hide)고 하고, 그의 목에 300,000원의 현상금이 걸렸다는 것은 1월 20일자의 Political Trends #17 에 나오는 말로, 2월 18일 미군정청이 존스턴의 기사 내용이 옳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하기 이전의 일이다. 1월 26일에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 명의로 존스턴 기자를 추방해 달라는 요구서가 군정청에 접수 되었으므로 박헌영은 그 후에도 공개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미군정청이 조사결과를 발표한지 불과 19일 후인 3월 9일에 존스턴 기자 등과 다시 외신 회견을 하고 있다.
1948년
12월 2일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12월 2일에 존 무초(John Muccio) 초대 주한 미대사가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도 이 문제에 대해 위의 주한미군사와 같은 취지로 말하고 있다. 당시는 박헌영이 북한 부수상 겸 외무상이 되어 있을 때인데, 미국 측에서도 이 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던 듯하다.
UN의 한국문제처리에 관한 미국무부문서 5(대한민국사자료집) > 박헌영 발언관련 정보 (Information about Pak Hun Yung statement)
X
1960년김을한(金乙漢, 1905~1992), 《여기 참사람이 있다》, (신태양사, 1960) p.88 : 朴憲永의 正體[24]

“박헌영도 뉴욕타임스의 특파원이라는 말에 구미가 당겼던지 연락원을 통하여 어느날 정오에 정판사에서 쫀스톤 씨와 단독 회견할 것을 승낙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쫀스톤씨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지만 약속한 시간에 정판사로 가서 연락원이 안내해주는대로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앉아 있노라니까 어디서 왔는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박헌영이가 마치 바람과 같이 나타났었다고 한다.”

.


  • 박헌영의 외신 회견이 1월 8일에 있었다는 기록이 의외로 많으나, 문제의 Johnston 기사 내용은 1월 6일 및 7일의 미군 기록에도 나오므로 국내 기자 회견과 같은 날인 1월 5일이 맞다. 날자가 다르면 완전히 다른 회견이 되므로 내외신 기자 회견이 함께 이루어진 것으로 혼동할 여지도 없다.
  • 미군정청의 일부 인사들이 남긴 존스턴의 기사를 의심하는 기록은 대부분 국내 신문 기사와 다르다는 점과 국내 기자들의 말을 근거로 한 것인데, 이는 내외신 기자 회견이 따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모르고 쓴 잘못된 것이다. 이를 미군정청이 존스턴의 기사가 조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하는 것은 억지이다.
  • "G-2"는 주한 미 24군단(XXIV Corps, 24th Corps)의 정보참모부임. G-1 : 인사, G-3 : 작전ㆍ교육, G-4 : 보급.[25]
  • USAMGIK : U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남조선주둔 미육군 군정청)의 약어. 애초에는 USAMGOK으로 썼으나, ‘GOK’가 아시아인을 경멸해서 부르는 ‘gook’와 발음이 비슷하여 USAMGIK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 MG : Military Government / CG : Commanding General / USAFIK : United States Armed(Army) Forces in Korea / CINCAFPAC : Commander-in-Chief, Army Forces of Pacific (미육군 태평양방면군 사령부)
  • SCAP : en: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a position held by General Douglas MacArthur during the Occupation of Japan following World War II.

