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Kirschtaria/호이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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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편집]

카르나타카 벨루르에서 호이살라 제국의 상징인 사자나 호랑이와 싸우는 살라.

경제[편집]

서기 10~13세기 가자파티 파고다

호이살라 정부는 농업 경제에서 얻은 수입을 통해 자급자족하였다.[1] 왕은 농산물과 임산물을 생산하는 소작농에게 집주인이 된 수혜자에 대한 서비스에 대한 보상으로 토지를 교부해주었다. 지주(가분다)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으며, 사람들의 가분다(프라자의 가분다)는 부유한 영주의 가분다보다 지위가 낮았다.[2] 온대 기후에 해당하는 고지대(말나드)는 소를 기르고 과수원과 향신료를 심기에 적합하였다. 를 비롯한 각종 곡류열대 평야(발리나드)의 주요 작물이었다. 호이살라는 물탱크, 수문이 있는 저수지, 운하 및 우물을 포함한 관개 시설을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징수한 세금을 통해 건설하고 유지하였다. 비슈누사가라, 샨티사가라, 발라바라야사가라와 같은 관개 시설들은 국가의 희생으로 만들어졌다.

인도 왕국의 일반 운송 수단과 군기병대에 사용하기 위한 말을 수입하는 것은 서부 해안에서 번창하던 사업이었다.[3] 오늘날 케랄라 지역에 위치한 항구를 통해 수출된 티크나무와 같은 풍부한 목재를 얻기 위해 숲을 벌채하였다. 송나라의 기록에서 남중국해 항구에 인도 상인이 있었다는 언급을 통해 해외 왕국과도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 남인도는 직물, 향신료, 약용 식물, 보석, 도자기, 소금, 보석, 금, 상아, 코뿔소 뿔, 흑단, 침향나무, 향수, 백단향, 장뇌 및 향신료 등을 중국, 도파르, 아덴 및 시라프 (이집트, 아라비아, 페르시아로 가는 관문)에 수출하였다.[5] 건축가(비슈와카르마스), 조각가, 채석장 노동자, 금세공인 및 기타 사원 건축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무역이 활발한 사원 건축 활동으로 인해 번성하였다.[6][7]

촌의회는 정부의 토지세를 징수하는 일을 맡았다. 시다야라고 불리던 토지 수입은 원래 불입 추징과 각종 세금이 포함되었으며,[1] 주로 직업, 결혼, 병거나 마차로 운송되는 물품, 가축 등에 세금이 부과되었다. 상품(금, 보석, 향수, 백단향, 로프, 원사, 주택, 난로, 상점, 소금 냄비, 사탕수수 압착기) 및 농산물(후추, 빈랑 잎, 버터 기름, 벼, 향신료, 야자 잎, 코코넛)에 대한 세금, 설탕)이 마을 기록부에 기록되어 있다.[4] 촌의회는 물탱크 건설과 같은 특정 목적을 위해 세금을 부과할 수 있었다.

정부[편집]

1220년경의 오래된 칸나다어 비문이 있는 할레비두의 가루다 기둥 영웅석( <i id="mwARc">virgal</i> ).

정부 관행에서 호이살라 제국은 내각 조직 및 명령, 지방 통치 기관의 구조 및 영토 분할과 같은 행정 기능을 다루는 이전의 잘 확립되고 입증된 방법 중 일부를 따랐다.[8] 기록에는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많은 고위직의 이름이 나와 있다. 수석 장관은 파차 프라다나라고 불렸고, 외교부 장관은 산디비그라히, 최고 재무관으로 마하반다리 또는 히란야반다리라는 이름이 존재하였다. 군대를 담당하는 단다나야카는와 호이살라 법정의 수석 판사직인 다르마디카리도 있었다.

