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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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훈(白永勳, 1930년 7월 20일, 전북 김제 ~ )은 1961년 박정희 정부의 차관 교섭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서 서독의 경제부 노동국장을 만나 5000명의 광부들과 2000명의 간호조무사들을 서독에 파견하는 조건으로 30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받는 협상을 했다.[1]

《한강에 흐르는 라인강의 기적》 등 다수의 저서가 있고, 국민훈장 모란장을 비롯하여 많은 상훈을 수여받았다.

학력[편집]

  •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졸업
  •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대학원 졸업 (경제학 석사)
  • 독일 에르랑겐 대학 대학원 졸업 (경제학 박사)

약력[편집]

  • 중앙대학교 상과대학 교수
  • 경제개발계획자문위원회 위원
  • 재단법인 한국산업개발연구소 설립 및 소장
  •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위원
  • 중앙대학교 재단이사
  • 지역균형발전기획단 자문위원
  • 중소기업정책위원회 위원장
  • 재단법인 한국방위산업학회 회장
  • 재단법인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
  • 한국질서경제학회 회장
  • 1976년 ~ 1979년 : 제9대 국회의원 (유신정우회)
  • 1979년 ~ 1980년 : 제10대 국회의원 (유신정우회)

참고자료[편집]

각주[편집]

  1. 오창규 (2006년 12월 12일). “이미륵과 에르하르트, 그리고 곤노”. 문화일보. 1961년 한국의 한 젊은이가 에르하르트 경제장관과의 면담을 주선해달라며 대학 때 은사인 에를랑겐대 프리츠 포크트 교수를 찾아 1주일째 애원하고 있었다. 덕분에 장관 대신 차관과의 면담이 이뤄졌다. 그리고 3000만 달러 차관을 내락 받는다. 그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독일어 통역관이자 1차 경제발전 5개년계획을 입안한 백영훈 교수다. 그러나 지급보증 없이는 곤란하다는 소리에 또 한번 좌절을 맛본다. 대표단을 서울로 보내고 혼자 남은 그는 20여일을 눈물로 보낸다. 그때 노동부 공무원인 독일 친구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주었다. “너희 나라에는 실업자가 많지?” “그렇다.” 그는 다음날 노동부 국장 한명을 데리고 와 서류를 내밀었다. 차관 담보안인 광부 5000명과 간호조무사 2000명의 파견서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