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방 (14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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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방 (1466년)
출생1466년
조선 강원도 강릉부
사망1537년
조선
사인병사(풍증, 이질, 소갈 등)
거주지조선
성별남성
국적조선
별칭자는 자화(子華)
학력1489년(성종 20년) 무과 급제
직업무신, 정치인, 군인, 외교관
종교유교 (성리학)
부모아버지 이광식, 어머니 양천허씨
배우자청송심씨
자녀아들 이광식
친척동생 이지영, 조카 이형손, 매부 정현조, 이오, 당숙 이수형, 사돈 정인지, 사돈 정숭조, 사돈 윤지임, 사돈 윤원형, 윤원로
이지방(李之芳)
별명 자는 자화(子華)
출생지 조선 강원도 강릉부
사망지 조선
복무 조선
복무기간 1489년 ~ 1531년
최종계급 병마절도사
지휘 조선 육군, 수군
주요 참전 1491년 북정부원수 이계동의 군관(軍官)으로 출정
기타 이력 1489년(성종 20년) 무과(武科)에 급제

이지방(李之芳, 1466 - 1537)은 조선시대 중기의 무신, 정치인, 군인이자 외교관이다. 본관은 우계(羽溪)이고 자는 자화(子華)이다. 과거 급제 후 평안도병마절도사와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등을 지냈으며 여진족을 토벌하였다. 변방 군사를 거느리고 오랑캐를 친 공으로 귀하게 되었다.[1]

1489년(성종 20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과 종성, 회령의 부사를 역임했으나 연산군의 비위 사실을 잘 안다는 이유로 한때 파면당하였다. 그 뒤 의주목사로 재직 중에는 상중에 반인을 때려죽였다 하여 다시 파면당하기도 했다. 이후 복직, 1517년 11월에는 문정왕후의 책봉 주청사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1518년부터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하며 변방에 출몰하는 여진족 및 야인들과 교전하였으며, 1524년에는 삼둔의 야인을 구축할 것을 건의했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1528년 명나라효결숙황후 상 때 진향사로 파견되었다가 발병을 통고하고 되돌아왔으나, 무단히 되돌아왔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

1518년(중종 13) 4월 정조사로 북경을 방문 중일 때 대명회통을 구입하여 조선으로 가지고 왔다.[2] 이성계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되어있다는 소문이 조선에 확산되었으나 그가 대명회통을 구입해옴으로서 사실로 밝혀졌고 조선 조정은 종계변무에 힘을 쏟는다. 이광식(李光軾)의 아버지이며, 도촌 이수형의 5촌 조카가 된다. 강원도 출신.

생애

생애 초반

출생과 가계

이지방(李之芳)은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선무랑 목청전직, 충찬위를 역임한 이징과 양천허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인은 봉사 심안신의 딸 청송심씨로, 처조부는 망세당 심선이었다. 그의 누이 중 한명은 정인지의 아들인 하성위 정현조의 후처가 되었고[3], 남동생은 이지영이다. 딸 중 한명은 윤확에게 출가했는데 그는 윤지임의 5촌 조카였으며, 손녀딸 한 명은 다시 윤지임의 손자이자 윤원개의 아들 윤강에게 출가했다.

또한 족보상에는 등장하지 않아 촌수 확인이 어려우나 내시로 있던 친척도 존재하였다. 그의 당숙 이수형세조의 찬탈에 반발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으나 그는 무과에 입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초기 활동

1489년(조선성종 20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1491년 여진족 토벌 당시 북정부원수 이계동의 군관(軍官)으로 출정하였다. 이때 여진족 수급 5구를 베어오기도 했다.

1496년(연산군 2)에 무사 장정(張珽)·이원종(李元宗) 등과 함께 서정장수(西征將帥)에 임명되었다. 변방에는 오가작통법이 시행되지 않았는데 1503년(연산군 9년) 1월 28일 이지방은 변방에도 5가 혹은 10가를 일통으로 하고 매 통에 통장 혹은 호수를 두는 제도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4]

후에 종성·회령의 부사 등을 지내다가 1505년에는 연산군의 내관과 족친이라는 이유로 파직당했다. 실록에 의하면 '연산군은 내관의 족친인 종성 부사 李之芳 등 을 파직 하였다. 이것은 왕의 더러운 행실과 악한 덕이 누설 될까 두려워 하여 , 관직 이 있는 족친 을 모두 먼 지방으로 쫓아내었다 (「燕山君 日記」권 58 , 11년 7월 기축).[5]' 한다.