호이살라 왕 비슈누바르다나

왕국은 지리적 크기의 내림차순으로 나두, 비샤야, 캄파나와 데샤로 나열된 지방으로 분할되었다.[9] 각 지방에는 그 속주의 통치자(단다나야카)에게 보고하는 장관(마하프라다나)과 재무(반다리)로 구성된 지방 통치 기구가 있었다. 이 지역 통치자 아래에는 헤가데스와 가분다스라고 불리는 관리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땅을 경작하기 위해 모집된 지역 농부와 노동자를 고용하고 감독하였다. 알루파스와 같은 종속 지배를 받던 씨족은 제국이 정한 정책에 따라 각자의 영토를 계속 통치하였다.[10]

가루다스로 알려진 잘 훈련된 정예 근위대는 항상 왕실의 구성원을 호위하였다. 이 가신들은 그들의 주인 옆에서 밀접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움직였는데, 이들은 너무나 완벽한 충성심을 지녔던 나머지 주인이 죽으면 자살하였으며,[11] 이 근위대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영웅석(virgal)을 가루다 기둥이라고 하였다. 할레비두의 호이살레스와라 사원에 있는 가루다 기둥은 비라 발랄라 2세 왕의 장관이자 경호원인 쿠바라 락슈마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비슈누바르다나 왕의 동전에는 호이살라식 칸나다 문자로 쓰여진 놀람바다비의 승리자(놀람바다비곤다), 탈라카드의 승리자(탈라카두곤다), 말레파스의 수석(말레파롤간다), "말레파의 용기(말라파비라) 전설이 들어가 있다.[12][13] 혼누 또는 가드야나라고 불리던 이들 금화의 무게는 굼 62그레인으로, 파나 또는 하나는 혼누의 10분의 1이고 하가는 파나의 4분의 1이며 비샤는 하가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다른 주화로 벨리와 카니가 있었다.[10]

종교[편집]

1268년 소마나타푸라에 지어진 첸나케사바 사원

11세기 초 촐라족이 자이나교도 서강가족을 패배시키고 12세기에 비슈누교도와 링가교도 증가는 자이나교에 대한 흥미의 감소를 가져왔다.[14] 호이살라 영토에서 주목할만한 자이나교 신앙지 두 곳은 슈라바나벨라곤다와 판차쿠타 바사디 캄바다할리이다. 8세기에 샹카라의 아드바이타 베단타가 남인도로 전파되면서 남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기 시작되었다.[15] 호이살라 시대의 유일한 불교 예배 장소는 담발과 발리가비였다. 비슈누바르다나의 왕비 샨탈라 데비는 자이나교도임에도 불구하고 벨루르에 카페 첸니가바라야 힌두교 사원을 의뢰하였는데, 이는 왕가가 모든 종교에 관대했다는 증거이다

호이살라의 지배기 동안 바사바, 마드바차리야 및 라마누자의 세 철학자에게 영감을 받으면서 오늘날의 카르나타카주에서 세 가지 중요한 종교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링가파의 기원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이 운동은 12세기에 바사바와의 연관성을 통해 성장하였다.[16] 아디 샹카라의 가르침에 비판적이었던 마드바차리야는 세상은 환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곳이라고 주장하였다.[17] 그의 드바이타 베단파는 우두피에서 인기를 얻으며 8개의 마타를 세울 수 있었다. 스리랑감에 있는 비슈누파 수도원의 수장인 라마누자는 헌신의 길(바크티 마르가)를 설파하고 아디 샹카라의 아드바이타에 대한 비평서인 스리바슈야를 저술하였다.[18]

이러한 종교적 발전은 남인도의 문화, 문학, 시 및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다음 세기까지 이들 철학자들의 가르침을 기초로 중요한 시와 문학 작품들이 쓰여졌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살루바(Saluva), 툴루바(Tuluva), 아라비두(Aravidu) 왕조는 비슈누파 힌두교도였으며, 비자야나가라의 비탈라푸라(Vitthalapura) 지역에는 라마누자(Ramanuja)의 이미지가 있는 비슈누파 사원이 있다.[19] 후기 마이소르 왕국의 학자들은 라마누자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비슈누파 작품을 저술하였다.[20] 비슈누바르다나 왕은 자이나교에서 비슈누파 힌두교로 개종한 후 많은 사원을 지었다.[21][22] 마드바차리야 교단의 후기 성자인 자야트리타, 비야샤트리타, 시리파다라자, 비디라자 트리타와 비자야 다사, 고팔라다사 및 카르나타카에서 온 다른 사람들과 같은 추종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널리 퍼뜨렀다.[23] 그의 가르침은 구자라트의 발라바와 벵골의 차이타냐 마하프라부와 같은 후기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24] 17세기와 18세기에 도래한 또 다른 바크티의 물길은 그의 가르침에서 영감을 얻었다.[25]

문학[편집]

11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슈라바나벨라곤다의 아카나 바사디에 있는 비라 발랄라 2세의 고대 칸나다어 비문.

