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르바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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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르바리 전쟁
Second Barbary War
바르바리 전쟁의 일부

알제리 연안의 디케이터 전대
날짜1815년
장소
결과 미합중국의 승리
교전국
미국의 기 미국 오스만 알제리아
지휘관
미국 제임스 매디슨
미국 스티븐 디케이터
미국 윌리엄 베인브리지
마흐메드 2세
하지 무하메드
병력
전선 10척 정확한 수는 미상
피해 규모
4명 사망
10명 부상
53명 사망
486명 포로

제2차 바르바리 전쟁(Second Barbary War, 알제리 전선, 알제리 전쟁이라고도 함)는 19세기 초에 미국과 오스만 제국 북아프리카 바르바리 국가 사이에 벌어진 두 번째 전쟁이다. 북아프리카에서 트리폴리, 튀니스, 알제리 세 나라는 오스만 제국에 명목적으로 종속되어 있으면서 실질적으로 독립 자치 통치를 실시하고 있었으며, 세 나라를 합해 바르바리 국가라고 했다. 제1차 바르바리 전쟁(1801년 -1805 년)에서 트리폴리의 해적 행위를 방지하게 한 미국은 1815년알제리를 공격한 후 협상에서 해적 행위를 멈추게 하는데 성공했다. 이듬 해에는 영국네덜란드에 의해 오래 지속된 국제 분쟁도 사실상 끝을 맞이했다. 이 바르바리 전쟁으로 미국은 해적 국가에 통행료를 지불하던 관습을 끝내고 오스만 제국 시대(16세기 ~ 18세기)에 만연하고 있던 이 지역의 해적 행위를 종식시켰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유럽 열강은 보다 정교한 고가의 함선을 건조하여 바르바리 해적들이 대항할 수 없게 되었다.

배경

제1차 바르바리 전쟁 이후, 미국은 프랑스와의 무역을 하면서 영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그것이 미영 전쟁(1812년 -1815년)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북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졌다. 바르바리 국가의 해적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지중해를 항해하는 미국과 유럽의 상선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여 선원과 장교들을 억류하여 몸값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무렵, 유럽 열강은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린 상태였으며, 이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1815년이 되고 나서였다.

미국의 대응

미합중국 해군을 지휘한 스티븐 디케이터

1815년 2월 미영 전쟁이 끝나고 미국은 다시 북아프리카로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3월 3일, 미국 의회는 알제리에 해군을 파견하는 것을 승인하고 2개의 전대를 편성하여 전쟁 준비를 갖추게 했다. 윌리엄 베인브리지 대장이 지휘하는 전대는 보스턴 항구로, 스티븐 디케이터 대장이 지휘하는 전대는 뉴욕 항으로 집결했다. 디케이터의 전대가 먼저 준비를 마치고, 5월 20일에 출항했다.

이 전대는 기함인 프리깃USS 게리에르〉(대포 44문 탑재, 윌리엄 루이스 함장), 〈USS 컨스텔레이션〉(대포 36문 탑재, 찰스 고든 함장), 〈HMS 마케도니아〉 (대포 38문 탑재, 제이콥 존스 함장) 슬루프 전선 〈에페리〉(대포 16문 탑재, 존 다운스 함장)와 〈온타리오〉 (대포 16문 탑재, 제시 D. 엘리엇 함장), 브리그 〈파이어 플라이〉(대포 14문 탑재, 조지 W. 코쟈즈 함장 ), 〈스파크〉(대포 14 문 탑재, 토마스 갬블 함장), 〈플래임보〉(대포 14문 탑재, 존 B 니콜슨 함장), 스쿠너선인 〈토치〉(대포 12문 탑재, 월콧 숀시 함장)와 〈스핏파이어〉 (대포 12문 탑재, 알렉산더 J. 댈러스 함장) 총 10함에서 구성되어 있었다.

베인브리지의 전대 준비가 늦어져 7월 1일에 출항했기 때문에 전쟁에 늦어지게 되었다.

