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토론:Dw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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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영합니다 (토론) 2016년 11월 30일 (수) 17:42 (KST)[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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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싱은 뉴욕시의 중심인 맨해튼에서 동쪽으로 약 20km 가량 떨어져 있는 교외 주거 지역이다. 플러싱은 I-495, I-678, I-295 등 뉴욕 지역의 주요 고속도로로 둘러싸여 있으며, 롱아일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길인 노던 불러바드가 타운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어서 편리한 교통 시설의 발달로 일찍부터 맨해튼의 배후 주거 지역으로 발전해왔다. 플러싱 지역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은 뉴욕 북동쪽에 위치한 메사추세츠주에서 살다가 그 지역 식민지 정부의 혹독한 통치를 견디지 못하거나 또는 좀 더 비옥한 토지를 찾아 이 지역으로 이주해 온 영국인들이었다. 당시 플러싱은 네덜란드어로 블리싱겐(Vlissingen)으로 불리며, 뉴욕 맨해튼 남부를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플러싱 지역의 초기 영국인 이주자들은 1645년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로부터 이주특허를 받고 이 지역으로 이주해왔지만, 이주하자마자 종교적인 문제로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와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

1645년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가 플러싱 지역에 이주 특허를 내줄 때, 이 지역 초기 이주자들인 영국인들에게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자유스러운 국가인 네덜란드에서와 동일한 만큼의 종교적인 자유를 보장한다고 했지만, 현지의 사정은 달랐다. 특히 피터 스타이브센트(Peter Stuyvesant) 네덜란드 총독이 부임하면서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와 영국인 이주자들 간의 종교적 갈등은 더욱 심화되어졌으며, 특히 1650년 많은 퀘이커(Quaker)[1] 교도들이 이 지역으로 들어오면서 종교적 갈등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식민지 정부와 지역 주민들 간의 종교적 갈등은 마침내 1657년 12월, 이 지역(플러싱)의 많은 주민들로 하여금 미국에서 종교와 정부를 분리시키고 개인이 믿는 신은 각 개인이 결정할 일이며, 이에 대해 정부는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내용을 담은 ‘플러싱 탄원서 (Flushing Remonstrance)’라고 불리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 문서는 미국 역사상 종교의 자유를 선언한 최초의 문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종교적인 갈등과 종교적인 자유의 쟁취를 미국 식민지 지역에서 가장 먼저 경험하고 이룩한 플러싱은 퀘이커 교도들의 주 거주 지역이 되었으며, 이후 주민들의 주류는 퀘이커 교도들이 되었다. 이처럼 종교적 자유와 더불어 노예 해방에도 동정적이었던 플러싱 지역의 대다수 퀘이커 교도들은 1774년 이후 노예를 소유하지 않기로 결정하여 플러싱은 많은 흑인들에게 매력적인 이주 지역이 되기도 하였으며, 1800년 초에는 플러싱 중심에 마케도니아(Macedonia) 흑인교회가 세워지기도 했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에는 플러싱을 위시한 퀸즈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중립을 지켰는데, 오직 프란시스 루이스(Francis Lewis)만 영국에 대항하여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열린 제2차 대륙의회에 참석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유일한 퀸즈 주민이 되었다. 그 때문에 그의 집은 불타버렸고, 그의 부인은 잠시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미국 독립전쟁이 끝난 1783년 이후 영국군은 물러가고 플러싱은 다시 조용한 마을로 돌아갔다.[2]

식민지 시기 동안 플러싱은 주로 상업적으로 나무를 재배하여 판매하는 지역으로 성장했는데, 사무엘 B. 파슨스(Samuel B. Parsons)를 비롯한 몇몇 농장주들이 그들의 농장지로 플러싱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나무 농장에서 재배된 나무들은 후에 맨해튼 센트럴 파크(Central Park)를 조성할 때 옮겨 심어지기도 했다. 미국 독립 후에는 플러싱은 맨해튼의 발달과 더불어 주거 지역으로 성장했는데, 1813년 village에서 town으로 승격되었다. 1900년대 들어서는 1910년에 맨해튼에서 롱아일랜드의 포트 워싱턴(Port Washington)을 연결하는 기차가 플러싱을 관통하면서 건설되고, 1928년에는 맨해튼과 플러싱을 연결하는 지하철이 건설되는 등 편리한 대중교통의 건설과 더불어 전원적인 타운이었던 플러싱은 맨해튼탄의 주요 배후 주거 지역으로 더욱 발달하였다.

