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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선씨(寶城宣氏)
관향전라남도 보성군
시조선윤지 (宣允祉)
집성촌전라남도 보성군
주요 인물선형,선극례, 선세강, 선약해, 선거이, 선동열, 선병렬,
인구(2000년)34,842명 (176위)

보성 선씨(寶城 宣氏)씨는 전라남도 보성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기원[편집]

선씨(宣氏)의 연원(淵源)은 고대 중국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후손인 선왕(宣王ㆍ姬靜), 문왕의 넷째 아들 주공(周公ㆍ姬旦)의 후손인 노(魯)나라 환공(桓公)의 5세손 선백(宣伯.叔孫僑如), 송나라 선공(宣公ㆍ商(殷)나라 子太乙의 후손으로 이름은 子力)의 후손들이 ‘선(宣)’으로 성을 삼았으니 BC800~600년대의 일이다. 이들은 모두 제곡(帝喾)의 직계이며, 황제[黃帝ㆍ姬姓]의 후손들이다.

역사[편집]

우리나라 선씨는 명(明)나라 때 문연각 학사(文淵閣學士)인 선윤지(宣允祉)가 1382년(고려 우왕 8) 사신(使臣)으로 고려에 왔다가 귀화(歸化)하여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우거(寓居)하는 왜구를 섬멸하고 민생을 안정시켰으며,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벼슬을 버리고 전라남도 보성(寶城)에 은거(隱居)한 것이 시초가 된다. 그후 선윤지(宣允祉)는 유교(儒敎)의 진흥에 앞장섰고 인재 양성에 진력하며 보성에 터를 잡아 살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보성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게 되었다. 조선조에서 충렬(忠烈)의 가문(家門)으로 일컬어진 보성 선씨는 시조의 아들 안혁(安赫)이 태종(太宗)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했고, 증손 화(和:호조 참판 광유의 아들)는 태종 때 여산 군수(礪山郡守)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들의 진정(陳情)으로 두 번이나 고을 수령을 지냈다.

인물[편집]

  • 선형(宣炯, 1434년 ∼ 1479년) : 조선 초기의 무신. 할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광유(光裕)이고, 아버지는 증 우찬성 화(和)이다. 1451년(문종 1) 무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쳤다. 1456년(세조 1) 12월 경흥부사로서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 2등에 임명되었다. 1457년 3월 경상좌도수군처치사(慶尙左道水軍處置使)를 거쳐 안주목사·한성부윤·판종성부사(判鐘城府事)를 역임하였다. 그 해 8월에는 상호군(上護軍)으로서 도체찰사(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를 수행, 그의 신임을 얻었다. 10월에는 회령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463년 4월 인수부윤(仁壽府尹)을 거쳐 이듬해 정월에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4월에는 다시 한성부윤에 임명되었다. 1465년 정월에 경상도제언순찰사(慶尙道堤堰巡察使)가 되어 경주 북천(北川)의 수로를 건설하는 공을 세웠다. 6월에는 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절도사 김겸광(金謙光)과 뜻이 맞지 않아 교체되었다. 1467년 정월 비록 무장이지만, 성품이 청렴하고 대쪽같다 하여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 해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선군(船軍) 동원을 적극 주장하였다. 같은 해 7월 형조참판으로서 1,000인의 군졸을 이끌고 오자경(吳子慶)·한계미(韓繼美) 등과 1진을 이루어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의 상을 받고 황해도병마사·수군절도사에 임명되는 동시에 유성군(楡城君)에 임명되었다. 1470년(성종 1) 6월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3월에는 성종 즉위에 공이 있어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녹훈되었다.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영안북도절도사(永安北道節度使)를 역임하고 이듬해 8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유성군에 다시 임명되었다. 1477년에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사후 예조장으로 장례를 치뤘으며,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전라도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모셔졌다. 시호는 평양(平襄)이다.
  • 선거이(宣居怡, 1550년 ∼ 1598년) :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사신(思愼), 호는 친친재(親親齋). 판서 형(炯)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도사(都事) 상(祥)이다. 1569년(선조 2)에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다음 해 무과에 급제하였다. 1586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의 계청군관(啓請軍官)이 되었다. 1587년 조산만호(造山萬戶)이었던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녹둔도(鹿屯島)에서 변방을 침범하는 여진족을 막아 공을 세웠다. 1588년 거제현령·진도군수를 역임하고 이어 청백(淸白)으로 성주목사를 거쳐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도군수로서 그 해 7월에 한산도해전에 참가하여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도와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1592년 12월 독산산성(禿山山城) 전투에서는 전라도병마절도사로서 전라순찰사 권율(權慄)과 함께 승첩을 올렸는데 이 때 크게 부상당하였다. 이어 다음해인 1593년 2월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하여 도원수 권율을 도와 부원수로서 적을 대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같은 해 9월에는 함안에 주둔하고 있던 적군이 약탈을 일삼고 있었으므로 이를 공격하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그 뒤 충청병사에 올랐다. 한산도에 내려와서는 이순신을 도와 둔전(屯田)을 일으켜 많은 군곡(軍穀)을 비축, 공을 세웠다. 1594년 9월에는 충청수사로 와서 이순신과 함께 장문포(長門浦) 해전에서 또 공을 세웠다. 이후 선 거이는 충청병사를 거쳐 충청수사(1595년 을미 5월)로 임명이 되고, 전투에서는 많은 활약을 보여, 적들에게 비장군(飛將軍)이라고 불렸고, 왜군과 전쟁이 잠시 멈춘 1595년-1596년 사이에는 통제사를 도와 둔전을 관리하여 많은 군량을 비축하는 공을 세웠다. 선거이와 이순신은 서로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였고, 이순신은 그를 혈육과도 같이 여겼다. 충청수사로서 한산도 통제영 본영에 선거이가 있을 때 전염병에 걸려 이순신은 많은 걱정을 하고 자주 문병을 한 것이 난중일기에 많이 기록이 되어 있으며, 이후로도 거의 매일 만나는 사이였고, 선거이가 충청수사를 마치고 황해병사로 떠날 때(1595년 을미 9월) 이순신은 이별을 아쉬어 하였다. 이순신과 절친한 사이로, 이순신 보다는 5살 어리지만 계급상 7년이 높았고, 전투에서도 서로 돕는 사이였지만,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문신들의 견제를 받아 그 공로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다.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추봉되고 1801년(순조1년)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되었다.
  • 선세강(宣世綱, 1576년 ∼ 1636년) :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사거(士擧), 호는 매곡(梅谷). 아버지는 참의 봉장(鳳章)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여 1618년(광해군 10)평안도 벽단진첨사(碧團鎭僉使)를 제수받았다. 그 뒤 "경기감영"의 중군(京畿中軍)이 되어 영평산성(永平山城)의 축조를 감독하였다. 당상관이 된 뒤에 홍주영장(洪州營將)·안동영장(安東營將)을 역임하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경상좌도병마절도사 허완(許完)과 함께 경기도 쌍령(雙嶺)에서 우세한 적과 접전하여 많은 적을 죽였으나 끝내 패전, 전사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철종 때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의금부 훈련원사로 증직되었다. 경기도 광주군 남한산성 인근의 정충묘, 전라남도 장흥의 포충사(褒忠祠),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되었다.
  • 선약해(宣若海, 1579년 ∼ 1643년) :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백종(伯宗). 아버지는 무과에 장원급제한 대구 도호부사((都護府使) 의문(義問)이다. 1605년(선조 38)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631년(인조 9) 비변사낭청(備邊司郎廳)으로 있을 때, 문무의 재주를 겸비하였다고 추천되어 경상좌수사를 제수받아 국서(國書)를 가지고 청나라 심양(瀋陽)에 사행(使行)하였다. 이때 숭명배청(崇明排淸)의 대의(大義)에 입각하여 일을 처리하고 외국의 위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하여 돌아와서 품계가 승진되었다. 이와 함께, 금편(金鞭)·초구(貂裘)·옥배(玉盃) 등을 하사받았다. 뒤에 평산부사·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 철종 임술년에 가선대부 병조참판(兵曹參判) 겸 의금부 훈련원도사에 추증되었다.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되었다.