호이살라 지배기 동안 산스크리트어 문학은 여전히 인기를 얻었으나, 현지 칸나다어 학자들의 왕실 후원도 증가하였다.[1][26][27] 12세기에 일부 작품은 참푸 스타일로 작성되었지만,[28]독특한 칸나다어 미터법이 더 널리 받아들여졌다. 상가티야 운율은 작곡에 사용되었으며,[29] 샤트파디(6행), 트리파디(3행) 운문 및 라갈레(서정시) 운율이 유행하게 되었다. 자이나교의 작품은 계속해서 티르탕카라의 미덕을 찬양하였다.[30]

호이살라 궁정은 자나, 루드라바타, 하리하라 및 그의 조카인 라가반카 등의 학자들을 후원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칸나다어에서 오래 지속된 걸작으로 꼽힌다. 1209년에 자이나교 학자 자나는 지역 신인 마리암마에게 두 어린 소년을 제물로 바치려고 한 왕이 이들을 불쌍히 여긴 나머지 소년들을을 풀어주고 인신공양을 포기하는 이야기 담긴 야소다라차리테라는 작품을 썼으며,[31][32] 이 작품을 기념하기 위해 자나는 비라 발랄라 2세 왕으로부터 "시인의 황제"라는 뜻의 카비차크라바르티라는 칭호를 받았다.[33]

스마르타파 브라만 루드라바타(Rudrabhatta)는 최초의 유명한 브라만 작가로, 그의 후원자는 비라 발랄라 2세 왕의 장관인 찬드라물리였다.[34] 그는 비슈누 푸라나 초기작을 기초로 악마 바나수라와의 싸움으로 이어지는 크리슈나의 삶과 관련된 참푸 양식의 자간나타 비자야를 썼다.

링가야티 작가이자 나라심하 1세 왕의 식객인 하리하라(Harisvara)는 시바파르바티의 결혼을 10개의 절로 설명하는 오래된 자이나교 참푸 작품인 기리자칼랴나를 썼다.[35][36] 그는 바차나 문학 전통의 일부가 아닌 최초의 비라샤이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할레비두(Halebidu)의 회계사 가족(카라니카스) 출신으로 함피(Hampi)에서 수년 동안 비루팍샤(시바의 한 형상)를 찬양하는 100편 이상의 라갈을 썼다.[37] 라가반카는 드물게 칸나다어 문법의 엄격한 규칙을 위반했지만 고전으로 간주되는 하리샤찬드라 카비야에서 샤트파디 운율을 처음으로 칸나다어 문학에 도입하였다.[33]

산스크리트어로는 철학자 마드바차리야가 브라흐마 수트라(베다에 대한 논리적 설명이 담긴 힌두교 경전)과 다른 학파의 교리를 반박하는 많은 논쟁이 담긴 리그브샤야를 저술하였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베다보다 푸라나에 더 의존하였다.[38] 또 다른 유명한 작품으로는 비다트리타의 루드라프르슈나바슈야가 있다.

건축[편집]

벨루르의 첸나케샤바 사원을 장식하는 많은 마다나카이 중 하나인 "다르파나순다리"(거울을 든 여인).
소마나나푸라의 케샤바 사원에 있는 나라심하 3세의 고대 칸나다어 비문(1270년).

언어[편집]

호이살라 통치자는 칸나다어를 강력히 지원하였다. 이들의 비문에서도 이러한 점을 종종 볼 수 있는데, 비문은 종종 오히려 산문보다 세련되고 시적인 언어로 작성되었으며, 비문의 가장자리에는 꽃 디자인의 삽화가 들어갔다.[39] 역사가 셸돈 폴로크에 따르면, 호이살라 시대에 칸나다어는 산스크리트어를 완전히 대체하는 궁정 언어로 자리잡게 되었다.[40] 사원은 브라만 지식인이 산스크리트어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역 학교로 사용되었으며, 자이나교불교 수도원은 초보 승려를 가르쳤다. 고등 교육 학교는 가티카스라고 불렸다. 현지 칸나다어는 신과 가까워지는 황홀한 체험(바차나 및 데바라나마)를 표현하는 바크티 운동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서로 묶인 종려나무 잎에 문학 작품이 쓰여 있었다. 지난 세기에 자이나교 작품이 칸나다어 문학을 지배했지만 시바파와 초기 브라만 작품은 호이살라 통치 기간 동안 인기를 얻었다.[41] 산스크리트어로 된 글에는 시, 문법, 사전, 매뉴얼, 수사학, 오래된 작품에 대한 주석, 산문 소설 및 드라마가 포함되었다.[42] 비문(Shilashasana) 외에 동판(타마라샤사나)은 칸나다어로 주로 쓰여져 있지만, 일부는 산스크리트어 또는 이중 언어로 쓰여졌다. 칭호, 족보, 왕의 기원 신화 및 축도를 기재한 이중 언어 비문 구절은 일반적으로 산스크리트어로 작성되었다. 칸나다어는 토지, 경계, 지방 당국의 참여, 수혜자의 권리와 의무, 세금 및 회비, 증인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여 보조금 조건을 명시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를 통해 현지 사람들이 모호함 없이 내용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43]

