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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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호
대한민국등록문화재
지정번호 등록문화재 제411호
소재지 충청북도 청원군 공군사관학교
제작시기 1953년 10월
비고 2008년 10월 1일 지정
부활(復活)
Aircraft Buwhal.JPG
서울 에어쇼에서 전시중인 개량복원 부활호
종류 연락기, 정찰기, 훈련기
제조사 대한민국 공군 (1953/2004년형)
수성기체산업 (2011년형)
첫 비행 1953년 10월 11일 (1953년형)
2011년 6월 13일 (2011년형)
도입 시기 1953년
퇴역 시기 대한민국 공군:1955년
현황 1953/2004년형: 1대 (공군사관학교 박물관 전시 중)
2011년형: 2대 (사천시 보유 중)
주요 사용자 대한민국 대한민국 공군, 경상남도 사천시
생산 시기 1953년, 2011년
생산 대수 1대 (1953년형)
2대 (2011년형)
사업 비용 10억 원 (2011년형)
웹사이트 http://www.afa.ac.kr/museum/buhwal.html
비고 수상기로 개조 가능

부활(復活)은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개발한 군용기로서 한국 전쟁 중인 1953년 6월에 대한민국 공군의 주도로 개발이 시작되어 그 해 10월에 시험 비행을 성공하였다. 부활이라는 이름은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으로 무너진 대한민국을 부활시켜라”라는 의미로 하사한 것이다. 연락, 정찰, 심리전 등의 다목적 항공기로 개발된 부활호는 제작 이후 연락, 초등훈련 등의 임무에 사용되었다가 1960년대 이후 돌연 자취를 감추었으나 부활호 개발의 중심이었던 이원복 씨의 수소문 끝에 2004년 1월 대구 경상공업고등학교에서 뼈대만 남은 원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발견 이후에 대한민국 공군의 주도로 복원작업이 이루어져 2004년 10월 에 복원이 완료되었다. 2008년 10월에는 등록문화재 411호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경상테크노파크의 주도로 개량복원사업이 시작되어 2011년 6월에 2기가 제작되어 시험비행을 완료하였다.

개발[편집]

아직 한국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3년 6월 공군기술학교 교장 김성태 대령은 항공기 설계·제작 실습 및 훈련기로 사용할 수 있는 2인승 비행기의 제작을 지시한다. 이 임무를 위해 서울대학교 항공공학과를 처음으로 졸업한 공군기술학교 정비교육대 정비과장 이원복 소령 및 공군기술학교 교관들을 중심으로 한 26명의 전담조가 구성되으며 추가로 서울대학교 항공공학과 학생[1]들이 참여하게 된다. 항공기 개발은 1953년 6월 28일부터 시작되었다. 공군사천기지의 자재창고에서 설계도 제작이 이루어졌으며 아무런 산업 기반이 없었던 상태에서 여기저기에서 재료를 끌어모으고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없는 자재는 미군기지에서 얻어오는 식으로 제작하였다.[2] 제작 마지막 사흘 간은 한숨도 자지 않고 제작에 매진한 결과 휴전 이후 4개월만인 1953년 10월 10일에 완성하게 된다.

완성된 부활호는 꼬리바퀴식(tail-dragger) 항공기였는데 특이한 점은 꼬리바퀴를 하나씩 가지고 있는 보통의 꼬리바퀴식 항공기와는 달리 꼬리바퀴가 2개라는 점이다. 꼬리바퀴는 상당히 낮은 부분에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지상에서 기수의 높이를 낮춰서 지상활주시 전방시야를 좋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반도라는 대한민국의 지리적 특성상 수상기로서도 사용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 주 바퀴다리의 바퀴를 떼어내고 부주(float)를 설치할 수 있었다. 이때 2개의 꼬리바퀴는 2개의 부주를 고정시키기 위한 하드포인트로 사용된다. 또한 한국 전쟁 당시 지리산에서 활동하던 빨치산 세력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전단지를 살포하고 사진촬영을 하게끔 하기 위해서 동체 뒤쪽에 투하창이 설치되었다. 엔진은 출력 85마력인 컨티넨탈(Continental) O-190-1이 사용되었다.