1509년 의주목사로 있을 때 어머니 양천허씨의 3년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그러나 1511년 3년상 상중에 반인을 타살했다가 양사로부터 탄핵당하고 파직, 의금부에 투옥당했다. 이어 사헌부가 율에 의해서 단죄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보석금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중종이 무마시켰다. 그 뒤 1513년 양사의 거듭된 반대에도 복관되어 다시 의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1515년 무렵까지도 계속 상중에 살인한 이유로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516년(중종 11년) 1월 경상좌도수군절도사로 부임했다가 그해 9월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관료 생활

명나라 파견과 대명회통

이듬해 11월 왕비 윤씨(尹氏, 문정왕후)의 책봉에 대한 주청사가 명나라에 파견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정조사 겸 왕비책봉 주청사, 종계변무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종계변무 허락은 받지 못하고, 왕비 책봉 승인만 받게 되었다.

1518년(중종 13) 4월에 북경을 방문한 정조사(正朝使) 이지방은 대명회전을 구입하여 조선으로 가지고 왔다.[2] 이지방 등은 4월 4일에 왕비 책봉 승인을 받아 회국하면서 정덕회전(正德會典)을 국내로 반입한다.

그런데 그가 구입해 온 대명회전 에는'조선의 태조가 이인임(李仁任)의 후예로 고려의 네 왕을 弑害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어 양국 간의 중요한 외교 현안이 되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대명회전 의 왜곡된 기록을 바로잡기 위해 활발한 외교 활동을 벌였는데, ‘宗系辨誣’라 불리는 조선의 외교활동은 1588년(선조 21)에 조선의 요구가 반영된 만력본 대명회전 을 가지고 종묘에 고유제(告由祭)를 올릴 때까지 계속되었다.[2]

그는 그동안 소문으로만 돌던 대명회통이성계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됐다하더라 는 소문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조선 정부는 이 사건이 마무리되기까지 70년 동안 총 16차에 걸쳐 대명회전 의 수정을 요청했는데, 명나라가 가정본과 만력본 대명회전 을 편찬할 때마다 사신을 파견하여 내용을 일일이 확인했다.[2] 그해 4월 4일 북경을 출발, 귀국하였다.

여진족 토벌

1518년 회령성(會寧城) 밑에 있는 야인(野人 여진족) 속고내(束古乃)가 몰래 먼 곳에 있는 야인들과 함께 갑산부(甲山府)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많이 약탈해갔다.[6] 이에 남도 병사(南道兵使)가 비밀리 장계를 올렸다. [6] 임금이 명하여 세 정승과 해당되는 조(曹)를 불러 이것을 의논하고 먼저 본도(本道)에 밀지(密旨)를 내리고 또 무기를 보내 이지방을 파견하여 틈을 엿보아 법에 따라 처치하려고 하였다.[6]

병조판서 유담년은 구체적인 계책을 제시했다.[7] 그가 구체적 계책을 제시하자 중종은 적임자를 거론하였고, 유담년이 그를 천거하였다.

  • 중종 : 좋은 생각이오. 그러면 누구를 보내면 가히 일을 성취시킬 수 있겠소?
  • 유담년 : 장군 이지방이 적임자인 줄로 아옵니다.[7]

중종이 이지방을 명하여 특별히 어의(御衣)와 활과 화살을 주며 그날로 떠나게 하고,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전송의 연회를 베풀었는데, 승지 김정국(金正國)이 아뢰기를, “부제학 조광조가 입대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곧 윤허하였다.[8] 조광조가 나아가 아뢰기를, “이것은 곧 도적이 기미를 노려 속임수를 쓰는 모의와 같습니다. 당당한 대 조정으로써 한 일개 조그만 추한 오랑캐 때문에 도적의 모의를 행한다는 것을 신은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합니다.” 하니, 임금이 중의를 물리치고 파견할 것을 철회해버렸다.[8] 이에 병조판서가 반발했다. "밭을 가는 일은 남자 종에게 묻고, 베 짜는 일은 계집종에게 묻는다고 했다. 나는 젊어서부터 북방에 출입하여 오랑캐의 실정을 잘 알고 있다. 조광조는 세상물정을 모르는 선비다. 논리는 그럴듯하지만 있을 수 없는 것이다."[9] 논란이 거듭되었고 찬반 의견이 맞섰다. 그렇지만 중종은 조광조를 신임하고 있었다. 조광조의 손을 들어줬다.[9]

변경 수비 활동

1522년 5월에는 만포 첨사(滿浦僉使) 반석평(潘碩枰)의 휴가를 허락하고 우후(虞候) 허광필(許光弼)은 면천(沔川)의 집으로 보냈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당하기도 했다. 1523년 3월 허물어진 의주성의 복구를 청하였으나, 복구 인원 동원의 어려움을 청하였다. 이후 계속 의주성의 중건을 청하였다가 탄핵당하였다.