주요 관련 자료 원문 이미지[편집]

1월 15일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인용 보도하여 논란의 원인이 되었으나, 모든 연구자들이 New York Times에 실린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Johnston 기자가 쓴 문제의 기사는 실제로는 NYT에 실렸으며, 1월 10일자 기사 "Richard J. H. Johnston, 《Communist leader favors Russian control over Korea》"이다. 박헌영의 요구로 먼저의 발언을 취소하고 재인터뷰하는 형식으로 Johnston이 쓴 1월 18일자 NYT 기사 "Richard J. H. Johnston, 《Party rift widens in Korean dispute》"도 있다[77][25]. 두 기사 모두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에 소장자료로 등록은 되어 있으나, 이미지는 올라있지 않아 내용은 직접 방문해야 확인할 수 있다. 아래는 이미지를 구하지 못한 이 두 기사를 제외한 나머지 주요 기록들의 원본 이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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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편집]

  1.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조선공산당의 鄭泰植, 개인자격으로 탁치반대를 표명 서울신문 1945년 12월 29일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탁치배격각당 각계층 대표자회, 국민운동 실행방법 결의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
  2.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조공, 3상회담 결의에 지지 표명 중앙신문 1946년 01월 03일
    反託보다 먼저 戰線 統一, 朝鮮共産黨中央委員會 態度 表明. 중앙신문, 1946.01.03
  3. 託治(탁치)는 國際協力(국제협력) 朝共(조공)의 態度表明(태도표명) : 1월 2일 동아일보 1946-01-05 1면
  4. 부음 기사(Obituary) : RICHARD JOHNSTON IS DEAD AT AGE 76 New York Times December 25, 1986
  5. 존스톤씨 25일 離韓 자유신문 1949년 10월 19일
  6. 국제적 민주조선 수립, 통일전선은 4정당 교섭으로 : 공산당 朴憲永씨 내외기자단과 회견 자유신문 1946년 01월 06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7. UN의 한국문제처리에 관한 미국무부문서 5(대한민국사자료집) > 박헌영 발언관련 정보 (Information about Pak Hun Yung statement) 1948년 12월 2일 무초(Muccio) 초대 주한 미대사가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 외신 회견은 한국 기자들과 분리해서 이루어짐.
  8. Richard J. H. Johnston, Communist leader favors Russian control over Korea New York Times 1946.01.10,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정치 고문이었던 Robert T. Oliver(1909 – 2000) 박사가 앞의 NYT 기사를 타이핑으로 옮겨 적은 것으로 제목은 다르나 내용은 같다.
  9. 朝鮮(조선)을 蘇聯屬國(소련속국)으로, 桑港放送(상항방송)이 傳(전)하는 朝共 朴憲永氏 希望(조공 박헌영씨 희망) 동아일보 1946-01-16 1면
  10. 유·피가 傳(전)한 問題(문제)의 電文(전문) 동아일보 1946-01-17 1면
  11. UP 記者의 報道 조선일보 1946년 1월 17일자 1면 최하단 우측
  12. 蘇聯 一箇國의 托治 反對치 안는다, UP가 報導한 朴憲永氏談 工業新聞 1946년 1월 18일
  13. 朴憲永 失言 事件 絶對로 辯明 못할 實事 : 臨席하엿든 美將校談 : 大東新聞 1946년 1월 23일
  14. General Hodge Official File, 1 January 1946 - 11 February 1946 pp.18~19 : 일자 미상 (국립중앙도서관 미군정청 문서)
    US-USSR: Communism in South Korea pp.236~237 : 1946.02.18 (국립중앙도서관 미군정청 문서) : 02/18의 공식조사 발표문의 원문 : 국내 신문 보도를 보면 최종 발표시 약간 수정된 듯하다. 여기에는 Johnston의 기사가 간행되지 않았다고 했으나, 국내 신문의 최종 발표문에는 송고한 전체 내용중 일부만 채택되어 기사화 되었다고 했음.
  15. 美國記者(미국기자)와 朴憲永氏(박헌영씨)의 問答(문답) 正確 : 동아일보 1946-02-19 1면 / D-storyⅡ 73 : 박헌영의 뉴욕타임스 발언 논란 동네(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2013.06.03
  16. 朴憲永氏의 談話 問題化 중앙신문, 1946.01.17 1면 :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국내에 중계되는 과정이 나옴.
  17. 桑港로부터 國語放送中繼 영남일보(嶺南日報) 1945.12.02
  18. Korean Nationalist Party spreads ill propaganda for Communist Party, even after writer spikes misunderstanding. : 박헌영 발언 논란에 대한 朝共의 반박 성명 (조선인민보 1946-01-18 기사 영역) -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19. "유욕(뉴욕)紙 所報는 誤傳" 共産黨에서 記者團에 言明 : 조선일보 1946-01-18
  20. 민족적 지도자를 誣言하는 음모배 韓民黨幹部는 공개적으로 사과하라 - 필자가 취소하는 괴기사 사건의 진상에 대하야 성명함 :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부 (朝鮮共産黨 中央委員會 宣傳部) 1946.01.18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21. 1946-02-20 조선인민보 (영역) : 미군정청의 조사 발표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항변. (국립중앙도서관 미군정청 문서) <<US-USSR: Communism in South Korea>> p.235, p.239
  22. 군정청 발표(軍政廳 發表)에 조공(朝共)서도 성명(聲明) : 조선일보 1946년 2월 20일 1면
  23. G-2 Periodic Reports, 2 January 1946 - 7 March 1946 p.102 박헌영의 민주주의관에 대한 코멘트, WS #6 (1945.10.30, p.6) ; p.182 박헌영이 말하는 공산당의 민주주의가 미국 민주주의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설명이 나옴, WS #12 (1945.12.11, p.6)
  24. D-storyⅡ 73 : 박헌영의 뉴욕타임스 발언 논란 : 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2013년 6월 3일
  25. 방선주(方善柱, 1933~ ), 「美國 第24軍 G-2 軍史室 資料 解題」 『아시아文化』 3호 (翰林大學校 아시아文化硏究所, 1987) 중 pp. 184~188 의 『A. Johnston 記者의 朴憲永 發言 ‘誤引’ 事件』 및 pp.211~213 자료 이미지.