부활호의 초도비행은 제작이 완료된 바로 다음날인 1953년 10월 11일에 이루어졌다. 비행교육대장 민영락 소령이 조종하고 이원복 소령이 후방석에 동승하여 오전 10시경에 비행을 시작하였다. 이때 부활호는 2시간 동안 고도 1300m까지 비행했다. 이후 공군본부의 지시로 부활호는 대구 동명비행장으로 공수되어 김신 작전국장이 시승하기도 하였다.

1954년 4월 3일에는 공군김해기지에서 부활호의 명명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때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대한민국의 부활”이라는 뜻에서 復活이라는 휘호를 친필로 하사하였다. 명명식 외에도 부활호를 만든 공로자들에게 표창장이 수여되었으며 사병들에게는 화랑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또한 시험비행 재현도 이루어졌다. 기체번호는 1호기가 아닌 1007호기로 붙여졌는데, 이는 1950년 9월 1일 다부동 전투 당시 대한민국 공군 최초로 적기에게 피격되어 전사한 조종사 천봉식 중위의 성인 ‘천’과 발음이 같은 숫자 1,000에, 국운 융성을 바라는 행운의 숫자 7을 더한 것이다. 명명식에는 부통령 함태영 (이승만 대통령 대리), 국방부장관 손원일, 공군참모총장 최용덕 중장 등 각군의 인사가 참석하였다.[3]

실종 및 발굴[편집]

부활호는 단 1대만이 만들어졌으며 1960년까지 대한민국 공군에서 연락 및 초등훈련 임무에 사용되었다. 1960년에는 공군김해기지에서 폐기처분하려던 것을 당시 대구에 있던 한국항공대학교[4]에 기증하였다.[5] 한국항공대학교는 1963년 한국항공초급대학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66년 2월 28일에 폐교되었다. 그리고 1967년 3월 2일에 같은 자리에 경상공업고등학교가 개교하게 되면서,[6] 부활호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창고에 보관된 채 잊힌다. 한편 부활호 제작을 총지휘했던 이원복 소령은 이를 전혀 모른 채 1955년 3월까지 미 공군기술학교에서 1년간 정비관리 교육을 이수하였는데 귀국한 직후 부활호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수소문하였으나 찾지 못했다. 이후 그는 1966년 6월 대령으로 예편하고 1969년 2월에 대한항공 관리이사에 추임되었으며, 1989년부터는 미국 실험항공기협회의 한국 지회장을 맡는 등 대한민국 항공분야의 역군이 된다. 그러던 중 그는 1999년에 주한 미군 군사고문단이 부활호를 시험평가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져갔으며 미국의 항공기 개발사인 세스나사에서 부활호를 인수하여 O-2의 설계에 참고자료로 활용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세스나 사에 알아보았으나 실패한다. 같은 해에 대한민국 공군에서 남아있는 사진과 제원을 토대로 부활호를 실물과 비슷하게 복원하여 3월 25일에 공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전시하였다.[7]

이원복은 결국 2003년 12월 17일자 중앙일보에 사라진 부활호를 찾는다는 기사를 내보내기에 이른다. 다행히 경상공업고등학교에서 서무과장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이방치라는 사람으로부터 경상공업고등학교 창고에 비행기가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제보받고 마침내 2004년 1월 13일 부활호 제작 당시 판금작업을 맡았던 문용호와 함께 경상공업고등학교 제도실 건물 지하창고에서 부활호를 찾아낸다. 발견 당시 부활호는 외피가 거의 없는 채 뼈대만 남아 있었으며 날개, 엔진, 프로펠러 등 주요 부품이 모두 사라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카울링(Cowling)의 친필 휘호가 반쯤 벗겨진 채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부활호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2층 창고에서 프로펠러도 발견되었다.

