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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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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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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 링크 ==
* [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13802 홍우원:네이트 한국학]
*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b_A1605_1_0014862 홍우원: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25h2035a 홍우원]


{{토막글|한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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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25일 (수) 23:32 판

홍우원(洪宇遠, 1605년1687년 7월 27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학자이며 남인 중진이었다. 제1차 예송 논쟁과 제2차 예송 논쟁 당시 윤선도, 허목, 윤휴의 참최복과 기년복 설 주장에 동조하였다.

남인 중진으로 당색을 초월하여 서인 김육대동법에 적극 지지를 보냈으며,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의 석방을 탄원하였고, 민회빈 강씨의 억울함을 상소하다 장살당한 김홍욱의 사면, 복권 여론을 주도하다가 파면당하기도 했다. 이후 당색을 넘어 송시열 등의 소현세자 일가 복권 운동에 동참하였다. 1663년 윤선도가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자, 여러 번 윤선도를 옹호하다가 파직, 금고당하기도 했다.

이후 허견의 옥사에 같은 남인 당원이라는 이유로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유배지에서 병을 얻어 죽었다.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자는 군징(君徵), 호는 남파(南坡)이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생애

생애 초반

할아버지는 형조판서를 지낸 홍가신(洪可臣)이며, 한성부 서윤을 지낸 홍영(洪榮)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색으로는 남인이었다. 광해군인목대비 폐모론과 임해군, 영창대군 처형을 패륜, 부도덕으로 규정하여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허목, 윤선도, 송시열 등과 교류하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뒤 인조 반정이 벌어졌으나 그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에 응시하라는 가족들과 친지들의 권고로 1645년(인조 23) 별시문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다.

강빈 복권 여론

1647년 예문관검열이 되고, 1648년 예문관봉교가 되었다. 그해 봉교로 태백산 사고와 오대산 사고를 살피고 돌아왔다. 이후 사간원정언을 거쳐 1651년(효종 2) 예안현감이 되어 시폐(時弊)를 논하는 장문의 소를 올렸다.

1654년(효종 5년) 6월 17일 그는 소현세자의 석철의 석방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효종은 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말을 그대가 능히 말하니 진실로 가상하다. 유념하도록 하겠다."라고 하여 그 상소를 문제삼는 의견을 물리치고 특별하게 해를 입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 서인 김홍욱소현세자빈 강씨의 옥사가 허위이며 복권을 주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장살(杖殺)당했다.

1654년말 홍우원은 홍문관수찬이 되었는데, 이때 그는 당색을 초월하여 김홍욱(金弘郁)의 사면, 복권 여론을 주도한다. 소현세자의 빈 강빈(姜嬪)옥사의 허위임을 직언하다 장살당한 황해도관찰사 김홍욱의 신원(伸寃)과 복권을 주장하다가 파직당하였다.

1차 예송 논쟁

1659년(현종 즉위) 부수찬에 복직되었다. 1660년 윤선도(尹善道)가 송시열의 예론을 비판하는 상소를 계속 올렸다. 그 중 송시열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상소를 올려 파란을 불러왔다. 윤선도송시열을 비판한 근거로는 송시열의 체이부정 주장과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민회빈 강씨, 김홍욱 복권운동을 벌이는 점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근거로 삼았다. 홍우원은 윤선도에게 김홍욱을 변호하며 의리를 지키다가 순절한 선비를 엮지 말라고 지적하였다.

그뒤 공주목사·사인·장령을 거쳐, 1663년 다시 수찬이 되어 자의왕후(慈懿王后) 조씨(趙氏)의 복상문제로 윤선도가 유배되자 그의 석방을 주장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뒤 탄옹 권시윤선도의 석방을 요청했다가 심한 탄핵을 받고 파직되자, 홍우원은 소를 올려 권시에게는 잘못이 없으며, 권시의 복권과 윤선도의 석방을 적극 주장하다 파직당하였다.

1663년 홍문관교리가 되자 또다시 윤선도의 석방을 상소하여 종통, 적통의 주장을 하며 윤선도를 너그럽게 풀어달라고 청하니, 현종은 홍우원을 금고에 처하였다. 이후 그는 학자의 주장을 취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처벌할 필요는 없다며 서인들을 규탄했다가 서인들로부터 다시 역공격을 당하였다. 김홍욱효종말년에 복권되었는데, 이후 그는 다른 서인들과 함께 김홍욱에게 표창을 청할 것을 상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인들은 그가 윤선도를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던 점을 문제삼아 그의 김홍욱 포상 주장 참여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2차 예송과 허견의 옥사

현종 말년 2차 예송 논쟁(禮訟論爭)에서 승리한 남인이 집권하자 응교로 복직되고, 이어서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자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승지, 부제학, 이조참의 등을 거쳐 가선대부로 승진 사헌부대사헌, 공조참판 등을 거쳐 자헌대부로 승진하여 이조판서가 되었다.

1676년(숙종 2)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가 다시 예조판서·지중추부사, 이듬해 우참찬이 되어 흉년임을 들어 대동미(大同米)를 감량할 것, 납물교생(納物校生)의 면역(免役)을 중지할 것, 납속자(納粟子)에 대한 불신을 없앨 것 등을 진언하여 성사시켰다. 이어서 강화유수·이조판서를 역임하고 1678년 공조판서가 되어 각 아문(衙門)의 둔전을 혁파하고 훈련도감·총융청·수어청·어영청 등 4군영문의 재정은 은포(銀布)로 징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남인임에도 허적, 허목 등과 서인 김육대동법의 취지를 이해하여 당색으로 초월하여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또한 서인 김홍욱, 송시열 등이 주도한 소현세자민회빈 강씨의 복권 여론에도 당색을 초월하여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1]

유배와 최후

1680년(숙종 6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몰락하자 허적(許積)의 할아버지 '허잠의 시호 연시연' 행사장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허적의 동류로 몰려 심문당했다. 청남이었던 그는 평소 허적서인들을 변호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었다. 그뒤 허견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고문당한 뒤 명천으로 유배되었다가 나이가 많다고 하여 문천으로 이배, 현지 배소에서 유배생활 중 병을 얻어 죽었다. 저서로는 《남파집》 13권이 있다.

사후

문간(文簡)의 시호가 내려졌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복작(復爵)되었다가 갑술환국으로 추탈된다. 1795년 정조 때 가서야 다시 복권된다.

저서

  • 《남파집》 13권

평가

학문이 고명(高明)하고 성품이 직절(直節)하다 하여 파직되었을 때마다 조정에서는 서용할 것을 국왕에게 진언하였다. 안성의 백봉서원(白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주석

  1. 소현세자빈의 복권을 놓고 남인 내에서는 송시열 등이 효종의 종통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악의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다.

관련 항목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