1523년(중종 18년) 윤 4월에 평안도 병사 이지방이 계문(啓聞)한 여연 · 무창 지방 야인의 驅逐事를 비변사 당상 고형산 등 이 중대한 사안이어서 비변사에서 결정할 수 없으니 정부와 함께 논의하자고 요구하자, 중종 은 매사 마다 정부와 동의할 필요 없이 대책을 마련하여 정부에 보고하고 정부 에서는 그 시행에 대한 가부만을 결정토록 지시했다.[10] 그해 5월에는 경차관(敬差官) 이환(李草+丸) 등과 함께 여연(閭延)·무창(茂昌)의 지형(地形)을 그려 올렸다.

1523년(중종 18년) 12월 평안도 절도사로 왕명을 받고 여연(閭延)의 야인(野人)을 내쫓게 하였다.[11] 이에 앞서 야인 김아(金阿), 송가(宋可) 등이 부령(富寧)으로부터 여연, 무창(茂昌)으로 옮겨와 살면서 땅을 개간하고 성책(城柵)을 설치하여 점차 제어하기 어려운 형세가 되었다. 변신(邊臣)이 군사를 내어 내쫓기를 청하자 중종이 조정 신하에게 논의할 것을 명하였는데, 비변사 당상 고형산(高荊山) 등이 일찌감치 도모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중종이 경차관(敬差官) 이환(李芄) 등을 파견하여 가서 오랑캐의 정세를 살피고 오도록 하였는데, 이환 등이 돌아와 변신이 말한 대로 아뢰었다. 마침내 함경도 순변사 조윤손(曺潤孫), 관찰사 허굉(許硡), 남도 절도사 반석평(潘碩枰), 평안도 관찰사 김극성(金克成) 및 이지방 등에게 하유하였다.[11]

주성합(主成哈) 등이 일찍이 우리에게 귀순하였으므로 무창의 강 건너편에 거주하도록 허락하여 국가의 울타리로 삼았는데, 저 오랑캐가 우리의 은혜를 생각지 않고 다른 종족들을 끌어들여 강 연안에 줄지어 거주하여 부락이 갈수록 늘어났다. 누차 유시하여 멀리 물리치라고 했는데도 도리어 가증스러운 말을 함부로 하니, 이때를 놓치고 도모하지 않는다면 훗날 계책을 세우기 어려울 것이다. 실로 그렇지 않다면 어찌 차마 우리 백성들을 몰아 위험한 지역으로 내보내겠는가. 경들은 사졸들과 더불어 나의 뜻을 잘 새기도록 하라.[11]

이어 중종으로부터 모의(毛衣), 궁시(弓矢), 고건(櫜鞬)을 하사받았다.[11] 1524년 1월에는 변방으로 쳐들어온 여진족과 교전하였다가 패하여 양사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1524년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할 때에 삼둔(三屯)의 야인을 구축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오히려 대간과 의금부에서 탄핵되어 파직당하였다. 그해에 다시 복직되었다.

생애 후반

1528년에는 명나라의 황후인 효결숙황후 진씨(孝潔肅皇后 陳氏)가 죽자 진위사(陳慰使) 이봉(李芃)과 함께 진향사(進香使)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가던 도중에 행산역(杏山驛)에서 발병하여 의주목사에게 통보하고 되돌아왔다. 그러나 대국을 섬기는 예를 행함에 있어 무단히 돌아왔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장 1백대에 파면이 내려졌으나, 보속으로 장 1백대는 면하고 충청도 남포에 유배되었다.

1529년 5월 명나라 선례통사 이순종(李順宗)이 조선에 방문, 명나라 황제의 친서와 선물을 전달받았다. 이때 선물 받을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대간와 양사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허용하였다.