협상

디케이터와 알제의 파샤, 1881년 작품

디케이터 전대는 지브롤터를 출발하여 알제리 방향으로 향하다가 알제리의 기함인 〈메슈다〉(Meshuda)와 마주쳐 가타 곶 해전을 통해 메슈다를 나포하였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파로스 곶 해전에서 알제리의 브리그함 〈에스테디오〉(Estedio)도 나포하게 된다. 6월 마지막 주에 전대는 알제리 항구에 도착하여, 알제리의 파샤인 데이와 협상을 시작했다. 도시를 파괴하겠다는 위협과 함께 지금까지 손해를 보상하라고 끈질기게 요구한 결과 알제리의 파샤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1815년 7월 3일 알제리 만 게리에르 함상에서 체결된 조약에 따라 디케이터는 붙잡고 있던 메슈다와 에스테디오를 반환하고 알제리 측은 약 10명으로 추산되는 미국인 포로 전원을 석방하였으며, 포로로 붙잡힌 상당수의 유럽인들은 1만 달러의 지불를 지불하고[출처 필요], 파샤의 국민 500여명과 교환하였다.[1]

이 협약을 통해 향후 통행세를 지불을 면제할 것을 보장하고[2], 완전한 미국의 항해권을 인정했다.

전후

1816년 초, 영국은 소형 전열함 전대로 외교사절단을 튀니스, 트리폴리, 알제리에 파견하여 파샤에게 해적 행위를 중지하고, 기독교도 노예를 석방하도록 설득했다. 튀니스와 트리폴리의 파샤는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동의를 했지만, 알제리의 파샤는 반항적이었으며, 협상은 위기를 맞았다. 외교사절단 단장인 초대 엑스머스 자작 에드워드 펠루는 기독교도의 노예화를 중지한 조약을 협상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러나 명령의 혼란 때문에 알제리의 병력이 코르시카, 시칠리아, 사르데냐의 어부 200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섬은 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영국의 보호 하에 있었다. 이것으로 영국과 유럽 국가를 격노시켰으며, 엑스머스 자작의 협상은 실패로 간주되게 된다.

그 결과, 엑스머스 자작은 다시 그 임무를 완수하고 알제리 대해 징계를 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엑스머스는 전열함 5척에 많은 호위함으로 강화된 전대를 편성하고, 이후 네덜란드 함선 6척의 지원을 받았다. 협상이 일단 실패한 후 1816년 8월 27일 함대는 알제리 마을에 9시간 이상 징벌을 목적으로 함포 사격을 퍼부었다. 이 공격으로 파샤의 해적이나 해안 포대의 대부분이 무력화되었고, 결국 그 전날 거부했던 조건으로 협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엑스머스는 알제리 측이 조건을 수락하지 않으면 공격을 계속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알제리의 파샤는 엑스머스의 허세에 속아 조건을 받아 들였다. 사실, 엑스머스의 함대는 이미 포탄을 다 소진한 상태였다.

1816년 9월 24일에 조약이 조인되었다. 1,083명의 기독교인 노예가 해방되었고, 영국 영사도 석방되었다. 미국이 납부한 몸값도 반환되었다.

제1차 바르바리 전쟁 후에, 유럽 국가들은 서로 전쟁에 몰두하고 있었다. 미국도 영국과 싸웠다. 그러나 제2차 바바리 전쟁 후에는 유럽에서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유럽 국가는 군사력을 높이고 지중해에서 방해받지 않고 바바리 국가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알제리는 1830년에, 튀니스1881년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트리폴리1835년오스만 제국의 통치 하에 돌려보냈다. 1911년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여 권력의 공백이 생기자 이 시기를 이용한 이탈리아는 트리폴리를 손에 넣었다. 유럽 ​​열강은 20세기 중반까지 북아프리카 동부를 계속 지배했다. 19세기 기갑함 시대부터 20세기 초기의 드레드노트급 전함 시대로 넘어가면서 유럽 열강은 지중해 지배를 확고히 했다.

주석

  1. "the United States according to the usages of civilized nations requiring no ransom for the excess of prisoners in their favor." Article3.
  2. "It is distinctly understood between the Contracting parties, that no tribute either as biennial presents, or under any other form or name whatever, shall ever be required by the Dey and Regency of Algiers from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on any pretext whatever." Article 2.

참고 자료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