부활호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2004년 1월 15일자 중앙일보에 실림으로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공군 내부에서 부활호의 회수 및 복원에 대한 검토와 계획이 이루어지게 된다. 발견된 부활호의 동체는 재사용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되었으며 날개와 착륙장치는 다시 만들기로 하였다. 제작은 이미 공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전시 중인 모형을 만든 제81항공정비창 소속의 정비사들로 이루어진 복원전담팀이 맡게 되었다. 이 전담팀의 인원은 부활호 최초 제작 인원과 동일한 27명으로 구성되었다. 2004년 6월 9일에는 이원복과 문용호가 참석한 가운데 81창 소속 정비사들에 의해 부활호를 지하창고에서 꺼내었다. 이때 부활호가 손상되지 않게끔 작업은 중장비를 사용하지 않고 인력으로만 진행하였다.

복원[편집]

복원작업은 81창으로 옮겨진 직후 시작되었다. 동체 옆면에 쓰인 휘호가 지워질 것을 염려해서 미리 글자의 모양을 떠 둔 뒤 뼈대의 녹을 제거하고 비파괴검사를 수행하였다. 설계도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 치수는 남아있는 기골에 의존해 역설계하였다. 이 때 이원복과 문용호의 도움을 받아 200장이 넘는 설계도가 완성되었다. 각 부품은 제작하기 전에 종이로 모형을 만들어 실험, 검증하였으며 기체를 제작할 때는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전통적인 수작업 방식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친필 휘호와 기체번호는 컴퓨터를 사용하여 자료사진과 비교하여 훼손된 글자의 원형을 살려냈다. 또한 50년전의 그것과 같은 부품을 찾기 위해 미국의 항공기 제조사와 중고품 시장을 뒤졌으며, 엔진을 찾기 위해 수소문한 끝에 비슷한 사양의 엔진을 가진 서동화로부터 7월에 엔진을 기증받았다. 부활호의 복원은 9월 30일에 완료되었다. 이때 1대의 목업(mock-up)기체가 같이 만들어졌으며 이는 2005년 5월 8일 경상공업고등학교에 기증되었다.[8]

부활호의 복원기념행사는 부활호가 초도비행을 한 날짜인 10월 11일에 거행하려 했으나 2004년 10월 22일이 되서야 복원기념행사를 할 수 있게 된다. 복원기념식은 제81항공정비창 주기장에서 열렸는데 이날 부활호는 비행하지 않았고 대신 KT-1과 나란히 지상활주를 하였다.[9] 이는 대한민국 최초의 항공기와 대한민국 최초의 양산형 항공기가 함께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날 행사에는 이원복, 민영락, 이승만 전 대통령의 아들 이인수, 그리고 제81항공정비창의 전 장병 및 군무원이 참석하였으나 부활호 제작과 복원의 또다른 주역인 문용호는 2004년 9월 3일 78세를 일기로 타계하였으므로 참석하지 못하였다.[10]

이후 대한민국 공군에서 문화재 등록 신청을 하여 2008년 10월 1일에 등록문화재 411호로 지정되었다. 2008년 10월 23일에는 이를 기념하여 설계자 이원복의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흉상은 경상남도 사천시 소재의 항공우주박물관 옥외전시장에 설치되어 있다.

개량복원[편집]

2008년 10월 16일 경상남도사천시가 부활호 2대를 복원하여 한 대는 박물관에 보관하고 다른 한 대는 사천항공우주엑스포에서 축하비행을 하는 등의 실제 비행임무를 수행하게 할 것이라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번 복원계획은 단순한 복원이 아닌 개량복원으로, 2004년 공군이 복원한 기체의 형상은 유지하되 처음부터 모든 설계과정을 전자화하여 영구보존하면서 최신의 설계 및 제작 기술로 성능이 한층 향상된 기체를 만드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는 또한 경상남도의 항공산업 인프라를 이용한 고유 소형항공기 개발을 촉진하고 궁극적으로는 중형 민간항공기의 최종 조립공장을 설치하여 사천시를 동북아시아 항공산업의 중심지로 성장시키고 대한민국을 항공산업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개량복원 사업은 2009년 4월부터 시작되었는데, 경상남도와 사천시가 각각 5억 원으로 총 10억 원을 투자하고 경남테크노파크가 주관하며 사업 총괄관리, 개념설계, 기본설계 및 성능해석은 경상대학교가, 부품제작, 시험평가, 조립 및 비행시험은 수성기체산업이 맡았다. 또한, 당시 복원작업에 참여했던 제81항공정비창 소속 정비사들의 지원을 받기로 하였으며 이원복 등 항공 관련 전문가 7명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하였다. 2009년 7월 6일에는 원활한 복원을 위해 2004년 복원을 추진한 대한민국 공군으로부터 설계도면을 받았는데, 이를 활용하여 설계 및 제작 시간을 단축하고 개발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또한, 공력해석, 비행성능 해석, 안정성 해석, 축소모형기 비행실험, 구조해석 등을 수행하였으며 이는 부활호 설계에 반영되었다. 기체 설계가 끝난 뒤에는 조종, 계기, 연료, 각 계통에 대한 설계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2010년 4월 10일에는 경상대학교에서 부활호 개량복원사업 중간보고회가 열렸다. 이날 중간보고회에서는 부활호 제작과정에 관한 보고와 일부 사양에 관한 공개가 이루어졌으며 경상남도의 항공산업 육성계획에 대한 발표도 이루어졌다. 중간보고회 이후 상세설계를 마무리하고 엔진추력시험, 부품 가공 및 조립을 마치게 된다.