1530년 3월 며느리 함안이씨가 상소를 올려 시아버지 이지방에게 지병인 소갈병이 있고, 아들인 이광식은 원지에 외직으로 부임해 있어 봉양할 수 없음을 들어 유배지를 옮겨줄 것을 청하여 다시 충청도 수안(遂安)으로 이배되었다. 병으로 돌아온 것이 밝혀지자 풀려나온 뒤 1531년(중종 26년) 7월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 뒤 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

1536년(중종 31년) 6월 공회에 불참하였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사후

묘는 경기도 성남시 대장동에 안장되었다.

평가

중종조에 여러 번 북문 수위로 있었으며, 야인들을 누차 첩승을 거두어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경외하며 따랐다. 중종 때인 1518년 변방을 정벌하는 야인 속길(束吉)을 정벌하기 위해 이지방을 초토사(招討使)에 임명하자 조광조(趙光祖)가 속임수가 있을 것이라며 극력 저지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팔도병사(八道兵使)를 역임하면서도 집에는 재산이 없이 청렴하였다.

작품

  • 閭延茂昌形勢圖

가계

  • 증조부 : 이인숙(李人淑)
  • 증조모 : 해주오씨(海州吳氏), 지인천군사 오부(吳溥)의 딸, 검교좌정승 이성중의 외손녀
    • 종조부 : 이경창(李璟昌)
    • 종조모 : 순흥안씨(順興安氏), 직제학 증 좌참찬 안구(安璣)의 딸, 안지귀(安知歸)의 누이
      • 당숙 : 이수형(李秀亨)
      • 종조부 : 이경생(李景生), 사정(司正)
      • 종조부 : 이경화(李景華), 사과(司果)
    • 할아버지 : 이경연(李景衍, 다른 이름은 경행(景行))
    • 할머니 : 의령남씨, 남숙문(南叔文)의 딸, 남을진의 증손녀
      • 숙부 : 이숭(李崇)
      • 아버지 : 이징(李徵)
      • 어머니 : 양천 허씨(? - 1509년 2월 2일)
        • 누이 : 이씨, 하동인 하성부원군 정현조(鄭顯祖)의 계비
        • 누이 : 이씨, 광주인 이오(李晤)의 비
          • 외조카 : 이사종(李嗣宗)
        • 동생 : 이지영(李之英)
          • 조카 : 이형손(李亨遜)
        • 부인 : 정부인 청송심씨(淸松沈氏, 1469년~1540년)
          • 장녀 : 우계이씨
        • 사위 : 원주인 변안(邊晏)
        • 장남 : 이광식(李光軾, 1493년(성종 23년) 음력 9월 29일 ~ 1563년(명종 18년) 음력 12월 1일)
        • 자부 : 함안이씨, 정국공신 평안도관찰사 이세응(李世應)의 딸
          • 손자 : 이계변(李繼邊)
          • 손녀 : 우계이씨
          • 손서 : 파평인 윤강(尹綱), 윤원개(尹元凱)의 아들, 윤지임(尹之任)의 손자
          • 손자 : 이감(李戡, 1516년 ~ 1583년) - 송곡 이서우의 고조부
          • 손부 : 풍천임씨, 좌참찬 정헌공 임권(任權)의 딸, 소간공 임유겸(任由謙)의 손녀
          • 손부 : 예천윤씨, 윤연수(尹延壽)의 딸
          • 손자 : 이전(李晉+戈, 1517년 ~ ?) - 충장공 이복남(李福男)의 할아버지
          • 손녀 : 우계이씨
          • 손서 : 신호(申濩)
          • 손녀 : 우계이씨
          • 손서 : 이춘림(李春林)
          • 손자 : 이용(李庸+戈, 1533년 ~ 1591년)
          • 손부 : 칠원윤씨, 증 좌찬성 귀원군 윤이(尹伊)의 딸, 윤탁연(尹卓然)의 누이[12]
          • 손부 : 여산송씨, 동지중추부사 송맹경(宋孟璟)의 딸[12]
        • 장녀 : 우계이씨
        • 사위 : 윤확(尹確), 본관은 파평, 윤번(尹璠)의 후손으로 윤사흔의 4대손(尹士昕), 윤계겸(尹繼謙)의 증손
  • 외할아버지 : 허적(許迪) - 양천허씨, 사인,사헌부장령 역임
  • 장인 : 심선(沈璿, 호는 망세당)
  • 장인 : 심안신(沈安信, 봉사)
    • 처남 : 심관(沈灌)
    • 처남 : 심홍(沈洪)
    • 제부 : 남세담
    • 제부 : 홍부

