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거록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거록군(鉅鹿郡)은 중국의 옛 행정 구역이다. 군국제 시행 시의 왕국령으로서는 거록국(鉅鹿國)이라 한다. 대략 지금의 싱타이시 중부 일대를 관할했고, 광평을 아우른 후한에서는 한단시의 북부 일부분도 관할했다. 행정 중심지는 거록현(지금의 싱타이시 핑샹현 서남), 영도현(지금의 싱타이시 닝진현 서남)이다. 거록군·거록현의 이름을 물려받은 현재의 쥐루 현은 옛 거록군의 남련현에 해당한다.

[편집]

진나라에서 조나라 땅을 빼앗아 설치했다. 설치 시기는 역도원에 따르면 조나라가 완전히 망한 시황제 25년(기원전 222년)[1]이고 양수경에 따르면 진나라가 조나라의 동양(東陽) 일대를 취하고 조 유류왕을 항복시킨 시황제 19년(기원전 228년)인데, 《전국사》에서는 역도원의 설을 지지했고,[2] 《진대정구지리》에서는 군 설치에 대해선 양수경의 설을 지지했으나[3] 속현 목록에 이르러서는 기원전 222년을 설치 연도로 적어 일관되지 못하다.[4] 이름은 거록택(鉅鹿澤)에서 유래했다.[2][4] 군 치소는 거록현(지금의 싱타이시 핑샹현 서남)이다.[2] 문헌과 출토자료에서 확인되는 현은 다음과 같다.[5]

현명 한자 대략적 위치 비고
거록 鉅鹿 허베이성 한단시 지쩌현 북동 거록고성 시안시 상가항에서 출토된 진나라 봉니 “거록지승”(鉅鹿之丞)
양씨 楊氏 허베이성 싱타이시 닝진현 부근 1979년 진시황릉 서 조배호촌 진나라 형도 묘에서 출토된 기와 도문에 명문 “양씨거대”(楊氏居大), “양씨거공사부”(楊氏居公士富)
송자 宋子 허베이성 스자좡시 자오현 송자고성 1982년 산서 삭현 진한묘군 중 전한 말~후한 초 묘에서 출토된 “송자”(宋子) 삼공포폐
성양 成襄 ? 전국 조 평수척족포에 “성양”(成襄)포
평양 平襄 ? 전국 조 평수척족포에 “평양”(平襄)포
허베이성 싱타이시 런현 전국 조 방족포에 “인야”(人也)포
하곡양 下曲陽 허베이성 스자좡시 진저우시 전국 조 삼공포에 “하방양”(下匚陽)포
하박 下博 허베이성 헝수이시 선저우시 전국 조 삼공포에 “하박”(下博)포
무읍 武邑 허베이성 헝수이시 우이현 전국 조 방족포에 “무읍”(武邑)포
남궁 南宮 허베이성 싱타이시 난궁시 북서 전세 삼진 고새에 “남궁장행”(南宮將行)인

전한

[편집]

전한 무제가 13주를 두면서 기주에 속했다.[6] 평제 시기에 시행된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호구 15만 5951호, 인구 82만 7177명이 있었다. 아래의 속현 목록은 한서 지리지를 따른 것으로 원연·수화 지간(기원전 8년)의 현황으로 여겨지며, 20현(12현 8후국)을 두었다.[6]

현명한자 대략적 위치비고
거록현鉅鹿縣 싱타이시 핑샹현 남서 평향진(平鄕鎭)《우공》의 대륙택(大陸澤)이 북쪽에 있다. 사구대(沙丘臺)가 북동쪽 70리에 있다.
남련현南䜌縣 싱타이시 쥐루현 북 하구성촌(夏舊城村)왕선겸에 따르면 난무자(欒武子)의 봉읍 난(欒)인데 이후 남쪽으로 옮겼으므로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당 현이 있었던 하구성촌은 쥐루현 중심지에서 북으로 4km 정도 바에 안 될 정도로 매우 가깝다.

