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마누스 (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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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만 1세(Carloman I, Karlmann I) 또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카를로만(Carloman I of Austrasia, Karlmann I of Austrasia, 706년에서 713년 사이 ~ 754년)은 프랑크 왕국의 궁재, 관료이다. 궁재 카를 마르텔의 맏아들로 741년 아버지가 죽자 동생 피핀과 함께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았다. 카를로만은 아우스트라시아궁재를, 피핀은 네우스트리아의 궁재가 되었다. 747년 그는 모든 지위에서 물러나 수도원으로 은퇴하였다.

748년 아들 드로고 2세피핀 3세에 의해 폐위되자 이탈리아의 수도사 및 주교들과 연대하여 쿠데타를 기획했으나 실패하고 프랑크로 유배되었다.

생애

생애 초반

741년 아버지 카를 마르텔이 죽었을 때 카를로만과 피핀에게는 배다른 동생 그리포가 있었다. 그리포는 아버지의 유산에 자신이 배제되자 반기를 들었고 742년 카를로만과 피핀은 그리포를 붙잡아 수도원에 감금시켜 버렸다.

그는 동생 피핀 3세와 서로 힘을 합쳐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하고 자신들의 가문의 지위를 강화하는 데 협력했다. 아키텐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카를로만이 피핀을 돕고 작센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피핀이 카를로만을 도왔다.

은퇴와 저항

747년 8월 15일 카를로만은 자신의 모든 지위에서 물러나 로마에서 교황 자카리아에 의해 삭발을 하고 수도원으로 은퇴하였다. 그 후 그는 7년 동안 이탈리아 몬테 카시노에서 수도원을 창설하고 그곳에 머물면서 일체 세속의 직위에 관여하지 않고 수도승으로 보냈다.

747년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드의 궁재직을 아들 드로고 2세에게 수여하였다. 그러나 드로고는 피핀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피핀에 의해 강제로 수도승이 되고 프랑스 북부로 유배되었다. 카를로만은 자신을 추종하는 이탈리아와 프랑크의 성직자들을 동원하여 피핀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역시 실패하고 다시 이탈리아로 추방당해야만 했다.

최후

754년 교황 스테파노 2세롬바르드족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제는 프랑크 왕이된 피핀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카를로만은 은둔처에서 나와 피핀에게 가서 이탈리아로 진군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피핀은 카를로만의 요청을 거절하고 그를 비엔에 감금시켜 버렸다. 카를로만은 그해 8월 비엔에서 죽었고 유해는 몬테 카시노에 묻혔다.

아들 드로고는 강제로 승려가 되었지만 이브레아의 프리울리 후작 에버하르트에게 시집간 딸 로드루드를 통해 뒷날 이탈리아의 군주가 되는 베렝가리오 1세의 5대 외조부가 된다. 딸 힐데트루드는 알사스 백작 리우트프리드 2세(Luitfrid II)에게 시집갔는데, 이들의 아들은 투르(Tours)의 백작 위그이다. 위그의 딸 투르의 이르멘가르트(Ermengarde of Tours)는 샤를마뉴의 손자이자 루트비히 경건왕의 장남인 중프랑크로타르 1세의 왕비가 된다.

가족 관계

관련 항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