기타

1518년말 이지방을 방어사로 삼았다가 곧 파직하고 보내지 않았다. 처음에 야인(野人) 속고내(速古乃)가 겉으로는 우리나라를 섬기는 척하면서 속으로 딴마음을 품고 여러 야인 부락들과 몰래 모의하고 결탁하여 갑산부(甲山府)를 침범하여 사람과 가축을 상당수 잡아가지고 갔다. 변장(邊將)이 체포하려고 하자 속고내가 이름을 바꾸고 남도(南道)에 출몰하였다. 병사(兵使)가 군대를 내어 불시에 체포하기를 청하니, 상이 삼공 및 지변 재상(知邊宰相)을 불러 의논하였는데, 모두 아뢰기를,“지금 통절히 징계하지 않으면 후에 장차 더욱 날뛰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마침내 이지방을 파견하기로 하고, 또 본도에 비밀리에 하유하여 몰래 군사와 무기를 보내어 불시에 체포하게 하였다. 출발하기에 앞서 상이 선정전에 나아가 이지방에게 잔치를 베풀어주고 궁시(弓矢)와 갑옷을 하사하였다. 장수와 재상, 여러 신하들이 좌우에서 둘러싼 채 시위하고 있을 적에 부제학 조광조가 청대하여 아뢰기를,“이 일은 옳지 못한 속임수로써, 왕자(王者)가 오랑캐를 막는 도리가 아닙니다. 어찌 당당한 조정에서 볼품 없는 작은 오랑캐 때문에 도둑과 같은 계책을 쓴단 말입니까. 신은 삼가 부끄럽게 생각합니다.”하니, 이에 상이 다시 논의하도록 명하고 보내지 않았다.[13]

좌우가 번갈아가며 간하기를,“병법(兵法)에는 기발한 방법과 바른 방법이 있으며, 적을 막는 데는 상도(常道)와 권도(權道)가 있는 법입니다. 지금 여러 사람들의 논의가 모두 일치하였으니,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유담년(柳聃年)이 아뢰기를,“밭을 가는 일은 머슴에게 물어야 하고 길쌈하는 일은 계집종에게 물어야 합니다. 신이 젊어서부터 북문(北門)에 출입하여 오랑캐의 정상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실정에 어두운 저 유자(儒者)의 말은 예로부터 이러했으니, 지금 묘당의 방침이 이미 정해진 마당에 갑자기 변경해서는 안 됩니다.”하였으나, 상이 끝내 듣지 않고 이지방이 가는 일을 그만두게 하였다.[13]

관련 항목

주석

  1. 〈구묘문(丘墓文) 첨정 이공의 묘갈명〉 허목, 《미수기언》 제20권(민족문화추진회, 1978)
  2. 김문식, 〈조선시대 國家典禮書의 편찬 양상〉, 한국학중앙연구원, 《藏書閣 제21집》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87페이지
  3. 또한 정현조의 동생 정숭조의 증손녀는 그의 고손자 이길남과 결혼한다.
  4. 경향신문 1947년 1월 28일자 1면, "금일"(今日)
  5. 장희흥,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 (경인문화사, 2006) 176페이지
  6. 이황,《퇴계문선》 (한국고전번역원 역, 두산동아, 2010) 801페이지
  7. 신봉승, 《조선왕조 500년:12. 조광조의 죽음》 (금성출판사, 2010) 104페이지
  8. 〈해동잡록 1, 본조 조광조〉《국역 대동야승》
  9. 조광조의 '대외정책' 데일리안 2006.07.21
  10. 이재철, 《조선후기 비변사연구》 (집문당, 2001) 27페이지
  11. 《국조보감 제20권》 중종조 3, 중종 18년(계미, 1523)
  12. 윤탁연은 송맹경의 딸과 결혼하였으므로 이중 인척간이었다.
  13. 《국조보감 제19권》 중종조 2, 중종 13년(무인, 1518)

참고 문헌

  • 연산군 일기
  • 중종실록
  • 대동야승
  • 국조보감
  • 연려실기술
  • 증수임영지

관련 서적

  • 강릉문화원, 《강릉시사》 (강릉문화원, 1996)
  • 강릉문화원, 《증수임영지》 (강릉문화원 국역, 1997)
  • 박도식 편, 《강릉의 역사인물 자료집》(강릉문화원, 2003)
  • 백산학회, 《백산학보 14호》 (백산학회, 1973) 116페이지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