  26. 주제로 본 한국사 > 한반도 신탁 통치안 > 4.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 > 4) 찬⋅반탁 논쟁에 대한 미 군정과 소련의 반응 우리역사넷 (서울대 국사학과 정용욱)
  27.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딱지는 달라도 수법은 의구하네 한겨레 21, 2002.01.30
  28. 박용규, 한국사론 44권 > 광복과 한국 현대 언론의 형성 > 미군정기 방송의 구조와 역할 > Ⅲ. 미군정기의 방송편성 > 1. 미군정의 방송정책과 방송 편성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뉴욕 타임즈』 존스톤 기자의 박헌영 기자 회견 결과가 국내에 널리 보도된 것은, 1946년 1월 15일의 미국의 소리 방송 때문이었다. 사실 여부조차 논란이 되었고, 정작 『뉴욕 타임즈』에는 실리지도 않았던 내용이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다루어진 것은 미군정의 공작 때문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의 소리 방송은 1945년 12월부터 고정 편성되어 30분 동안 방송되었다.
  29. 서중석, 《한국 현대민족운동 연구 : 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pp.323 ~ 324
  30. 조한성, 해방 후 3년 : 건국을 향한 최후의 결전 생각정원, 2015년 08월 14일 (공산주의자들의 약점을 제대로 파고들다 : 박헌영 존스턴 기자회견 사건)
  31. 서중석, 현대사 사료의 문제(서중석) > Ⅱ. 해방시기 사료의 문제①-국내자료(남한) 國史館論叢 第73輯 (국사편찬위원회, 1997)
  32. Voice of America wikipedia
  33. 자료대한민국사 제2권 > 1946년 02월 18일 > 군정청 공보국, 박헌영의 기자회견에 대한 존스톤의 기사가 사실이라고 발표 조선일보 1946년 02월 19일 : 군조(軍曹)는 "Sergeant First Class"로 한국군의 중사 계급을 말함.
  34. US-USSR: Communism in South Korea p.118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NARA 문서, 국립중앙도서관
  35.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한국민족문화대백과
  36. 자료대한민국사 제2권 > 1946년 03월 09일 > 민전 의장단, 외국인 기자단과 회견 조선일보 1946년 03월 09일
  37. 우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 民戰의장 제씨 외국기자와 문답 : 3월 9일 오전 11시 자유신문 1946년 03월 10일
  38. 미군정기 자료 주한미군사 >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Part Ⅱ > CHAPTERⅠ KOREAN POLITICS AND PEOPLE - THE FIRST SIX MONTHS > The Communist Party
    주한미군사 2 > 2부. 1장. 한국의 정치와 사람들, 첫 6개월 > 2. 공산당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9. RG 332, 332.3 Records of U.S. Army Organizations in Pacific Theaters, 1941-48, Records of the Historical Section of the Intelligence Division (G-2) of HQ, USAFIK, XXIV Army Corps, 1945-48,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1945-46 pp.14~17 에 1월 6일자 조선인민보의 박헌영 인터뷰 기사 영역이 나옴.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40. Corps Staff Conference : 1946.01.06 / A. Keep/ 1st Lt., Inf. RG 332, USAFIK,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Box No. 28, Administrative Material, etc.
