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Hurricanejoe/NKVD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NKVD의 휘장


내무인민위원부 (약칭:러시아어: НКВД 엔카베데[*],NKVD, 정식명칭:러시아어: Народный Комиссариат Внутренних Дел 나로드늬이 코미사리아트 브누트렌니흐 델[*])는 소비에트 연방의 공안기관, 비밀경찰이다.이것은 스탈린통치 시절에서 공포정치와 억압통치의 직접적인 실행기관이었다.

NKVD는 소련의 교통경찰을 포함한 정규경찰병력, 국경수비대, 소방대, 그리고 공문서보존처를 모두 산하조직으로 두고 있지만, 그보다는 강제노동수용소(굴라그)와 정치사찰 담당의 국가안보총국(GUGB)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국가안보총국이 냉전시절 유명한 소련의 정보기관인 국가안보위원회(KGB)의 전신이다.

NKVD는 대량즉결처분을 행했고, 강제노역을 목적으로 한 굴라그를 운영했으며, 체제저항운동을 억압했고, 불순하다고 판단된 소수민족 전체나 부농(쿨라크)을 인구희박지역으로 강제이주시키는 등의 소련의 폭압통치를 실행하였다. 또한 NKVD 해외파트는 해외에서 첩보활동이나 정치적 암살을 실행하였으며, 해외 정부의 전복공작이나 해외의 공산주의 운동을 감독하였다.

조직과 역사[편집]

KGB본부, 현재는 러시아 연방의 FSB의 건물로 쓰인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케렌스키 임시정부차르의 경찰을 해체하고 "인민 경찰"을 설립했다. 10월 혁명으로 케렌스키정부를 전복한 볼셰비키 정부는 내무부(MVD)를 인민위원(장관) 아래의 NKVD로 개편하였다. 그래서 NKVD의 기구는 대부분 MVD의 업무를 물려받았다. 이런 것들에는 지방정부와 소방업무,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들로 구성된 민병대의 감독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볼셰비키 정부의 인민위원회 (내각에 해당)는 각지에서 봉기하는 반혁명세력을 진압할 공안기관이 없는 것을 깨닫고, 공안기관이자 비밀경찰인 체카를 설립하였다. 이것은 펠릭스 제르진스키가 수장으로 조직을 이끌었으며, 반혁명세력으로부터 혁명을 수호한다는 명분 하에 즉결처분의 권리를 부여받았다.

체카는 1922년 NKVD산하의 국가안보국 약칭 GPU로 개편되었다. 1923년 소비에트 연방이 설립되었고,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RSFSR)은 소비에트 연방의 가장 큰 가맹국이었다. GPU는 다시 연방 전체를 관할하는 "통합국가정치국" OPGU로 개편되었고, 소련 인민위원회 (내각에 해당) 산하의 기관이 되었다. RSFSR의 NKVD는 밀리치야(일반 경찰)와 다른 여러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OGPU는 NKVD 산하로 들어가서 국가안보총국(GBGU)가 되었다. NKVD가 다시 RSFSR의 기관으로 분리되는 것은 1946년이 지나서였다. 이때 이름을 바꾸면서 MVD가 된다. 결과적으로 NKVD는 정규경찰 뿐만 아니라 굴라그를 비롯한 모든 수용소를 담당하였다.

1934년 설립이래, "소련 NKVD"는 많은 조직 변화를 겪였다. 1938년과 1939년 사이에만 NKVD는 3번의 조직개편을 실시했다.

1941년 2월 3일, NKVD의 특별부는 붉은군대의 군사정보를 담당하였다. 이때 GUGB는 NKVD에서 분리되어 국가안보인민위원부(NKGB)로 이름을 바꾸었다. 독소전쟁 개전이후, 1941년 7월 20일 NKVD와 NKGB는 다시 합병되었다. 군사첩보 부문은 1942년 1월 다시 NKVD소속이 되었다. 1943년 4월, 군사첩보 부문은 다시 국방인민위원부(국방부에 해당)소속으로 넘어와서 스메르쉬로 바뀌었다.동시에 NKVD는 다시 NKGB로부터 분리되었다.

