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요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Picto infobox samourai.png
도쿠가와 이에요시
徳川家慶
도쿠가와 이에요시
도쿠가와 이에요시
제12대 쇼군
시대 에도 시대 후기 ~ 막말
출생 1793년 6월 22일
에도 성
사망 1853년 7월 27일
개명 아명: 도시지로(敏次郎)
시호 慎徳院
계명 慎徳院殿天蓮社順譽道仁大居士
관위 정이대장군 정1위 태정대신
막부 에도 막부 제12대 정이대장군
부모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나리, 어머니: 고린인
아내 정실: 다카코 여왕
자녀 이에사다, 요시마사

도쿠가와 이에요시(일본어: 徳川家慶, 1793년 음력 5월 14일 - 1853년 음력 6월 22일)는 일본 에도 막부의 12대 쇼군이다.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둘째 아들이다.

생애[편집]

1773년 11월 18일 제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차남으로 에도 성에서 태어났다. 맏형인 다케치요(竹千代)가 요절했기 때문에 장군 후계자가 되어 1837년(덴포 8년)에 45세에 장군직을 물려받았지만, 이에나리가 중진으로 강력한 발언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1841년, 이에나리의 사후 이에요시는 넷째 아들 이에사다를 장군 후계자로 정했다. 또한 노중 수좌로 미즈노 다다쿠니를 중용하고 이에나리파를 숙청하고 덴포의 개혁을 진행시켰다. 다다쿠니는 막부 재정 재건에 나서 여러 개혁을 진행하였고, 철저한 사치 단속과 긴축 재정 정책을 채택했기 때문에 세인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또한 언론 통제도 행하며, 다카노 조에이와타나베 가잔 등의 개혁파 학자를 탄압했다. (만사의 옥)

1843년(덴포 14년) 막부가 에도, 오사카 주변의 다이묘, 하타모토 영지를 막부 직할 영지로 편입하려고 상부의 지령을 발령하자 맹렬한 반발을 사서 이에요시의 판단으로 이듬해 철회를 하면서, 다다쿠니는 실각하고 덴포의 개혁은 좌절되었다. (이후 다다쿠니를 노중에 재임했다).

그 후, 이에요시는 도이 도시쓰라, 아베 마사히로, 쓰쓰이 마사노리 등에게 정치를 맡기고 요시나가 붕당 사건에 개입해 사쓰마 번시마즈 나리오키를 은거시키고, 미토 번의 영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에 은거, 근신을 명령했다. 또한 나리오키의 일곱째 아들 시치로마에게 히토쓰바시 가문을 상속시켰다. (도쿠가와 요시노부)

1853년(가에이 6년) 6월 3일, 미국매튜 페리가 4척의 군함을 이끌고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났다. (흑선 내항) 막부 각료들이 그 대책에 부심하는 가운데 6월 22일 향년 61세로 사망하게 된다. 더위를 먹고 쓰러진 것(열사병에 의한 심부전)이 죽음의 원인이 알려져 있다.[1]

관련 인물[편집]

각주[편집]

  1. 篠田達明『徳川将軍家十五代のカルテ』(新潮新書, 2005년 5월, ISBN 978-4106101199)より。また、謎解き!江戸のススメBS-TBS, 2015년 3월 9일 방송)でも紹介され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