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피누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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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khwong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7월 26일 (일) 06:44 판

피핀 2세(Pepin II, 630년 ~ 714년 12월 16일)는 프랑크 왕국의 귀족이자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궁재였다. 프랑크 왕국의 궁정 행정관 피핀 1세의 딸 베가와 아르눌프의 아들 안세기셀의 장남이며, 레온 백작 마르틴의 형이었다. 페펭 드 에리스탈, 페펭 데리스탈, 피핀 드 헤르스탈 등으로도 부른다.

679년 다고베르트 2세가 암살당하자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뒤 네우스트리아의 왕 테오도리히 3세와 궁재 에브로인과 전쟁을 벌여 격파하고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의 궁재를 겸하여 프랑크 왕국 전체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뒷날 프랑크 왕국의 전권을 장악하는 카를 마르텔은 그의 서자였다.

생애

메츠 주교 아르눌프의 아들인 안세기젤피핀 1세의 딸 베가의 아들이다. 그의 동생은 레온 백작 마르틴이고 여동생 클로틸드 도드네우스트리아의 왕 테오도리히 3세의 왕비였다. 679년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다고베르트 2세가 죽자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정 행정관이 되어 몇년간 실력을 쌓았으며, 네우스트리아테오도리히 3세와 그의 궁재였던 에브로인에 대항해 자치권을 지켰다.

680년 레온 근처 루코파오 전투에서 에브로인에게 졌으나 687년 페론 근처 테르트리에서 네우스트리아인들을 굴복시키고 패권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테오도리히 3세를 폐위시키지 않고 계속 왕위에 앉혔고, 그가 죽은 뒤에는 메로빙거 왕조의 왕 3명이 연달아 뒤를 잇게 했다. 그의 섭정에 반발한 테오도리히 3세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과 함께 여러번 그의 영향력하에서 분리독립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무산시켰다.

680년대 중반부터 북동쪽 국경을 위협하던 프리기아(프리슬란트) 부족들을 689년에 물리치고, 조공관계를 형성하였다. 그 해 아들 그리모알트 2세프리기아 부족장 라드보트의 딸 테오델린트와 결혼시켰다. 또한 알레만니족프랑크 왕국에 복속시켰고 알레만니아와 바이에른에 선교사 파견과 수행을 도와 기독교 선교를 지원, 장려했다.

708년 장남 드로고가 죽고 714년에는 마지막 살아남은 적자인 그리모알트 2세가 그의 후계자로 지명받으러 오다가 살해되어 손자들에게 계승권을 넘겼다. 그러나 곧 카를 마르텔의 쿠데타로 궁재 직위는 서자인 카를 마르텔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해 12월 16일 프랑크 왕국 벨기에 리에주 근처의 쥐필에서 사망했다.

가족 관계

관련 항목

전임
(신설)
프랑크 공작
687년 - 714년
후임
카롤루스 마르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