    Historical Journal of Korea, 1 Jan - 30 Apr 1946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미 극동군 사령부 연합군 최고사령관 및 유엔사령부) pp.20~21 : 01/06 Albert Keep's Memo
  41. Radio TFGBI #157, Telegram from CG USAFIK to CINCAFPAC 25 Jan. 1946
    File:1946-01-25-좌익의 반탁에서 찬탁 돌변.jpg
  42. 박헌영#스티코프 일기에 나오는 박헌영의 행적
  43. 박병엽(朴炳燁)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선인, 2010) pp. 27~34
  44. 孫世一의 비교 評傳 (8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 信託統治反對鬪爭을 ‘새로운 獨立運動’으로 월간조선 2011년 3월호
  45. 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하 2권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 하권 pp.202~204 ;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 아카데미, 2008) pp.72-73
  46. 평양 소련군정 요원이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도 김일성이 귀국전 스탈린의 면접심사를 받은 것을 증언했다 : 김일성정권 내가 만들었다; 소련군 정치장교 G .메크레르의 증언 <對談> / 메크레르,G·惠谷治 極東問題. 159('92.5) pp.48-58. 極東問題硏究所
    Kim Il Sung's Soviet Image-Maker Moscow Times 07/22/2004
  47. 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하 2권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 상권 pp.326~327. 당시 평양의 소련군정은 서울에 있던 박헌영을 비밀리에 평양으로 데려갔고,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는 연해주군관구 사령관이었던 메레츠코프(Kirill Meretskov, 1897-1968) 원수가 보로쉴로프(현 우수리스크)에서 비밀리에 비행기로 평양으로 날아와 김일성과 박헌영을 태우고 모스크바로 갔다고 한다.
  48. 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동아일보사, 1993) 권1 pp.235~237;
  49. 박병엽 구술, 유영구, 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선인, 2010) p.70 : 김일성과 박헌영의 4차 회동이 1946년 6월 27일~ 7월 12일경까지 평양과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졌다고 했다. 이때 박헌영과 김일성에 대한 스탈린의 면접 시험이 있었다.
  50.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7일 > 소련의 조선신탁관리주장에 대해 각계에서 반대견해 피력 동아일보 1945년 12월 28일
  51.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0일 >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 선임 서울신문 1946년 01월 01일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印은 常任委員) ▲洪命憙 ..▲朴憲永 등 포함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1일 >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파업단행과 상무위원 선정 동아일보 1946년 01월 01일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洪命憙, ...朴憲永.
  52.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3상회의 결정 지지 전문 보냄 조선일보 1946년 01월 04일
  53. 미군정기 자료 주한미군사 >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Part Ⅱ > CHAPTERⅠ KOREAN POLITICS AND PEOPLE - THE FIRST SIX MONTHS > The Communist Party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미군사 2 > 2부. 1장. 한국의 정치와 사람들, 첫 6개월 > 2. 공산당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54. Telegram from CG USAFIK to CINCAFPAC 1946.01.30 - 김일성이 보낸 간첩, 박헌영이 여비줘서 경주로 보내, 남한 공산당은 소련이 지배 증거; 김일성은 소련이 수입해온 자
  55. USAFIK G-2 Weekly Summary #32, 23 Apr. 1946, Incl. #2. : 공산당이 찬탁 지시를 받은 듯
  56. US-USSR: Communism in South Korea p.185 : 1946년 1월 4일 박헌영이 두 미국기자와 인터뷰. 한명은 공산당원. 에드가 스노우는 저녁 6시부터
  57. “國際潮流를 把握하라”, 『亞細亞의 鬪爭』著者로 有名한 美人記者 에드가-스노-氏 “朝鮮現在” 視察次入京 신조선보 [新朝鮮報] 1946년 01월 06일 2면 1단
  58. 1946년 1월 6일자 「사관기장(史官記帳, Historical Journal)」의 뉴욕타임즈 박헌영 외신 인터뷰 기사 논란 관련 기록 Edgar Snow가 박헌영은 문제의 발언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함.