2011년 3월에는 부활호의 개량복원작업이 마무리되었으며 이에 따라 2011년 3월 16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가연리 소재 수성기체산업 함안공장에서 출고식이 이루어졌다. 이날 출고식에는 이원복과 이인수가 참여하였다. 2011년 6월 13일에는 제3훈련비행단에서 개량복원 부활호의 초도비행이 이루어졌으며 이후 2011년 6월 15일부터 고속지상활주시험과 함께 총 4회에 거친 비행시험이 이루어졌다. 2011년 7월 14일에는 제3훈련비행단에서 부활호의 개량복원 기념식 및 축하비행이 이루어졌다. 이날 기념식에는 김두관 경상남도지사를 비롯하여 사천시, 공군, 경남테크노파크 등 관계자와 관계기관, 항공 관련 기업체 대표 등 300여 명이 참석하였으며 축하비행 때에는 KT-1 2대와 같이 비행하였다. 축하비행 조종은 배영호 예비역 공군 중령이 맡았다.

기존 부활호에 비해 달라진 점[편집]

  • 구조 면에서 일부 구성요소가 추가, 삭제 및 수정되었으며 정확한 치수가 없는 부분의 치수가 확정되었다.
  • 꼬리날개, 날개 끝, 동체 외피를 복합재로 만들었으며 주날개 외피는 알루미늄을 사용하였다.
  • 엔진은 기존보다 더 강력한 100마력의 ROTAX 912ULS2를 채택하였으며 프로펠러는 조정식 2A0R5R70EN 으로 채택되었다.
  • 전자식 계기, 항공기용 낙하산(Ballistic Recovery Systems)[11], 블랙박스를 장착하였다.
  • 그 외 여러 부분에서 수정 및 추가가 이루어졌다.

전시장소 및 행사[편집]

미디어에서의 등장[편집]

2011년 6월 23일 개봉한 연필로 명상하기의 장편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에 부활호가 등장한다. 작중에서는 김철수의 삼촌이 어떤 고등학교 창고에서 발견하여 비행할 수 있게끔 수리하는 것으로 나온다.

제원[편집]

1953년형(최초제작기)/2004년형(복원기)[편집]

  • 형식: 고익 단엽 지주식 프로펠러 단발기
  • 동체 형식: 크롬 몰리브덴 강관용접 트러스 구조 및 천 피복 동체
  • 승무원: 2명 (종렬 복좌식 우측 출입문 동체)
  • 전장: 6.6 m
  • 전폭: 12.7 m
  • 전고: 3.05 m
  • 익형: NACA 4412
  • 플랩 종류: 슬롯 플랩(1953년형), 단순 플랩(2004년형)
  • 공허중량: 380 kg
  • 전비중량: 580 kg
  • 최대이륙중량: 600 kg
냉각방식: 공랭식
실린더 수: 4기통
연료: 옥탄가 80~85 항공휘발유 (12 gal)
출력: 85 hp (이륙시)
회전수: 2,575 RPM (이륙시)
2,400 RPM (순항시)
프로펠러: Sensenich W72GK (고정 피치)
  • 최대속도: 180 km/h (해면고도)
  • 순항속도: 145 km/h
  • 실속속도: 78 km/h
67.2 km/h (플랩 전개시)
  • 상승한도: 4,900 m
  • 외부 장착물: 부주(바퀴다리를 떼어내고 장착)
  • 기타: 동체 하부에 투하창 설치

