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각
누각(樓閣, 문화어: 루각)은 조망을 위하여 여러 층으로 짓는 동아시아 전통의 건축물이다. 정자보다는 크다.[1]
역사
[편집]최초의 누각으로 짐작되는 것은 상나라의 중옥(重屋)으로, 중옥은 하늘과 통하는 곳이라고 믿어졌다.[2] 춘추 전국 시대에는 바깥은 나무로 짓고 안쪽은 흙으로 짓는 고대광실(高臺廣室)이 있었는데 이는 초기 형태의 누각이다.[3] 전한 시대까지 제후들은 누대(樓臺, 대사, 臺榭)를 앞다투어 높게 지어 세력을 과시하였다.[4] 하나라 걸왕은 요대(瑤臺)를, 상나라 주왕은 녹대(鹿臺)를, 주나라 문왕은 영대(靈臺)를 세웠다.[5] 또 문왕은 몇 층으로 쌓아 올린 중루(重樓)에서 자신이 치세하는 국토와 적국을 바라보았다.[6] 초나라의 장화대(章華臺)는 흙으로 다진 대 위에 목조 대와 이층짜리 목조 누각을 올린 건축물이었다.[7] 누대는 주변을 조망할 수 있으면서, 연회를 벌이고, 활쏘기를 할 수 있는 곳으로, 바람이 잘 통하고 홍수에도 떠내려가지 않아 견고하였다.[4]
지금처럼 높게 짓는 누각은 한나라 때 도가가 발달하면서부터 등장하였다.[8] 《사기》에 의하면 당시에는 신선들이 누각을 좋아한다고 믿었으며[9], 연나라와 제나라에도 사람이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올라 구름 위로 솟은 누각에서 영생할 수 있다는 믿음인 육체불사론이 있었다.[10] 대표적으로 전한 무제는 신선이 누각에 산다고 한 공손경의 말을 믿고 통천대(通天臺), 신명대(神明臺), 정간루(井幹樓) 등 대와 누각을 짓게 하였다.[11] 신선을 불러와 신선과 만나고, 무제가 영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11] 이때 누각의 높이는 하늘에 닿을 수 있음을 상징하였다.[11] 한나라 시대 고분에서 누각 모양의 부장품인 도루(陶樓)가 종종 발견된다.[12] 도루는 2~3층에서 7층 정도로 만들어졌다.[13] 도루가 망루, 창루, 희루, 수사 등 다양한 종류로 만들어졌음을 고려하면 누각은 당대에 익숙한 건축양식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12] 당시 중국 북방에서는 흙벽과 함께 나무를 가로질러 층층이 쌓아 지었고, 남방에서는 건물 전체를 나무로 하여 지었을 것으로 짐작된다.[11]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경쟁적으로 누대를 짓는 풍조가 사라지고, 대신 실용적인 단층 건물을 지었다.[14] 남조에서는 누각을 사찰에 딸린 정원에서나 많이 지었다.[15] 당나라에 와서 누대를 군사적 목적과 풍경을 조망하기 위한 목적으로 짓기 시작하였다.[16]
일본에서는 누각으로 야요이 시대부터 굴립주건물(掘立柱建物) 형태의 망루가 존재하였던 것이 확인된다.[17] 이것은 제전(祭殿)으로도 쓰였다.[18]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이후 일본의 누각은 덴슈라는 독특한 형태로 발전하였다.[19]
입지
[편집]누각은 자연이 아름다운 곳에, 또는 풍류를 즐기기 위해 세웠다.[20] 궁궐에서 누각은 단독으로 배치되는 건물이나 궁성의 문루로 지어졌다.[21] 중국 정원(원림), 별서 등 정원에서 누각은 잔치를 베풀고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었다.[22] 이때 비록 누각은 인공으로 만든 정원에 두었지만, 정원은 그곳이 자연인지 인공인지 구별하기 어렵게 자연에 동화되도록 만드는 공간이었기에 누각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자연 그 자체와 같았다.[23] 정원의 연못가에는 누각을 정자와 함께 여러 채 짓기도 하였다.[24]
사찰에서는 누각을 문루이자 불교 행사의 공간으로 사용하였다.[25] 간혹 신분 높은 사람들이 풍경을 바라보는 데에도 쓰였던 것으로 짐작된다.[26] 특별히 산사에서는 안마당에 불전, 승방, 강당, 누각 등 네 동의 건물만 두는 배치를 한 경우가 많았다.[27] 누각은 안마당과 같은 높이, 또는 조금 높은 높이로 지어 올렸고, 양 옆으로 다른 행각을 지어 연결시켰으나 17세기부터는 누각만 단독으로 짓는 경우가 많았다.[28] 산사의 안마당에 누각을 갖춘 결과, 산사로 올라올 때 높은 누각과 마주침으로써 얻는 공간감이 생겨났다.[26]
관련 단어
[편집]- 마천루: 하늘을 긁는 누각이라는 뜻으로, 높이 200m 이상 또는 50층 이상인 건축물을 말한다.