1939-1940년간에는 플러싱 코로나 파크(Flushing Corona Park)에서 세계 박람회가 개최되기 시작하여 세계 최초로 텔레비전이 선보이기도 하다. 또 1964-1965년간에 개최된 세계박람회에서는 교황 요한 바오로(Pope Paul) 6세가 참석하기도 하여, 플러싱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며, 1964년 New York Mets 야구장이 지어지고, 1978년에는 플러싱의 U.S. Open 테니스 경기장이 건설되어 1881년부터 이어져 온 테니스 경기가 플러싱 지역에서 개최되어 오늘에까지 이르는 등 지역 발전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한편, 1965년도 이민법 개정으로 아시아 국가들에도 미국 이민 문호가 개방되면서, 한인을 비롯하여 중국인, 인도인 등 아시아인들이 물밀듯 플러싱 지역으로 들어와 플러싱의 성장을 부추겼다. 그리하여 1970년 이후에는 7번 지하철 노선 주위지역이 한국인, 중국인, 인도인 등 많은 아시아인들의 집중 거주지역이 되면서 7번 지하철을 이용하는 아시아인들이 증가하자, 뉴욕시민들은 7번 지하철을 ‘오리엔탈 익스프레스(Oriental Express)’라고 부르기도 했다. 최근 2000년 이후에는 개발 붐이 불어 곳곳에 새로운 고층 건물들이 지어져 플러싱의 스카이라인(skyline)을 바꿔가고 있다. 또한 플러싱은 국제공항인 케네디(John F. Kennedy)공항과 라과디아(LaGuardia) 공항이 10∼20분 내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모든 편리한 교통시설을 다 구비하고 있다.

플러싱은 물고기 모양의 롱아일랜드의 물고기 눈에 해당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롱아일랜드는 남북의 길이가 37km, 동서의 길이가 190km이며 전체 면적이 3,600㎢로써, 한국의 제주도 면적보다 2배정도 큰, 대서양의 북동쪽으로 길게 뻗은 섬으로 섬의 전체 인구는 약 760만 명이다. 롱아일랜드의 서쪽은 뉴욕시의 일부인 브루클린과 퀸즈이며, 동쪽으로는 낫소(Nassau)와 서폭(Suffolk) 카운티(County)로 연결된 교외지역의 비교적 부유한 안정적인 주거 지역들이다. 롱아일랜드는 플러싱에서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은 한인들이 자녀들의 교육과 전원생활을 위해 선호하는 뉴욕 인근의 주거 지역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이처럼 플러싱은 서쪽으로는 맨해튼과 1시간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고속도로와 지하철, 기차 및 항공 교통편 등이 발달하고, 많은 고용 기회 제공과 소기업 활동이 용이할 뿐만 아니라 롱아일랜드라고 하는 교외 지역의 풍부한 주거 지역까지 겸비하고 있어 이민자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에는 가장 최적의 장소라고 여겨지며, 실제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부문에서 그러한 아메리칸 드림의 신화를 이룬 많은 아시아인들이 배출되고 있다. 뉴욕 플러싱에 미국 동부지역 최대의 코리아타운이 자리잡고 있다.

플러싱 코리아타운 찾아가기

각주[편집] 이동 ↑ 퀘이커교는 1650년 국의 죠지 폭스(George Fox)가 제창한 명상운동을 시작으로 17세기에 나타난 개신교의 한 종파이다. 퀘이커는 ‘하나님 앞에서 떤다’는 죠지 폭스의 말에서 유래했으며, 퀘이커교는 친우회(Society of Friends)라고도 불렸다. 퀘이커 교도들은 국에서 박해를 받아 종 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많은 수가 이주하으며, 이들 중 윌리암 펜(William Penn)이 그의 아버지가 국 국왕 찰스 2세에게 빌려준 돈 신 불하받은 미국 식민지의 토에 펜실베니아주 를 건설하여 많은 퀘이커 교도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찾았다. 이동 ↑ (Driscoll, 2005: 9-10; Seyfried, 2001; Seyfried and Asadorian, 1991; Anots, 2009).

