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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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정(白頤正, 1247년~1323년[1])은 고려의 후기의 문신, 성리학자이다. 자는 약헌(若軒), 호는 이재(彛齋). 본관은 남포이다.[2] 시호는 문헌(文憲). 상당군(上黨君)[3]에 봉해졌다. 중국에 가서 주자성리학을 배워온 뒤, 안향과 함께 고려성리학을 보급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생애[편집]

신라 간관(諫官) 백중학(白仲鶴)의 후손이다.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를 지낸 백문절(白文節)의 아들이다. 안향의 문인으로 이진(李瑱), 권부(權溥), 우탁(禹倬), 이조년(李兆年), 신천(辛蕆)과 더불어 안향 문하의 6군자로 불렸다.

1284년(충렬왕 10) 권단(權㫜)이 지공거였던 갑신방(甲申榜)에서 채홍철(蔡洪哲) 등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였다. 1298년(충렬왕 24), 안향, 권준[4]과 함께 8개월만에 퇴위한 충선왕을 호종하여 연경(북경)에 갔다. 안향은 다음 해에 먼저 돌아왔고, 권준(權準)은 주자사서집주(朱子四書集註)를 들여왔다. 백이정은 10년간 연경에 머무르면서 정주(程朱)[5]성리학을 연구하고 1308년(충렬왕 복위 10) 충선왕과 함께 정주의 유저(遺著) 등 많은 서적과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가지고 돌아왔다.[6][7]

이후 이제현박충좌 등을 가르치며 성리학을 보급하였고, 도학과 예학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충선왕 때 도감사(都監事)가 되었으며, 1314년(충숙왕 원년) 첨의평리(僉議評理)[8]로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를 겸했다. 후에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1323년(충숙왕 10) 77세로 졸(卒)했다.[9]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사후[편집]

  • 백이정의 묘는 그의 관향인 남포 양각산(羊角山,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평리(忠淸南道 保寧市 熊川邑 坪里)에 있으며, 그 곳의 신안사(新安祠)에 배향되었다. 한편, 귀양지였다는 남해(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평산리 (慶尙南道 南海郡 平山里)의 망기산(望崎山) 우지막골에도 그의 묘라 구전하는 전백이정묘(傳白頤正墓)[10]가 있는데, 그 곳 이동면 난음리(二東面 蘭陰里)의 난곡사(蘭谷祠)[11]에서도 백이정을 제향하고 있다. 난음리(옛 난포현(蘭浦縣))의 난화산(蘭花山)에는 백이정의 묘라는 곳이 한 군데 더 있다. 백이정의 묘라는 세 곳의 진위를 두고 논란이 있다.

평가와 영향[편집]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들여온 것은 안향이지만,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그 체계를 정리해 일가를 이룬 이는 백이정이라고 할 수 있다.[12]

안향과 백이정의 학문은 이제현이곡에게 전승되었고, 이제현이곡은 또한 수많은 문하생들을 길러냈는데, 이제현이색에게, 이색권근, 정몽주변계량에게 학문을 전하였다. 이들의 학풍은 고려 말기의 신흥사대부와 역성혁명파, 온건개혁파, 그리고 조선시대의 사림파로 이어지는 학문적 계보를 형성했다. 이렇게 이어지는 학문과 사상적 계보는 후일 조선시대의 지배계층으로 정착된다.[13]

백이정은 이제현, 박충좌 외에도 이곡, 이인복, 백문보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가족관계[편집]

  • 부 : 백문절(白文節, 1208년 ~ 1282년) 국학대사성(國學大司成)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 모 : 성주 이씨(星州李氏), 참봉 이세주(李世柱)의 딸
    • 부인 : 구 안동 김씨(舊 安東金氏) 중대광(重大匡) (上洛君) 김순(金恂 1258년 ~ 1321년)의 2녀
      • 아들 : 백세렴(白世廉)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
      • 자부 : 상주 김씨(尙州金氏) 고사(庫使) 김인통(金仁通)의 딸
        • 손자 : 함정(咸正)
        • 손자 : 함명(咸明, 1299년 ~ ? )
      • 딸 : 남포 백씨(藍浦 白氏)
      • 사위 : 이달존(李達尊, 1313년 ~ 1340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경주(慶州) 이제현(李齊賢)의 2남
    • 동생 : 백효주(白孝珠) 대호군(大護軍)
    • 제수 : 평양 조씨(平壤趙氏)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양군(平壤君) 조인규(趙仁規, 1237년 ~ 1308년)의 3녀

기타[편집]

백이정은 제자인 이제현과 사돈을 맺고 늦둥이 딸을 이제현의 아들 이달존(李達尊)에게 시집보내었으니 사제지간이자 사돈지간이 되었다.[14]

작품[편집]

  • 연거시(燕居詩)[15]
  • 영당요(詠唐堯)[16]
  • 한벽루(寒碧樓)[17]
  • 여홍애집구(與洪厓集句)[18]

관련 항목[편집]

각주[편집]

  1. 백이정의 생몰년을 1260년~1340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백이정이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의 삼대에 걸쳐 격동기에 벼슬을 하였고, 1339년(충숙왕 복위8) 충숙왕이 실각하면서 경남 남해의 난포현으로 귀양길에 올라 남해에서의 은둔생활 중 1340년(충혜왕 복위원년) 생을 마감하여 남해에 체백(體魄)을 묻었다고 보는 것이다.
  2. 백이정 - 한국학중앙연구원
  3.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졌다고도 한다.
  4. 안향 문하 6군자의 한 사람인 국재(菊齋) 권부(權溥)의 아들이다.
  5.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兄弟)와 주희(朱熹)를 일컫는다.
  6. "어릴 때에도 아버지 백문절을 따라 연경에 가서 머무른 적이 있었다"(白頤正從其父文節在燕京)는 기록이 있다, 야은집(冶隱集)
  7. 1316년(충숙왕 3), 1319년(충숙왕 6), 1322년(충숙왕 9) 세 차례의 원행(元行)이 더 있었다고 한다.
  8. 종2품으로 옛 참지정사(參知政事)다.
  9. 몰년이 1340년이라는 견해가 있다.
  10. 경상남도 기념물 155호
  11.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237호
  12. "백이정이 첨의평리가 되었을 때 중국에는 정주학이 행해지기 시작했지만 동방에는 미치지 않아 백이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이를 얻고 배워서 동방으로 돌아왔다"(白頤正爲僉議評理 時程朱之學 始行中國 未及東方 頤正在元 得而學之 東還)고 하는 이론도 있다.
  1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이정',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57164&cid=46649&categoryId=46649"
  14. 백씨대동보, 1982
  15. 연거시(燕居詩) "矮屋蕭條十肘​​餘 焚香​靜讀聖人書, 自從人爵生天爵 情欲秋林日漸疎. 초라하고 쓸쓸한 집에 열 팔꿈치 품이라 / 향 사르고 조용히 성현의 글을 읽는다// 사람의 벼슬은 하늘이 내는 것/ 정욕은 가을 숲에 해 저무는 듯 하네//"
  16. 영당요(詠唐堯)
  17. 한벽루(寒碧樓)
  18. 여홍애집구(與洪厓集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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