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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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창성(盧昌成, 일본식 이름: 八幡昌成야하타 쇼세이, 1896년 3월 25일 ~ 1955년 1월 9일[1])은 일제강점기대한민국의 방송인이다.

생애[편집]

평안북도 의주군 위화면 출신으로 일본 도쿄로 유학하여 도쿄고등공업학교 전기화학과를 졸업하였다. 귀국한 후 조선총독부 체신국 기수로 채용되어 방송국 설립에 필요한 기술을 맡았다가 방송계에 뛰어들게 되었다.

1920년대 대한민국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 설립에 참여[2] 하는 등 조선 방송계의 선구자격으로 일했다. 기술직으로 출발했으나 능력을 인정받아 함흥방송국 국장을 거쳐 조선방송협회 제2방송부장 및 사업부장, 방송국장 등을 지냈고, 동양전선주식회사 생산부장으로도 근무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상당한 재력가[3] 로서 방송계 및 문화예술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등 전쟁 지원과 전시 체제 확립을 위해 조직된 단체에 두루 가담하기도 했다.[4] 이러한 사실이 드러나는 바람에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오르게 된다.

미군정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계속 중용되어 제1공화국에서는 대한민국 공보처 방송관리국장에 임명되었다. 공보처 공무원으로 재직 중 지병으로 사망했다.

사후[편집]

부인은 마현경과 함께 한국 최초의 아나운서로 꼽히는 이옥경이며, 차녀인 노명자가 패션 디자이너로 크게 성공한 노라노이다.[5]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언론/출판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

각주[편집]

  1. 김윤식 (2008년 6월 29일). “우리나라 여자 아나운서 1호 이옥경”. 기호일보. 2008년 7월 9일에 확인함. 
  2. 노라노 (2006년 12월 6일).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나의 선택 나의 패션 2. 멋내기 DNA ”. 중앙일보. 2008년 7월 9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3. 권근영 (2008년 6월 2일). “‘신여성’에서 추억을 끄집어내다”. 중앙일보. 2008년 7월 9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4.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2004년 12월 27일). 《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서울: 민족문제연구소. 359,384,389,396쪽쪽. ISBN 8995330724. 
  5. 노라노 (2006년 12월 10일).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나의 선택 나의 패션 4. 여우 목도리”. 중앙일보. 2008년 7월 9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