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녕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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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녕군주
慶寧郡主
조선의 왕족
신상정보
출생일 1642년
출생지 청나라 심양 행궁
사망일 1682년 1월 12일 (39세) (음력)
부친 소현세자
모친 민회빈 강씨
배우자 금창부위(錦昌副尉) 박태정(朴泰定)
자녀 5남 4녀

경녕군주(慶寧郡主, 1642년 ~ 1682년 음력 1월 12일)는 조선의 왕족이며,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의 넷째딸이다. 어머니는 민회빈 강씨이다.

생애[편집]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민회빈 강씨의 넷째 딸이며, 1642년, 부모가 인질생활 중이던 청나라에서 태어났다.

1645년(인조 23년) 소현세자와 강빈이 조선으로 귀국하였으나 소현세자는 곧 사망하였고, 어머니 또한 1646년(인조 24년) 인조독살 미수사건과 관련하여 옥사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1] 이후 왕명에 의해 소현세자의 자손들은 유배되었으나 후에 효종의 명으로 복귀하였다.

1653년(효종 4년) 효종은 경녕군주를 박세기(朴世基)의 아들 박태정(朴泰定)에게 하가하고 박태정을 금창부위(錦昌副尉)로 봉하였다.[2] 박태정과의 사이에서 5남 4녀를 낳았으며 장남 박필명은 숙종대의 가신이었다.

1659년(효종 10년) 왕세자의 적녀에게 주는 '군주'의 작호를 받고 경녕군주(敬寧郡主)로 책봉되었다.[3]

1682년(숙종 8년) 1월 12일 사망하였다. 사망소식을 들은 숙종은 주강을 멈추고 관판과 상수를 내렸으며, 왕족의 예장제도가 예전되로 회복되지 않았으나 특별히 예장할 것을 명하였다.[4]

가족 관계[편집]


각주[편집]

  1. 인조실록》 47권, 인조 24년(1646년 청 순치(順治) 3년) 3월 15일 (임술)
    소현세자빈 강씨를 폐출하여 사사하고 교명 죽책·인·장복 등을 불태우다
    소현세자빈 강씨를 폐출하여 옛날의 집에서 사사하고 교명 죽책(敎命竹冊) · 인(印) · 장복(章服) 등을 거두어 불태웠다.

    의금부 도사 오이규(吳以奎)가 덮개가 있는 검은 가마로 강씨를 싣고 선인문(宣仁門)을 통해 나가니,

    길 곁에서 바라보는 이들이 담장처럼 둘러 섰고 남녀 노소가 분주히 오가며 한탄하였다.

    강씨는 성격이 거셌는데, 끝내 불순한 행실로 상(인조)의 뜻을 거슬려 오다가 드디어 사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죄악이 아직 밝게 드러나지 않았는데 단지 추측만을 가지고서 법을 집행하였기 때문에 안팎의 민심이 수긍하지 않고 모두 조 숙의(趙淑儀)에게 죄를 돌렸다.

  2. 효종실록》 11권, 효종 4년(1653년 청 순치(順治) 10년) 10월 2일 (갑자)
    정제현에게 숙휘공주를, 소현세자의 둘째 딸을 박태정에게 시집보내다
  3. 효종실록》 21권, 효종 10년(1659년 청 순치(順治) 16년) 윤3월 4일 (갑자)
    소현세자의 아들과 딸들을 군과 군주에 봉하라고 하교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소현세자의 1남 이백(李栢)은 경선군(慶善君)을 증(贈)하고, 3남 이회(李檜)는 경안군(慶安君)으로 하라.

    그리고 1녀에게는 경숙군주(慶淑郡主)를 증(贈)하고, 2녀는 경녕군주(慶寧郡主)로 하고, 3녀는 경순군주(慶順郡主)로 하라."

  4. 숙종실록》 13권, 숙종 8년(1682년 청 강희(康熙) 21년) 1월 12일 (경신)
    경녕군주의 졸기
    경녕군주(慶寧君主)가 졸하였다.

    경녕군주는 소현세자의 딸이고 금창부위(錦昌副尉) 박태정(朴泰定)의 아내이다.

    이날 임금이 주강을 열려 하였으나 부고를 듣고서 곧 멈추고, 명하여 관판(棺板)과 상수(喪需)를 내리었다.

    이때 종척(宗戚)의 상(喪)에 예장(禮葬)하는 제도가 모두 예전대로 회복되지 않았으나, 특별히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5. 인조실록》 48권, 인조 25년(1647년 청 순치(順治) 4년) 4월 25일 (병신)
  6. 인조 25년(1647년) 처형됨
  7. 〈숙인 반남 박씨 묘지명〔淑人潘南朴氏墓誌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