그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정이 조경숙왕 유팽조의 아들을 열후로 봉할 때, 열일곱번째 아들 유타남련후(南䜌侯)로 봉하며 그 후국이 되었다. 기원전 91년(전한 무제 정화 2년), 주금법 위반으로 그 작위가 박탈되며 현이 되었다.[7]

광아현廣阿縣 싱타이시 룽야오현 동 우가교향(牛家橋鄕) 구성촌(舊城村)기원전 196년(전한 고제 11년) 2월 정해일, 진희의 반란 당시 군수로서 상당군을 지키고 있었던 임오광아후(廣阿侯)로 봉하며 그 후국이 되었다. 기원전 115년(무제 원정 2년), 태상으로 근무하던 임오의 증손자 임월인이 종묘에서 쓸 술이 상했다는 책임으로 면직, 작위가 박탈되며 현이 되었다.[8]
상씨후국象氏侯國 싱타이시 룽야오현 북 고성진(固城鎭)기원전 126년(무제 원삭 3년) 4월 갑진일, 무제가 유팽조의 아들 3명을 열후로 봉할 때, 그 열두번째 아들 유하(賀)를 상지후(象氏侯, 《한서》〈왕자후표〉에서는 '𤊱'으로 기록되어 있음)로 봉하며 그 후국이 되었다. 왕망신나라 건국 이후 왕자후들의 작위를 폐지하면서 현이 되었다.
영도현廮陶縣 싱타이시 닝진현 남서 봉황진(鳳凰鎭) 서왕리촌(西王里村)
송자현宋子縣 스자좡시 자오현 북동 한촌진(韓村鎭) 서가장촌(徐家莊村)
양씨현楊氏縣 싱타이시 닝진현
임평현臨平縣 스자좡시 진저우시 남동CHGIS를 만든 푸단 대학 · 하버드 대학 연구팀이 비정한 좌표 기준으로, 진저우시 중심가 남동쪽 동리장향(東里莊鄕) 안가장촌(安家莊村) 일대이다.[9]
하곡양현下曲陽縣 스자좡시 진저우시 서 진주진(晋州鎭) 고성촌(鼓城村)도위의 치소가 있다. 응소에 따르면 순오가 멸한 고(鼓)가 이 현의 고취(鼓聚) 석양정(昔陽亭)이다.
세현貰縣 신지시 남서CHGIS를 만든 푸단 대학 · 하버드 대학 연구팀이 비정한 좌표 기준으로, 신지시 중심가 남서 전가장향(田家莊鄕) 상가장촌(尙家莊村) 일대이다.[10]
교현郻縣 신지시 동남CHGIS를 만든 푸단 대학 · 하버드 대학 연구팀이 비정한 좌표 기준으로, 신지시 중심가 남동 신집진(辛集鎭) 묘영촌(錨營村) 일대이다.[11]
신시후국新市侯國 싱타이시 신허현 서남 형가장향(荊家莊鄕) 선장촌(仙莊村)기원전 76년(전한 소제 원봉 5년) 11월 경자일, 소제가 광천유왕 유제의 여섯번째 아들 유길(吉)을 신시후(新市侯)로 봉하며 그 후국이 되었다.[12]
당양현堂陽縣 싱타이시 신허현염관이 있었다.
안정후국安定侯國 스자좡시 신지시 북동 구성진(舊城鎭) 서기원전 73년(전한 선제 본시 원년) 7월 임자일, 선제가 연날왕 유단의 차남 유현(賢)을 안정후(安定侯)로 봉하며 그 후국이 되었다.[12]
경무현敬武縣 스자좡시 자오현 동
역향후국歷鄕侯國 싱타이시 바이샹현 앙가장향(王家莊鄕) 신당촌(神堂村)기원전 58년(선제 신작 4년) 7월 임자일, 선제가 광천유왕 유제의 아홉번째 아들 유필승역향후(歷鄕侯)로 봉하며 그 후국이 되었다.[12]
악신후국樂信侯國 신지시 동 신성진(新城鎭) 남가촌(南街村)기원전 59년(신작 3년) 4월 무술일, 선제가 광천유왕의 일곱번째 아들 유강악신후(樂信侯)로 봉하며 그 후국이 되었다.[12]
무도후국武陶侯國 ?기원전 57년(선제 오봉 원년) 7월 임오일, 선제가 광천유왕의 열번째 아들 유조무도후(武陶侯)로 봉하며 그 후국이 되었다.[12]
백향후국柏鄕侯國 싱타이시 바이샹현 남서 조촌(趙村)기원전 33년(전한 원제 경녕 원년) 4월 정묘일, 원제가 조애왕 유고의 두 아들을 열후로 봉할 때, 그 차남 유매(買)를 백향후(柏鄕侯)로 봉하며 그 후국이 되었다.[12]
안향후국安鄕侯國 스자좡시 진저우시 중심가 동쪽 일대기원전 33년 4월 정묘일, 원제가 조애왕 유고의 두 아들을 열후로 봉할 때, 그 셋째 아들 유희(喜)를 안향후(安鄕侯)로 봉하며 그 후국이 되었다.[12]