메모[편집]

 

  1. Kamath (2001), p132
  2. Thapar (2003), p378
  3. Marco Polo who claims to have travelled in India at this time wrote of a monopoly in horse trading by the Arabs and merchants of South India.
  4. Thapar (2003), p382
  5. Thapar (2003), p383
  6. Some 1500 monuments were built during these times in about 950 locations- S. Settar (2003년 4월 25일). “Hoysala Heritage”. 《Frontline》. 2006년 11월 17일에 확인함. 
  7. More than 1000 monuments built by the Hoysalas creating employment for people of numerous guilds and backgrounds (Kamath 2001, p132)
  8. Kamath (2001), p130–131
  9. It is not clear which among Vishaya and Nadu was bigger in area and that a Nadu was under the supervision of the commander (Dandanayaka) (Barrett in Kamath 2001, pp 130–31)
  10. Kamath (2001), p131
  11. Shadow like, they moved closely with the king, lived near him and disappeared upon the death of their master – S. Settar (2003년 4월 25일). “Hoysala Heritage”. 《Frontline》. 2006년 11월 17일에 확인함. 
  12. Many Coins with Kannada legends have been discovered from the rule of the Hoysalas (Kamath 2001, p12, p125)
  13. Govindaraya Prabhu, S (2001년 11월 1일). “Indian coins-Dynasties of South-Hoysalas”. Prabhu's Web Page On Indian Coinage. 2007년 1월 1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6년 11월 17일에 확인함. 
  14. Kamath (2001), p112, p132
  15. A 16th-century Buddhist work by Lama Taranatha speaks disparagingly of Shankaracharya as close parallels in some beliefs of Shankaracharya with Buddhist philosophy was not viewed favorably by Buddhist writers (Thapar 2003, pp 349–350, p397)
  16. Kamath 2001, p152
  17. (Kamath 2001, p155)
  18. He criticised Adi Shankara as a "Buddhist in disguise" (Kamath 2001, p151)
  19. Fritz and Michell (2001), pp35–36
  20. Kamath (2001), p152
  21. K.L. Kamath, 04 November 2006. “Hoysala Temples of Belur”. 1996–2006 Kamat's Potpourri. 2006년 12월 1일에 확인함. 
  22. S. Settar (2003년 4월 25일). “Hoysala Heritage”. 《Frontline》. 2006년 12월 1일에 확인함. 
  23. Shiva Prakash (1997), pp192–200
  24. Kamath 2001, p156
  25. Shiva Prakash (1997), pp200–201
  26. Ayyar (1993), p600
  27. Narasimhacharya (1988), p19
  28. A composition which is written in a mixed prose-verse style is called Champu, Narasimhacharya (1988), p12
  29. A Sangatya composition is meant to be sung to the accompaniment of a musical instrument (Sastri 1955), p359
  30. Sastri(1955), p361
  31. Sastri (1955), p359
  32. E.P. Rice (1921), p 43–44
  33. Narasimhacharya (1988), p20
  34. Sastri (1955), p364
  35. Sastri (1955), p362
  36. Narasimhacharya, (1988), p20
  37. E.P.Rice (1921), p60
  38. Sastri (1955), p324,
  39. Ayyar (2006), p. 600
  40. Pollock (2006), p. 288–289
  41. Narasimhacharya (1988), p17
  42. The Manasollasa of king Someshvara III is an early encyclopedia in Sanskrit (Thapar 2003, p393)
  43. However by the 14th century, bilingual inscriptions lost favor and inscriptions were mostly in the local language (Thapar 2003, pp393–95)

참고문헌[편집]

서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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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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