- 신기루: 신(蜃)이 기운을 토하여 만든 누각이라는 뜻으로, 빛이 밀도가 다른 공기층을 통과하면서 굴절하여 허상을 만드는 현상이다.
참고 문헌
[편집]- 김동욱 (2015).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 경기: 김영사. ISBN 9788934970972.
- 윤장섭 (1999). 《中國의 建築》.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ISBN 8952100042.
- 자오광차오 (2020) [2018]. 《나무로 집 지은 이야기만은 아니랍니다》. 번역 한동수; 이정아; 차주환. 서울: 미진사. ISBN 9788940806012.
- 팡용 (2019) [2010]. 《중국전통건축》. 번역 탕쿤; 신진호. 서울: 민속원. ISBN 9788928513574.
- 한국전통조경학회 (2009). 《동양조경문화사》. 서울: 대가. ISBN 9788962850239.
각주
[편집]- ↑ 구형수 (2012년 7월 16일). “누정(樓亭)”. 《KRIHS 전자도서관》. 국토연구원. 2020년 12월 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0년 11월 29일에 확인함.
- ↑ 팡용 2019, 309쪽.
- ↑ 팡용 2019, 309-310쪽.
- ↑ 가 나 자오광차오 2020, 66쪽.
- ↑ 자오광차오 2020, 67쪽.
- ↑ 자오광차오 2020, 344쪽.
- ↑ 팡용 2019, 147쪽.
- ↑ 팡용 2019, 310쪽.
- ↑ 박경자 (2015). 《한국의 정원》. 서울: 서교출판사. 35쪽. ISBN 9791185889177.
- ↑ 팡용 2019, 311쪽.
- ↑ 가 나 다 라 팡용 2019, 312쪽.
- ↑ 가 나 팡용 2019, 313쪽.
- ↑ 팡용 2019, 314쪽.
- ↑ 자오광차오 2020, 71쪽.
- ↑ 자오광차오 2020, 346쪽.
- ↑ 자오광차오 2020, 72쪽.
- ↑ 広瀬和雄 (2007). 《考古学の基礎知識》. 角川学芸出版. 174쪽. ISBN 9784047034099.
- ↑ “왜(倭)에 군주가 없는 틈을 타 비미호(卑彌呼)가 왕위에 오름”. 《동북아역사넷》. 동북아역사재단. 2020년 11월 29일에 확인함.
- ↑ “現存天守閣のある12城”. 《旅のホームページ》 (일본어). 2020년 11월 29일에 확인함.
- ↑ 한국전통조경학회 2009, 299쪽.
- ↑ 한국전통조경학회 2009, 308쪽.
- ↑ 윤장섭 1999, 267쪽.
- ↑ 한국전통조경학회 2009, 300쪽.
- ↑ 윤장섭 1999, 220쪽.
- ↑ 한국전통조경학회 2009, 309쪽.
- ↑ 가 나 김동욱 2015, 338쪽.
- ↑ 김동욱 2015, 331쪽.
- ↑ 김동욱 2015, 3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