CHGIS를 만든 푸단 대학 · 하버드 대학 연구팀이 비정한 좌표 기준으로, 주가장향(周家莊鄕) 유근장촌(劉靳莊村)일대이다.[13]

[6][14][15]

[편집]

다음 현의 이름을 고쳤다.

전한
남련(南䜌)부평(富平)
상씨(象氏)영창(寧昌)
송자(宋子)선자(宣子)
양씨(楊氏)공륙(功陸)
교(郻)진취(秦聚)
신시(新市)시악(市樂)
역향(歷鄕)역취(歷聚)

동관기(東觀記)에서는 왕망이 거록군을 나누어 화융(和戎)군[16]을 설치하고, 치소는 하곡양현에 뒀다고 한다.[14][17]

후한

[편집]

30년(후한 광무제 건무 6년) 6월 24일(신묘일, 율리우스력 8월 11일), 광무제는 전란으로 파괴된 국가 시스템을 재건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400여개 현을 통폐합한다. 이 때 광아, 상지, 송자, 임평, 세, 신시, 안정, 경무, 역향, 낙신, 무도, 백향, 안향 13개현이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18][19]

37년(후한 광무제 건무 13년) 2월 경오일, 광무제가 9개 제후왕국을 인접한 군에 통폐합할 때 광평국이 통폐합되었다.[18] 편입된 옛 광평군 지역은 60년(후한 명제 영평 3년) 4월 17일(신유일, 율리우스력 6월 4일), 명제가 차남 유선(羨)을 광평왕(廣平王)으로 책봉, 그 식읍으로 광평군을 재설치하며 떨어져 나갔다.[20][21]

72년(영평 15년), 첫 4개월 동안 동방 순행을 갔다 온 명제가 황자들을 제후왕으로 봉할 때, 그의 셋째 아들 유공(恭)이 거록왕(鉅鹿王)으로 책봉되었다. 이에 거록군은 유공의 식읍으로서 왕국으로 바뀌었다.[20] 78년(후한 장제 건초 3년), 조정에서 제후왕을 담당하던 관리들은 유공과 유선, 그리고 낙성왕을 식읍으로 내려보낼 것을 건의했으나, 장제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1]

거록군에 부임한 유공은 부임 1년만인 79년(건초 4년) 4월 5일(기축일, 율리우스력 5월 24일), 강릉왕으로 이봉되면서 거록군을 떠났다. 이렇게 거록군은 다시 군으로 바뀌었다.[22]

82년(건초 7년) 6월 23일(기미일, 율리우스력 8월 6일), 장제는 북방 국경의 병참 기지로 기능한 기주의 일부로서, 일대의 조세가 제후왕의 수입으로 들어오기 힘들 것이라 판단한다. 식읍의 조세가 주를 차지하는 제후왕들의 수입을 균등하게 맞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봉국의 호구수를 조정했던 장제는 유선을 서평왕(西平王)으로 책봉, 여남군의 일부를 식읍으로 하사한다.[21] 광평군은 이러한 이봉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거록군에 다시 통폐합되었다.

이후 거록군 자체는 제후왕의 식읍이 된 적이 없다. 다만 93년(후한 화제 영원 5년)에 광종현[23], 165년(후한 환제 연희 5년)에 영도현[24]이 제후왕의 식읍이 되며 별개의 왕국이 되기도 했지만, 광종국은 1년도 못 채우고, 영도현은 2년만에 폐지되면서 다시 거록군에 흡수되었다.