  59.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5일 > 조공(朝共) 朴憲永, 당면문제에 대해 내외기자단회견 서울신문 1946년 01월 06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60. 朴憲永氏와 記者團 會見, 統一 急速 實現 可能, 莫府會議 決定 承認을 原則으로 共産黨에서 各黨과 交涉中 중앙신문[中央新聞] 1946년 01월 06일
  61. 國際路線順應해야 朝鮮獨立은 可能, , 朝共朴憲永氏, 外人記者團과 會見 : 신조선보 [新朝鮮報] 1946년 01월 06일 2면 1단
  62. 朴憲永氏 外國記者團과 會見 民主衆報 1946.01.07
  63. 「三相會談支持」, 朴憲永氏外人記者團에 言明 영남일보[嶺南日報] 1946년 01월 08일
  64. 最後(최후)로靈柩(영구)에一哭(일곡) 昨日 故宋先生 永訣式(작일 고송선생 영결식) 1946.01.06 동아일보 2면
  65.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5일 > 전한민당당수 宋鎭禹의 장례식이 거행 조선일보 1946년 01월 06일
  66. 미군정청이 공식적으로 조사할 때 국내 신문 기사나 기자들의 발언은 증거에서 배제하고, 외신 기자 회견 참석자들만 상대로 사실확인을 했는데도 박헌영이나 조선공산당 또는 국내 기자들이 이에 대해 아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것도 두 회견이 분리해서 따로 이루어졌다는 증거이다. 국내 기자들은 외신회견 현장에 참석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을 모르므로 조사의 증인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67.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18일 > 뉴욕타임즈의 존 스톤, 박헌영과의 회담진상 밝힘 동아일보 1946년 01월 20일 (Johnston의 NYT 박헌영 보도 해명 : 동아일보 1946-01-20 1면)
  68. Translations South Korean Newspapers, Jan. 16. 1946 - Jan. 29. 1946 p.180
  69. "타스 보도는 근거없다", 하지 중장이 반박 p.9 AP 통신 서울 특파원 마이어스 (서울신문 1946년 1월 25일)
  70.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7일 > 하지고문으로 베닝호프가 着任하다. 자유신문 1945년 12월 27일
  71. RG 338,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Force in Korea, Lt. 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 1944-48, Entry 11070, Boxes 120-125, Army Commands Outgoing Radios, 1946.1 pp.100~101
  72. RG 332, 332.3 Records of U.S. Army Organizations in Pacific Theaters, 1941-48, Records of the Historical Section of the Intelligence Division (G-2) of HQ, USAFIK, XXIV Army Corps, 1945-48, Miscellaneous Publications and Periodic Reports, Box 97, USAMGIK: Miscellaneous Letters on US Policy; Indexed: Press Clippings of Korea 원문보기 p.216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73. HQ, USAFIK G-2 Weekly Summary = 駐韓美軍週刊情報要約 : 1945.9.9-1946.6.9 (Hallym University.Institute of Asian Culture Studies 한림대학교.아시아문화연구소, 1990) : #17 (1946년 1월 8일), #18 (1월 15일), #19 (1월 22일)
  74.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Headquarters,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 1945.9.9-1946.2.12 (Hallym University.Institute of Asian Culture Studies 한림대학.아시아문화연구소, 1988) 1946.01.08 일자
  75. 1946-01-17 조선인민보 - 박헌영의 해명 : 미군정문서 [Translations South Korean Newspapers, Jan. 16. 1946 - Jan. 29. 1946],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76. 朴氏 會見狀況 眞相을 發表 중앙신문, 1946.01.17 1면
  77. Richard J. H. Johnston, PARTY RIFT WIDENS IN KOREAN DISPUTE; Red Leader Called Traitor on Trusteeship--U.S.-Soviet Talks Deeply Secret January 18, 1946, Page 8 : The New York Times Archives
  78. 朝共의 蘇聯託治希望說, 韓民黨에서 排擊决議 / 朝共사實否定 : 신조선보 [新朝鮮報] 1946년 01월 16일 1면 6단
  79. 昨日 桑港 뉴-쓰, 朝鮮을 蘇聯의 한 屬邦으로, 이 反逆者의 罪相, 朝共과 그 一派의 賣國行爲 : 大東新聞, 1946.01.16, 2면
  80. 신조선보 기사 (영문 요약) :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전하는 뉴욕타임즈 박헌영 외신 인터뷰 발언 : 신조선보 1946-01-16
  81. Voice of America wikipedia
  82. <社說> 誤解이냐 歪曲이냐, 朴憲永氏 失言問題 동아일보 1946-01-18 1면
  83. 朴憲永(박헌영)의 賣國言動(매국언동), 韓民黨(한민당)에서 排擊(배격)을 決議(결의) 동아일보 1946-01-16 1면
  84.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15일 > 40여개 단체대표 긴급협의회, 조공대표 박헌영 타도 결의 조선일보 1946년 01월 17일 (一聯邦化란 千萬不當. 斷乎한 懲治를 決議. 40餘 團體 緊急 協議會에서. 決議. 附帶決議. 參加團體.)