2011년형(개량복원기)[편집]

  • 형식: 고익 단엽 지주식 프로펠러 단발기
  • 승무원: 2명
  • 전장: 6.6 m
  • 전폭: 12.7 m
  • 전고: 3.05 m
  • 익형: NACA4412
  • 익면적: 16.90 m²
  • 플랩 종류: 단일 슬롯 플랩(single slotted flap)
  • 공허중량: 495.0 kg
  • 최대이륙중량: 692.7 kg
냉각방식: 공랭식
실린더 수: 4기통
연료: EN 228 (16 gal)
출력: 100 hp
프로펠러: Sensenich 2A0R5R70EN (조정 피치)
  • 최대속도: 250 km/h
  • 순항속도: 167 km/h
  • 상승한도: 15,000 ft (4572 m)
  • 외부 장착물: 부주(바퀴다리를 떼어내고 장착)
  • 기타: 항공기용 낙하산 장착

참조[편집]

  1. 이원복 소령이 당시 부산에 있었던 전시연합대학에서 수학하던 서울대학교 항공공학과 학생들에게 1년에 1주일 휴가를 내어 1주일 동안 항공기 구조와 설계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였다. 이원복 소령은 여름방학 기간 동안 학생들을 부활호 제작이 이루어지던 공군사천기지로 데려와 합숙을 시키며 실습을 시켰다.
  2. 주요구성품인 엔진,프로펠러, 착륙장치 및 계기 등은 기존 L-16 연락기의 것을 사용하되, 동체와 날개 등 기체 구성품은 스스로 설계 및 제작하였다.
  3. 〈우리 손으로 비행기제작 함―부통령 각하 맞아 명명식 거행〉“지난 4월 3일 김해 공군기술학교에서는 한국 최초의 국산 비행기에 대한 역사적인 명명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중략) 공군기술 연마를 주안으로 하였으나 초급 연습기의 국산화 가능을 입증하고 우리나라 항공과학 발전을 촉진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으며 삼인승 8백리의 항속거리와 최고 백이십리의 우수한 성능을 가졌으며 사십오 일이라는 단시일 내에 완성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동기 제작은 기술학교의 이원복 소령이 설계하였으며 동교 정비과 사병들의 협력으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 〈공군위클리〉, 공군본부, 1954. 4.
  4. 이 학교는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지금의 한국항공대학교와는 전혀 다른 학교이다.
  5. http://prsinmun.co.kr/view.html?no=21989
  6. http://www.kyeongsang-th.hs.kr/user/schoolHistory.do?year=1960&menuCd=MCD_000000000000045816
  7. http://www.afa.ac.kr/museum/history.html
  8. http://blog.daum.net/jyj203/1262
  9. 복원된 부활호는 비행가능한 상태로 복원되었으나 복원기념식에서는 안전상의 이유로 지상활주만 선보였다.
  10. 복원행사가 열리기 전날인 2004년 10월 21일에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1. BRS Aerospace 사에서 만든 낙하산으로 비행중 위급상황이 발생할 시 작동시키면 로켓 모터와 연결된 낙하산이 동체 윗부분을 통해 빠져나와서 펼쳐지게 되어 있다. 그 뒤 낙하산에 의해 항공기 전체가 안전하게 지상에 착지할 수 있게 된다.

참고 문헌[편집]

권주혁(2010), 〈한국공군과 한국전쟁〉, 퓨어웨이 픽쳐스, 256p~263p
이윤식(2012), 〈신화의 시간〉, 비씨스쿨, 324p~329p
경남테크노파크, 경상대학교, 수성기체산업(2011),〈부활호 개량복원제작보고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93&aid=0000008005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0/04/19/20100419003642.htm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1&aid=000231755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277082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5163598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