후한 말기인 184년(후한 영제 광화 7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날 때, 거록군은 주동자 장각의 고향으로서 주요한 발발지가 되었다. 이후 거록군은 기주에 속한 여러 군현과 함께 원소의 지배를 받았다가, 조조가 원소 사후 원상원담의 내전에 개입, 하북을 장악하며 조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연혁을 거친 청하군은 140년(순제 영화 5년) 당시 기준으로 경내에 15개현이 있었고, 주민 109,517호 602,906명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19]

이름한자비고
영도현廮陶縣165년 1월, 발해왕 유회가 반란을 일으키려다 적발되었다. 담당 관리들은 작위 박탈을 건의했으나, 환제는 이를 거절, 해당 현을 식읍으로 내리며 전봉시켰다. 이로써 영도현은 별개의 제후왕국으로 분리되었다.

하나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67년(환제 영강 원년) 11월 23일(임신일, 율리우스력 168년 1월 20일), 유회를 다시 발해왕으로 봉하며 영도현은 다시 거록군에 반환되었다.

거록현鉅鹿縣
양씨현楊氏縣
교현鄡縣
하곡양현下曲陽縣
임현任縣《한서》〈지리지〉와 비교했을 때, 광평국이 통폐합되면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남화현南和縣《한서》〈지리지〉와 비교했을 때, 광평국이 통폐합되면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광평현廣平縣《한서》〈지리지〉와 비교했을 때, 광평국이 통폐합되면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척장현斥章縣《한서》〈지리지〉와 비교했을 때, 광평국이 통폐합되면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광종현廣宗縣93년 1월 27일(신묘일, 율리우스 3월 13일), 화제는 동생 유만세[25]광종왕(廣宗王)으로 책봉한다. 이에 그 식읍으로서 광종현은 별개의 제후왕국으로 분리되었다.[23] 그러나 8개월도 채우지 못한 9월 1일(신유일, 율리우스력 10월 9일), 유만세가 아들 없이 죽자 작위가 폐지되었고, 다시 거록군에 편입되었다.[26]125년(후한 안제 연광 4년) 순제가 자신을 추대시킨 19명의 환관들에게 작위를 내릴 때, 그 중 한 사람인 왕성(王成)에게 광종후 작위와 식읍 4천호를 내리며 후국이 되었다.[27][28]
곡주현曲周縣《한서》〈지리지〉와 비교했을 때, 광평국이 통폐합되면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열인현列人縣《한서》〈지리지〉와 비교했을 때, 광평국이 통폐합되면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광년현廣年縣《한서》〈지리지〉와 비교했을 때, 광평국이 통폐합되면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평향현平鄕縣《한서》〈지리지〉와 비교했을 때, 광평국이 통폐합되면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남련현南䜌縣

위진

[편집]

조조는 213년(후한 헌제 건안 13년) 5월 10일(병신일, 율리우스력 6월 16일), 위공(魏公)으로 봉해지며 하북의 여러 군을 자신의 식읍으로 편입하는데, 거록군은 위나라의 식읍으로 편입되었다.[29]

217년(건안 17년), 서방 원정을 마치고 업으로 돌아온 조조는 위군과 가까운 여러 현들을 위군에 편입한다. 이 때 거록군의 일부 지역이 위군으로 편입되었다.[30] 그 일부는 37년 이전까지 광평군에 속했던 임현, 남화, 광평, 척장, 곡주, 열인, 광년 7개현으로, 221년(위 문제 황초 2년) 위군 서부도위가 광평군으로 분리될 때, 모두 광평군에 편입되었다.[31]

서진건국이후 평향현, 하곡양현, 교현이 한단군으로 이관되어 2현 10,040호만을 거느리는 작은 군이 되었다.

현명 한자
영도현 廮陶縣
교현 郻縣
하곡양현 下曲陽縣
남련현 南䜌縣
평향현 平鄕縣
거록현 鉅鹿縣
양씨현 楊氏縣

북위

[편집]

3현 27,172호 130,239명을 거느렸으며 진정국, 상산군, 박릉군, 북평군과 함께 정주(定州)에 소속되었다.