  85. 朝共 朴憲永氏 言動에 큰 波動 : 全國的(전국적)으로排擊運動(배격운동), 各政黨과 五十餘團體 憤然蹶起 동아일보 1946-01-17 1면 : 동아일보는 박헌영이 문제의 발언을 부인한 것을 별도의 기사로 다루지는 않았으나 이 기사에 그가 사실이 아니라고 변명했다고 하였다.
    附帶決議(부대결의) 동아일보 1946-01-17 1면
  86. 朝鮮을 蘇聯의 聯邦化 하려는 朝共一派에 民族의 審判 大東新聞 1946.01.17 2면
  87. 斷乎懲治하라, 四十餘團體가 緊急會議, 韓民黨에서도 배擊決議 工業新聞 1946년 1월 18일
  88. 共産黨首失言問題 中央政界에 새로운波紋 민주중보(民主衆報) 1946년 01월 18일
  89. 美(미)·蘇共同委員會(소공동위원회) : 蘇聯代表昨日入京(소련대표작일입경) 軍政廳第一會議室(군정청제일회의실)에서 南北統一問題(남북통일문제)를 먼저審議(심의) 동아일보 1946-01-16, 1면
  90. 일국신탁 요구(一國信託 要求)했다고 우리당(黨)에 대(對)한 『데마』: 박헌영(朴憲永) 동무 쫀스톤 기자(記者)에 문책(問責) 『해방일보(解放日報)』 1946년 1월 16일
  91.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16일 > 박헌영, 소련일국신탁통치 희망설을 부인하는 담화 발표 조선일보 1946년 01월 17일 (박헌영氏는 사실을 부인 : 조선일보 1946.01.17 조간 1면)
  92. 朴憲永氏는 事實을 否認 工業新聞 1946년 1월 18일
  93. 言語觀係의 誤解 朴憲永氏가 聲明書 민주중보(民主衆報) 1946년 01월 18일
  94.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16일 > 우익계각단체긴급협의회, 조선공산당 배격 결의 전단 1946년 01월 16일
  95. 急速히 戰線統一, 共黨朴憲永氏政見放送 중앙신문, 1946.01.17
  96. Translations South Korean Newspapers, Jan. 16. 1946 - Jan. 29. 1946 p.57~58 조선인민보 1946.01.17 (영역) : 1/16 박헌영의 방송 연설 "Let us support the Tri-Power Pact which concerns Korea." Broadcast by Park, Hun Yung, leader of Communist Larty.
  97. 공산당 박헌영氏 16일 夜 특별 방송 조선일보 1946년 1월 16일 1면
  98. 3상회의를 인식하자, 共産黨 鄭泰植씨 특별방송 자유신문 1946년 01월 17일
  99. <The First Meeting of the Russian and American Delegations to the Conference> ; USSR Delegation Voices Desire for Cooreration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100.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03일 > 조선통신사, 미 UP사와 통신계약 체결 중앙신문 1945년 12월 03일
  101. 《합동통신 30년》, 합동통신사, 1975년, 11~12쪽
  102. 우승규, 《나절로 만필》, 탐구당, 1978년, 212, 216, 220쪽
  103. 박동지(朴同知)를 무고(誣告)하는 음모배(陰謀輩) 한민당 간부(韓民黨 幹部)는 사과(謝過)하라. 『해방일보(解放日報)』 1946년 1월 18일
  104. Richard J. H. Johnston, Party rift widens in Korean dispute New York Times 1946.01.18,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105. US-USSR: Communism in South Korea p.181 (The Seoul Times), p.238 (조선인민보 기사 영역) : 국립중앙도서관 미군정청 문서
  106. RG 338,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Force in Korea, Lt. 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 1944-48, Entry No. 11070, Box 68, 000.1 Binder 1, etc. (4 of 13) pp.50~51 Political Trends #17 (Jan. 20, 1946) : 버취 중위가 쓴 박헌영 인터뷰 관련 글
  107. 강준식(姜竣植), 「김일성(金日成)과 박헌영(朴憲永), 그 숙명의 대결」 『신동아(新東亞)』 355호 (1989.4), (東亞日報社, 1989. 4) pp.501~502 : <박헌영(朴憲永)·「존스턴」인터뷰사건>
  108. 朴憲永賣國言動의 實證 大東新聞 1946.02.19
  109. 신복룡, 좌우합작 : 여운형과 김규식의 꿈과 좌절 [주간조선 2359호] 2015.06.01 : 버취 중위는 하버드대학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이 있어 미군정 당시 계급에 비해 중요한 일들에 많이 간여하였다.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에도 깊이 개입하였다.