1946년 "소련 NKVD"는 내무부(MVD)로 이름을 바꾸었고, NKGB는 국가안보부(MGB)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것들은 다시 합병되지만, 1953년 정보기관을 장악했던 베리아의 체포 및 처형 이후, 다시 분리되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경찰과 교정시설을 담당하는 내무부(MVD)와 정치사찰, 요인경호, 해외첩보, 비밀교신을 담당하는 국가안보위원회(KGB)로 분리되었다.

NKVD의 역할[편집]

NKVD의 주된 역할은 소련의 국가안보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NKVD는 광범위한 정치적 억압을 통해서 이것을 성공적으로 달성하였다.


억압과 처형[편집]

NKVD는 "인민의 적", 또는 "국가의 적"이라고 이름붙은 수많은 인물들을 굴라그에 수용하거나 처형하였다. 이런 인물들의 대부분은 NKVD의 특별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증거가 채택되는 기준은 매우 모호했다. 익명의 밀고조차 체포의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설득을 위한 물리적 수단"(고문)은 국가에 의해 허가되어 수많은 학대에 대한 문을 활짝 열여주었다. 이런것들은 피고문자의 증언뿐만 아니라 NKVD자체 문서도 밝혀주고 있다.

이런 작업에서 발생한 희생자가 묻힌 수백개의 공동묘지가 후에 발견되기도 하였다. 문서로 남은 증거들은 NKVD가 특별 "계획"에 의해 대량의 비사법적인 처형을 행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계획은 특정한 지역에서 처형자(공식적으로 "인민의 적")의 수나 비율을 정했다. 뿐만 아니라 NKVD명령 00486은 연좌제를 명시하여 불순분자들의 자녀들은 자동적으로 불순분자가 되었다.

공산당의 정치국은 대량의 파상적인 여러 숙청작업을 결정하였다. 기술자들이 연루된 "샤흐티 음모사건", 군 장교들이 연루된 "파시스트 음모사건", 의사들이 연루된 "의사 음모사건"들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러시아인 소수민족에 차별적이고 영구적인 숙청작업들도 실시되었다. 연해주에 있던 고려인의 집단 강제이주도 바로 이것의 대표적인 예이다. 뿐만 아니라 예브게니 투치코프에 의해 종교적 탄압도 실시하여, 유대교, 러시아 정교회, 가톨릭, 이슬람교, 그리고 다른 종교들도 억압받았다. 그러나 NKVD의 주된 희생자들의 대부분은 역시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던 러시아인이었다.

NKVD는 내부숙청도 행하여서 1930년대 활동했던 대부분의 요원과 지휘자들 자신이 숙청의 대상이 되어 처형되었다.

스페인 내전[편집]

스페인 내전기간에 NKVD의 요원들은 스페인 공산당과 연결되어 실질적으로 스페인 공화정부를 지배하였다. 또한 소련의 공화정부에 대한 군사원조는 소련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시켰다. NKVD는 마드리드 근처에 여러개의 비밀 감옥을 두고, NKVD의 적이라고 간주된 수백여명을 감금, 고문, 처형하였다. 처음에는 스페인 파시스트와 카톨릭이, 1938년 이후에는 무정부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자 주된 타깃이었다. 1937년 반스탈린 공산주의자인 마르스크주의통일노동당(Partido Obrero de Unificación Marxista, POUM)의 당수 안드레이스 닌은 이 감옥에서 고문당하고 처형되었다.

게슈타포와 협력[편집]

독소불가침협정 이후 나치 독일과 소련의 협력관계가 형성되었고, 폴란드를 양국이 분할점령하였다. 이리하여 1940년 폴란드 자코파네에서 NKVD와 게슈타포의 대표가 1주일동안 회담하고 폴란드의 정국안정을 위해 협력할 것을 합의했다. 이러한 회담은 여러번 계속되었으며, 소련은 나치를 피해 자국으로 망명한 독일-오스트리아인 공산주의자들 불순하다고 판정된 수백명을 게슈타포에 넘겨주었다.

NKVD는 폴란드 점령지구에서 1939-1941년에 수만명을 처형하였다.

