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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견: 3년 전 (Chos55님) - 주제: 동해문화예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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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응천[편집]

광운대학교 초대 학장을 역임한 물리학자 조 응 천 장로 [[제1306호] 2012년 1월 21일] 후학양성에 나라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생각으로 헌신한 일생조응천(曺應天, 1895-1979) 장로는 1895년 5월 13일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에서 아버지 조용열(曺用悅)과 어머니 이용선(李用善)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반석면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구역으로서 반석교회에 출석했던 그의 할아버지 조준승(曺駿承)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기독교 문화를 접하게 된다. 반석초등학교를 졸업한 조응천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평양에 있는 미션학교인 숭실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과학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던 조응천은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숭실대학 이과에 진학했다. 그는 주일이면 서문밖장로교회에 출석을 하면서 주일학교 교사와 찬양대로 활동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1916년 평양숭실대학 이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조응천은 졸업과 동시에 자신의 모교인 숭실중학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다가 미국 유학의 꿈을 갖고 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다행히 숭실대학의 학장인 배위량 선교사의 적극적인 협조로 미국 인디애나 주에 있는 트라이스테이트대학 토목과에 진학을 할 수 있었다.

이 대학에서 학부 과정을 마친 조응천은 다시 인디애나주에 있는 퍼듀대학 문리학부 물리학과에 진학하여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물리학을 전공했던 조응천은 학문을 하면 할수록 새로운 세계를 접하면서 하나님의 오묘한 창조의 섭리를 깨닫게 되었다. 이어 인디애나 주립대학 대학원에 진학을 하여 1928년에 이 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일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학위논문은 ‘3극 진공관의 출력조건’이었다. 학위를 받았던 조응천 박사는 곧 귀국하려고 하였지만 그 대학에서 연구를 더 해야 한다는 지도교수의 권유를 받고 얼마동안 더 연구를 하다가 1931년에 귀국을 하게 되었다.

당시 일제는 조응천을 미국에서 유학하고 온 인재라 하여 일본의 여러 기관에서 그를 초청 하였지만 다 거절하고 조만식 장로의 권유로 YMCA에서 조선 청소년들을 모아 놓고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된다. 한편 ‘농민생활’이라는 월간 잡지를 발행하여 전국 농민들에게 유익한 소식과 함께 자료를 제공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해방을 맞이하여 조응천 박사의 활약은 돋보이게 달라졌다. 미국이 남한에 미군정을 실시하자 미 군정청 초대 통신국장으로 발탁되어 크게 활약을 하였다. 미 군정청은 그의 영어 실력에 감동을 받아 또 그의 성실성에 놀라워 했다. 그는 그곳에서 많은 활동을 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미 군정청이 끝나자 미군은 모두 귀국을 하게 되었으며, 1948년 5월 10일 총선을 실시하고 8월 15일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박사가 취임을 하면서 조응천 박사에게는 새로운 일거리가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해 10월에 조선 경비대가 국군으로 발전하면서 육군 소령으로 특채가 되어 국군 창설에 큰 공을 세우기로 하였고 그 후 그의 실력을 인정했던 국방부에서는 국군의 통신체제를 바로 세우기도 하였으며, 조응천 박사는 육군통신학교 교장, 통신감을 역임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용산 육군사령부에서 가까운 남영동교회에 출석을 하면서 기독교 가정의 전통을 이어갔다.

모든 군인들이 부러워하는 별 2개를 달고 육군 소장으로 활약을 하였으며, 예편을 하면서 민간인으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성실성을 보고 참 인재라 생각한 정부에서는 체신부 차관으로 그를 발령했고고 다시 국가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늘 조응천 박사는 후학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기도하였는데 동국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다가 광운전자공과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후 초대 학장을 역임하면서 그의 실력은 학계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의 노력으로 오늘의 광운대학교가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 자리를 잡고 종합대학교로 발전을 하면서 전자계통의 많은 인재를 양성하게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한국전자공학회 회장을 비롯해서 서울 FM 방송회장, 한국전기협회 이사, 대한전파학회 명예회장, 한국전파학원 명예원장, 한국 아마추어무선연맹 고문, 한국의 전자, 전기, 통신부분의 각종 부분에서 크게 활동하여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숭실학원 이사, 상록회 회장 등을 역임 하였다.

조응천 박사는 한국학 단체에서의 활동 못지않게 그의 저서 활동도 대단하였다. <백만인의 전기학>을 비롯해서 <학생들의 라디오원리>, <기초무선공학> 등 수많은 저서를 세상에 발표 하였다.

이미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였지만 그가 출석했던 서울 남영동교회에서 1967년 장로로 장립을 받고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의 부인 정혜수는 그 교회의 권사로 장남 조현명(曺顯明)은 서울 충현교회 장로로, 장녀(顯實, 부군은 김인성), 차녀(顯玉, 부군은 趙錫周/안과의사) 등 모두 아버지의 신앙을 이어받고 열심히 생활을 하고 있다.


김수진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 원장>

동해문화예술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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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홍보가 아니고 정확한 fact이니 참고해주세요 Chos55 (토론) 2021년 4월 22일 (목) 19:54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