1556(명종11년)~1597(선조30) 자(字) 예중(禮中) 호(號) 의재(義齋) 본관은 보성(寶城). 시조 선윤지 의 8세손 이며 태종때 호조참판(戶曹參判 - 종2품) 안혁(安赫) 의 7세손 문종 때 순무사(巡撫使) 청유(淸裕) 의 6세손이며, 세조때 성균관 대사성(成均館 大司成 - 정3품)을 지낸 국충(國忠) 의 오세손이며, 중종때 장임랑부교(將任郞副校)를 지낸 석(錫) 의 손자이시며, 아버님은 선조때에 가선대부 겸 훈련원도정(嘉善大夫 兼 訓練院都正-정3품)을 지낸 여침(汝沈)이다. 선조9년(서기1576년)에 무과에 급제하였고임진왜란 때의 전공으로 대호군(大護軍 : 종3품의 무관)이 되고 경상좌수사를 역임한 뒤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선무원종공신녹권」과 언양 작괘천변의 선무원종공신비에 사적이 기록되었고, 울산의 충의사(忠義祠)에 제향(祭享)되었다.

과거 급제자[편집]

보성 선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7명, 무과 급제자 24명을 배출하였다.[1]

문과

선문주(宣聞周) 선세휘(宣世徽) 선순보(宣淳輔) 선약봉(宣若奉) 선준채(宣俊采) 선진규(宣鎭奎) 선헌(宣憲)

무과

선거중(宣居重) 선경협(宣景恊) 선귀인(宣貴仁) 선기주(宣起周) 선덕민(宣德敏) 선덕용(宣德容) 선봉령(宣鳳齡) 선순웅(宣舜雄) 선순흠(宣舜欽) 선시진(宣時振) 선영길(宣永吉) 선응길(宣應吉) 선응진(宣應軫) 선의남(宣義男) 선익도(宣翊道) 선익성(宣翊成) 선익헌(宣翊憲) 선중륜(宣重倫) 선팽(宣彭) 선필영(宣必英) 선호적(宣豪績)

생원시

선세휘(宣世徽) 선약봉(宣若奉) 선양중(宣養中) 선우빈(宣遇贇) 선정달(宣廷達) 선헌(宣憲)

진사시

선문주(宣聞周) 선병련(宣炳蓮) 선붕익(宣鵬翼) 선세기(宣世紀) 선우해(宣羽海) 선응직(宣應直) 선의문(宣義問) 선인후(宣仁厚) 선탁경(宣倬卿)

음관

선문주(宣聞周) 선원표(宣元杓) 선준채(宣俊采) 선창로(宣昌魯)

음양과

선흥윤(宣興胤)

인구[편집]

선(宣)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2,094가구, 38,849명으로 조사되어, 대한민국 성씨 인구 순위 70위이다. 대종인 보성 선씨는 34,842명이다.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