독소전쟁기간[편집]

독소전쟁전쟁기간동안 NKVD부대들은 탈영자 처단을 비롯한 후방지역의 안보를 담당하였다. 소련이 수복한 지역에서 NKVD와 이후의 개편된 NKGB는 대량으로 부역자나 탈영병, 그리고 비공산주의자 레지스탕스 운동자를 체포하여 굴라그로 보내거나 처형하였다.

해외암살공작[편집]

NKVD 첩보부와 특수작전부문 부대는 반체제운동을 벌이는 소련인사들에 대한 해외암살 공작을 실행하였다. 그 희생자들은 레프 트로츠키(스탈린의 정적), 보리스 사빈코프(러시아 사회혁명당 혁명가 겸 테러리스트), 예브헨 코노발레츠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등이 있다.

흐루쇼프 이후[편집]

1953년 스탈린 사후 집권한 흐루쇼프는 NKVD에 의한 숙청을 중지시켰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NKVD에게 처형당하거나 수용소에 감금된 수천명의 희생자들이 복권되었다. 많은 희생자들의 가족들이나 친지들은 의구심과 함께 증거의 불충분으로 사후복권 신청을 하지 않았다. 이런 복권작업은 완전하지 않았고, 소련의 사법기관들은 흔이 증거의 불충분을 들어 이러한 사면복권작업을 기각하였고, 제한된 수의 희생자들만 복권되었다.

이러한 인권유린을 자행한 NKVD 요원들은 대부분 거의 처벌받지 않았다. 1930년대 대량으로 처형된 NKVD요원들도 공정한 사법적 판단 없이 숙청된 것이었다. 소련 붕괴후인 1990-2000년대 발트 3국에서 살고 있던 아주 적은 수의 전직 NKVD요원들이 현지 주민들에 대한 범죄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현재 생존에 있는 전직 요원들은 소련체제에서 확립한 상당한 연금과 특전을 소련에서 독립한 국가들로부터도 유지하고 있다. 그들중 몇몇은 희생자들에 의해 신분이 밝혀졌지만, 어떠한 혐의로도 기소가 되지 않았다.

첩보활동[편집]

NKVD는 코민테른을 통하여 전세계에 광범위한 첩보망을 구성하였다. 일본에서 활약한 리하르트 조르게, 나치 독일에서 활약한 붉은 교향악단 등은 각각 추축국에서 귀중한 정보를 빼내 소련에 제공, 소련의 승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1940년대 영국의 정부인사들을 포섭하였고, 영국의 첩보부인 MI6와 방첩기관인 MI5에 이중스파이를 잠입시켰다. 또한 미국에도 요원을 침투시켜 핵개발 계획의 전모를 빼내어 소련에 제공하여 소련의 핵개발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스탈린을 암살하려던 여러 음모를 분쇄하였다.


NKVD와 소련경제[편집]

굴라그에서 행해진 광범위한 강제노역은 소련경제와 시베리아 같은 오지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시베리아, 북극권, 극동지역의 정착사업은 소련 노동수용소의 첫번째 법률에서 그 목적으로 명시되었다. 노동수용소가 행한 탄광, 건설( 철도, 운하, 도로, 댐, 공장), 벌목, 기타의 작업은 소련 계획경제의 일부였고, NKVD는 자신의 생산목표를 세워두고 있었다.

또한 NKVD는 소련의 방위산업과 국방과학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정치범죄를 저지른 많은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굴라그보다는 안락한 샤라슈카라고 불리는 특별한 감옥에 수용되어서 연구개발활동을 계속하였다. 이곳에서 석방된 후에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과학자들이 있는데 그중에는 소련 로켓개발과 유인우주선의 계획자인 세르게이 코롤료프, 항공기 개발자인 안드레이 투폴레프도 바로 이곳 출신이다. 그리고 솔제니친은 작가지만 샤라슈카에서 복역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NKVD는 파벨 수도플라토프 장군의 감독아래 소련의 핵개발을 총괄하였다. 이 개발에 참가한 과학자들은 죄수는 아니었지만, NKVD가 미국에서 빼낸 핵개발 정보를 가지고 이들을 감독, 지도하였고, 우라늄 탄광이나 농축공장과 같은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한 작업에 NKVD휘하의 굴라그가 동원되었다.


같이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