해당 문제는 문서 복구로 해결되었고, 다른 사용자들과의 소통의 편의를 위해 해당 글을 접어드렸습니다. :) --이강철 (토론) 2017년 12월 6일 (수) 22:35 (KST)[답변]


의견[편집]

해당 내용을 읽어보니 이는 플러싱 코리아타운이라기보다는 플러싱 (퀸스)의 내용이네요. 하이퍼링크 타고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위키백과 문서가 매우 처참한 수준입니다;; 해당 내용은 플러싱 (퀸스)에 복붙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해도 되겠지만, 정작 저작권자는 님이신데 제가 그 기여를 훔쳐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서요;;; 아울러 쓰신 내용에 출처도, 참고 문헌도 매우 빈약하게 기입되어 있습니다. 이런 경우 높은 확률로 백:독자 연구라 의심받으실 수 있습니다. 제가 보건대 플러싱 코리아타운에 대해서도 약간의 관리 차원에서의 오해가 있었던 듯합니다. 백:신뢰할 수 있는 출처에 입각한 출처들만 잘 달아놓으신다면 별 탈 없이 문서를 유지할 수 있으실테니 양질의 기여를 많이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도움이나 안내가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사토:일단술먹고합시다를 방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일단술먹고합시다 (토론) 2017년 11월 26일 (일) 06:46 (KST)[답변]

다 비우시지 말고 코리아타운에 대한 내용만 남겨놓으면 좋을 것 같네요. -- jangg8962·User Talk·Contribution 2017년 11월 26일 (일) 22:33 (KST)[답변]
뉴욕 플러싱에 미국 동부지역 최대의 코리아타운이 자리잡고 있다. 1965년도 이민법 개정으로 아시아 국가들에도 미국 이민 문호가 개방되면서, 한인을 비롯하여 중국인, 인도인 등 아시아인들이 물밀듯 플러싱 지역으로 들어와 플러싱의 성장을 부추겼다. 그리하여 1970년 이후에는 7번 지하철 노선 주위지역이 한국인, 중국인, 인도인 등 많은 아시아인들의 집중 거주지역이 되면서 7번 지하철을 이용하는 아시아인들이 증가하자, 뉴욕시민들은 7번 지하철을 ‘오리엔탈 익스프레스(Oriental Express)’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부분만 코리아타운에 대한 내용 같네요.. -- jangg8962·User Talk·Contribution 2017년 11월 26일 (일) 22:34 (KST)[답변]

문서 이동에 대해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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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어 변경 제안[편집]

코리아타운 (롱아일랜드) 이라는 표현은 유럽어권 의 표현 방식입니다. 롱아일랜드 코리아타운이라는 표현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이강철 (토론)

제가 일단을 그렇게 문서 이동하면서 임시로 바꿔놓았습니다. -- jangg8962·User Talk·Contribution 2017년 11월 26일 (일) 23:59 (KST)[답변]

일단 대충 이동은 해봤습니다.[편집]

롱아일랜드 코리아타운플러싱 (퀸스) (<-저 문서가 삭제된 후 이름 변경 예정, 지금 문서의 이름은 플러싱 (퀸즈))랑 서로 이동했습니다. -- jangg8962·User Talk·Contribution 2017년 11월 26일 (일) 23:58 (KST)[답변]

지리학 반스타[편집]

지리학 반스타
퀸즈 플러싱 지역과 그 곳의 코리아타운에 대해 지식을 넓혀주신 Dwjoo님에게 이 반스타를 드립니다. --이강철 (토론) 2017년 12월 6일 (수) 22:33 (KST)[답변]

한국어 위키백과는 좋은 기여를 한 사용자에게 반스타를 주는 하나의 전통이 있습니다. 서로 칭찬을 통해, 응원을 하는 의미입니다.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사용자들은 언어적 장벽도 있기 때문에 미국 지역에서 사용되는 문헌들이나 해당 지역의 지식을 접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한 새로운 분야에 대해 개척자로써 나서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위키백과에서 편집해 나가시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으시다면, 이 아래나 사용자토론:이강철에 의견을 남겨주시면, 제가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도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강철 (토론) 2017년 12월 6일 (수) 22:33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