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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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1891년 폴 고갱
1891년 폴 고갱
신상정보
본명 외젠 앙리 폴 고갱
Eugène Henry Paul Gauguin
출생 1848년 6월 7일(1848-06-07)
프랑스 프랑스 파리
사망 1903년 5월 8일(1903-05-08)(54세)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마르키즈 제도아투오나
국적 프랑스 프랑스
분야 회화 조각 세라믹스 인그레이빙
사조 후기인상주의 원시주의
주요 작품
영향
에드바르 뭉크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폴 고갱(Paul Gauguin, 1848년 6월 7일 ~ 1903년 5월 8일)은 프랑스인상주의 화가이다. 파리에서 태어났다.

생애

그림

고갱의 생애는 파란만장하다. 아버지는 자유주의자로서 망명하여 남미 리마로 가던 도중에 죽고, 그 후 고갱은 7세 때에 프랑스에 돌아온다. 바다를 동경하여 선원이 되어 남미도 항해하지만, 결국 포기하고 그만두고 화가로서 새출발을 한다.

퐁 타벵

그러나 회화는 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돈은 다 떨어져서 아내의 고향인 덴마크로 가는데 덴마크에서 발표한 일도 실패, 고갱은 처자를 남겨두고 단 하나의 어린아이를 데리고 파리에 나타났다. 그러나 생활은 궁핍하여 포스터를 붙이는 노동도 했다. 그리고 1886년부터 브르타뉴의 퐁 타뱅으로 가서 젊은 화가들과 만나, 인상파의 그림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인 화풍을 창시, 평면적인 채색으로 장식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그의 화풍을 따르는 젊은 화가들과 '퐁 타벵(Pont-Aven) 파'를 창립하였다. 파리로 돌아가서는 고흐를 만났다.

순수함을 찾다

그러나 고갱에게는 순수함에 대한 정열이 있었다. 문명의 거짓을 좋아하지 않았다. 거짓이 없는 순수함 속에는 이 있다. 거기에는 시(詩)가 살아 있다. 고갱은 1887년 봄에 남미로 건너가고, 다시 마르티니크 섬으로 가지만 병으로 인한 고뇌로 귀국한다. 그리하여 이듬해 퐁 타뱅으로 다시 가 거기에서 젊은 화가들과 만나 새로운 회화의 이론을 주장한다. 이어 빈센트 반 고흐의 초대로 아를르에도 가지만 그 우정은 깨져 버려, 재차 순수함을 그리워한다. 그 염원을 달성한 것은 1891년으로, 고갱은 태평양타히티 섬 민중들의 순수한 삶과 개성에 감동하여 수많은 작품을 그려 낸다. 고갱은 한번 파리에 돌아오지만, 1895년에는 타히티에 돌아간다. 그러나 그림 제작하는 것 외에는 궁핍과 병과 싸우는 생활이고, 1901년에는 도미니카 섬으로 옮겨 가서 고독한 생애를 마친다.

그림의 개성

그는 세잔·고흐 등과 함께 후기 인상파의 한 사람인데, 세잔은 객관적 또는 공간적인 것을, 고흐는 주관적인 것을 제재로 하였으나, 고갱은 장식적인 것의 부활을 주로 하였다. 그의 강렬하고도 새로운 장식풍의 그림은 후세 그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품

  • 《황색의 그리스도》
  •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 《네버모어》
  •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 《타히티의 여인들》
  • 《언제 결혼할까?》
  • 《눈 속의 브르타뉴 풍경》
  • 《모자를 쓴 자화상》
  • 《모성》
  • 《과부습작》
  • 《야회복을 입은 메트 고갱》
  • 《캔버스 앞의 자화상》
  • 《야생화와 만돌린이 있는 정물》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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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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