  110. 政治的統一(정치적통일) 뉴-맨 公報局長(공보국장)의 祝辭(축사) 동아일보 1946-02-02 1면
  111. US-USSR: Communism in South Korea p.156 (국립중앙도서관 미군정청 문서) : 방선주는 이 문서가 「사관기장(史官記帳, Historical Journal)」 1946년 1월 26일자 것이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사관기장에 나오지 않는다.
  112. 스티코프將軍(장군)의 發表(발표)한 三相會議決定內容(삼상… 동아일보 1946-01-28, 1면
  113. 蘇聯代表(소련대표)스將軍發表(장군발표)한 타스通信報道… 동아일보 1946-01-29, 1면
  114. Report of Inquiry 1946.01.29 (L. M. Bertsch/ 2nd Lt. Office of Public Opinion, HQ USAMGIK /G. Newman/ Col.)
  115. 朝鮮臨時民主主義政府(조선임시민주주의정부) 一個月以內(일개월이내)로樹立着手(수립착수) 동아일보 1946-02-07 1면
  116. 國內 諸團體와 協議, 臨時政府 樹立 援助, 一朔 內에 美蘇共同委員會 設置. 중앙신문, 1946.02.08
  117. 민족분열(民族分裂)을 책동(策動)하는 모략기자축방(謀略記者逐放)은 당연(當然) : 하-지 중장(中將)의 처치(處置)는 유감(遺憾) 『해방일보(解放日報)』 1946년 2월 20일
  118. 朝共과 日共握手에 兄弟的 友誼約束이란 萬不當 韓民黨 宣傳部長의 談話 동아일보 1946년 02월 20일
  119. 朝共도 中共을 본 밧드라, 韓民黨 咸宣傳部長談 중앙신문 [中央新聞] 1946년 02월 20일
  120. 박헌영 매국언동 2건(朴憲永 賣國言動 二件) 독립부인파와 제휴는 불능(獨立否認派와 提携는 不能), 한국민주당 함상훈씨담(韓國民主黨 咸尙勳氏談) 대동신문 1946년 02월 20일
  121. 자료대한민국사 제2권 > 1946년 2월 19일 > 한민당 선전부장 咸尙勳, 식량문제 등에 대해 담화 발표 조선일보 1946년 02월 20일
  122. 민주주의는 전진한다, 독립조선 건설은 남북통일로, 朝共 발표 자유신문 1946년 02월 21일 1면
  123. 民主的 朝鮮獨立, 南北陣營 連繫가 土臺, 共黨發表. 중앙신문, 1946년 02월 21일 1면 : 20일 발표 담화
  124. 주한미군사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Part Ⅱ > CHAPTERⅣ AMERICAN-SOVIET RELATIONS, THE FIRST YEAR > Trouble on the 38th > Health Restrictions "With this, the General proposed the names of Richard Johnston (NEW YORK TIMES), Palmer Hoyt (UNITED PRESS), and Morris Lanzberger (ASSOCIATED PRESS) for an excursion into North Korea."
  125. RG 332, 332.3 Records of U.S. Army Organizations in Pacific Theaters, 1941-48, Records of the Historical Section of the Intelligence Division (G-2) of HQ, USAFIK, XXIV Army Corps, 1945-48, Miscellaneous Publications and Periodic Reports, Box 97, USAMGIK: Miscellaneous Letters on US Policy; Indexed: Press Clippings of Korea p.222 : AP 특파원 Morrie Landsberg 의 Pacific Stars & Stripes 기사
  126. 南朝鮮에 黨員三萬餘, 共産黨 朴憲永氏 UP記者에 應酬 중앙신문 1946년 3월 28일
  127. UP記者 設問에 朴憲永氏의 答辯, 金日成氏大統領은 總意라면 支持한다 嶺南日報 1946.03.29
  128. 金日成將軍은 民族的英雄: 朴憲永氏의 對答 光州民報 1946년 3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