현명 한자 대략적 위치 비고
곡양현 曲陽縣 스자좡시 진저우시 약간 서 임평성(臨平城), 진향성(真鄉城), 곡향성(曲鄕城), 요임금의 사당과 청구(靑丘)가 있다.
고성현 槀城縣 스자좡시 롼청구 북동 488년(북위 태화 12년), 폐지된 현이 복구되었다. 비루(肥壘)가 있다.
교현 鄡縣 스자좡시 선저우시 약간 남서 교성(鄡城), 안정성(安定城), 조군신(趙君神), 청구(靑丘), 우구(牛丘), 황구(黃丘), 치구(馳丘), 영구(靈丘)가 있다.

[편집]

양국군으로 개명되면서 사라졌다.

태수

[편집]

전한

[편집]
  • 주수(? ~ 기원전 76년)
  • 등의(기원전 19년 ~ ?)
  • 평당(기원전 12년 ~ ?)
  • 손굉(孫宏, 孫閎, ? ~ 기원전 8년)[32]

현한

[편집]

후한

[편집]

각주

[편집]
  1. 역도원: 《수경·탁장수주》(水經·濁漳水注)
  2. 1 2 3 杨宽 (2003). 战国史 [전국사]. 上海人民出版社. 682쪽. ISBN 7-208-04537-2.
  3. 后晓荣 (2009년 1월 1일). 秦代政区地理 [진대정구지리]. 北京市东城区先晓胡同10号: 社会科学文献出版社. 75쪽. ISBN 9787509705704.
  4. 1 2 后晓荣 (2009년 1월 1일). 秦代政区地理 [진대정구지리]. 北京市东城区先晓胡同10号: 社会科学文献出版社. 347쪽. ISBN 9787509705704.
  5. 后晓荣 (2009년 1월 1일). 秦代政区地理 [진대정구지리]. 北京市东城区先晓胡同10号: 社会科学文献出版社. 347~350쪽. ISBN 9787509705704.
  6. 1 2 3 반고: 《한서》 권28상 지리지제8상
  7. 《한서》15권 표 제3 上 왕자후표(王子侯表) 上
  8. 《한서》16권 표 제4 고혜고후문공신표(高惠高后文功臣表)
  9. CHGIS(China Historical Geographic Information Sysem) 임평현 위치 비정 정보
  10. CHGIS(China Historical Geographic Information Sysem) 세현 위치 비정 정보
  11. CHGIS(China Historical Geographic Information Sysem) 교현 위치 비정 정보
  12. 1 2 3 4 5 6 7 《한서》15권 표 제3 下 왕자후표(王子侯表) 下
  13. CHGIS(China Historical Geographic Information Sysem) 안향후국 위치 비정 정보
  14. 1 2 周振鹤 (2006년 6월). 汉书地理志汇释. 合肥市回龙桥路1号: 安徽教育出版社. 177 ~ 181쪽. ISBN 7-5336-4757-2.
  15. CHGIS(China Historical Geographic Information Sysem) 각 현 · 후국 위치 비정 정보 참조
  16. 화성(和成)군이라고도 한다.
  17. 《후한서》 권1 상 광무제 기제1상의 주석에서 재인용
  18. 1 2 《후한서》1권 下 광무제기(光武帝紀) 下
  19. 1 2 《후한서》 지 제 22 군국지 4 기주 거록군
  20. 1 2 《후한서》2권 현종효명제기(顯宗孝明帝紀)
  21. 1 2 3 《후한서》50권 열전 제40 효명8왕열전(孝明八王列傳) 진경왕선
  22. 《후한서》3권 숙종효장제기(肅宗孝章帝紀)
  23. 1 2 《후한서》4권 효화효상제기(孝和孝殤帝紀)
  24. 《후한서》7권 효환제기(孝桓帝紀)
  25. 화제는 장제의 넷째 아들, 유만세는 장제의 여덟번째 아들이었다.
  26. 《후한서》55권 열전 제45 장제8왕열전(章帝八王列傳) 광종상왕만세
  27. 《후한서》5권 제기(帝紀) 제5 효안제기(孝安帝紀)
  28. 《후한서》78권 열전 제68 환자열전(宦者列傳) 손정
  29. 《후한서》9권 효헌제기(孝獻帝紀)
  30. 《삼국지》1권 무제기(武帝紀)
  31. 《진서》14권 지 제 4 지리지 上 사주 광평군
  32. 반고, 《한서》 권60 두주전·권84 적방진전
  33. 범엽, 《후한서》 권1 상 광무제기제1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