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이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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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http://www.koreanroyal.org www.koreanroyal.org]
[http://www.thejinan.org www.thejinan.org]

2013년 1월 2일 (수) 17:49 판

전주 이씨(全州 李氏)
관향전주
시조이한(李翰)
중시조진안대군, 계성군, 광평대군, 능원대군, 덕천군, 덕흥대원군, 무림군, 안양군, 안원대군, 양녕대군, 완풍대군, 월산대군, 의평군, 익안대군, 인성군, 임평대군, 임영대군,효령대군, 온녕군, 충녕대군 이영습(李英襲)
집성촌함북 길주군, 제주도 제주시, 경기도 연천군, 함북 경성군
주요 인물이성계, 이승만
인구(2000년)2,609,890명 (3위)

전주 이씨(全州 李氏)는 한국의 성씨로, 조선 왕조본관이다.

선원선계

시조 이한(李翰)은 휘(諱)는 한(翰)이요, 호는 견성(甄城)이다. 신라사공(司空)이라는 벼슬을 지냈다. 이한의 부인은 신라 태종 무열왕의 10세손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이라고 전한다. 조선의 건국자인 이성계는 전주 이씨의 제21대손(제22세손)이다.

두가지 설

  1. 야사(野史) 실록(實錄)에 연대 작가 미상의 <완산실록(完山實錄)> 의하면 우리 시조 사공공의 휘는 한이요, 자는 견성이시다. 공은 원래 중국에 살았었는데 하늘이 낸 성스런 인물로 남보다 총명하시고 재질도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다. 15세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는데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나웠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그래서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 반드시 왕기가 서려 있다'라고 하였다.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략을 받아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로 들어오시니 그 때가 18세였다. 이렇게 어리셨는데도 문장이 비범하고 성품이 인자하여 탁월한 재능과 더불어 기품이 널리 떨쳤다. 우리 나라로 오신 지 얼마 안되어 명성이 조정에까지 떨쳐 신라 문성왕(文聖王)이 사공에 임명하니 정치를 하신 지 1년만에 나라가 태평하여 온갖 벼슬아치들이 다 화합하고 온 백성이 모두 즐겼다. 그래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10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니 이분이 바로 경주김씨이다.'
  2. 그러나 경주 이씨에서 갈라져 나간[1]합천 이씨(陜川 李氏) 족보에 의하면, “이알평의 34세손 이진두(李辰斗)의 둘째 손자 한(翰)이 지금의 전주인 완산 이씨(完山 李氏)의 시조가 되었다. 사공(司空)으로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배위는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주 이씨의 시조인 이거명(李居明)도 이알평의 36세손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둘은 항렬이 같은 셈이다.[출처 필요]

황현의 매천야록

황현매천야록에 따르면 전주 이씨가 많아진 이유로, 대원군이 정책적으로 전주 이씨를 발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주 이씨를 자처하는 자는 모두 대종보에 이름을 올려주어 천민조차 본적을 속여 이름을 올렸다고 하며 이후 종친회 잔치에 참가한 자만 7만이라고 한다. 다만 매천야록이라는 기록의 특성상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참고

주석

  1. 23. 전주 이씨 충청타임즈 2008년 2월 22일

바깥 고리

참조

www.koreanroyal.org www.thejina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