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쿠 다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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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쿠 다 가마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 ['vaʃku dɐ 'gɐmɐ], 1460년 또는 1469년~1524년 12월 24일)는 포르투갈의 항해자이며 탐험가다. 1497년~99년, 1502년~03년, 1524년 3차례에 걸쳐 인도로 항해했다. 유럽에서 아프리카 남해안을 거쳐 인도까지 항해한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때때로 인도까지의 항로를 최초로 발견한 유럽인으로도 불리고 있다. 이 인도 항로의 개척으로 인해 포르투갈 해상 제국의 기초가 다져졌다.

생애

바스쿠 다 가마는 1460년이나 1469년 포르투갈의 남서부 알렌테주 지방에 위치한 시네스(Sines)에서 지역 사령관이었던 이스테방 다 가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바스쿠 다 가마의 아버지는 1460년 비제우 동 페르난두공 가문의 기사였으며, 시네스의 시민 통치자(Alcaide-Mór)로 지역의 비누 생산에 대한 징수권을 가지고 있었다. 바스쿠 다 가마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으며, 내륙도시 에보라에서 수학과 항해술을 배웠으며 천문학을 잘 이해했고 저명한 천문학자인 아브라앙 자쿠투(Abraham Zacuto)에게 수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492년 포르투갈주앙 2세는 평화시 포르투갈 선박에 대한 약탈 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다 가마를 리스본 남쪽의 세투발 항구에서 출발해 포르투갈의 최남단 알가르브 지방으로 보내어 프랑스 배들을 나포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다 가마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카스티야와의 전쟁에도 종군하였으며 선원으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 및 엔히크 왕자의 뜻을 이어 항로 발견을 시도하였다. 1497년 4척으로 된 탐험대는 리스본을 떠나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다음해 5월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하였다. 이 항로는 '인도 항로'라 불리며 유럽인이 아시아에서 활약하는 데 큰 발판이 되었다. 후에 인도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인도 총독이 되었다.[1]

제1차 항해

바스쿠 다 가마의 첫 번째 항해

1497년 7월 8일 4척의 선대(船隊)와 170명의 선원을 인솔하고 리스본을 출범하였다.

상 가브리엘(São Gabriel)호
바스쿠 다 가마 지휘. 178톤급 카락(carrack). 길이 27m, 폭 8.5m, 흘수(吃水) 2.3m, 돛넓이 372m2
상 하파엘(São Rafael)호
파울루 다 가마(Paulo da Gama, 바스쿠 다 가마의 남형제)가 지휘. 크기는상 가브리엘호와 비슷.
카라벨 베히우(Caravel Berrio)호
니콜라우 코엘류(Nicolau Coelho)가 지휘. 앞의 두 배보다는 약간 작다. 후에 상 미겔(São Miguel)이라는 새 이름을 얻음.
수송선
이름 모름. 곤살루 누느스(Gonçalo Nunes)가 지휘. 후에 아프리카 동해안의 상 브라자(São Brasa)만에서 버려짐.

도중까지 동행한 디아스의 조언대로, 시에라레온 앞바다에서 대서양을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혁명적 항법(航法)을 써서 약 3개월간 육지와는 떨어진 약 6000마일(9600km)의 원해를 항해하여, 11월 희망봉을 돌아 그해 12월 16일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배를 돌렸던 그레이트 피시(Great Fish) 강을 지났다. 아프리카 대륙 동해안을 북상(北上)하여 모잠비크·몸바사를 통과, 1498년 4월 마린디에 도착하였다. 그의 함대는 1498년 5월 20일 캘리컷(Calicut)에 도착하였다.

귀국행

1498년 8월 29일 인도를 출발하여 1499년 1월 7일 말린디(Malindi)에 도착하였다. 몬순의 영향으로 갈 때는 23일 걸린 인도양 횡단을 올 때에는 132일이나 소요하였다. 이 항해기간 동안 선원의 반을 잃었고, 나머지 선원들도 괴혈병에 시달렸다. 그의 함대 중 2척의 배만 1499년 7월과 8월에 도착하였다. 바스쿠 다 가마는 함대와 떨어져 조금 더 늦은 9월에야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마누엘 1세(Manuel 1)는 그와 그의 형제 자매들에게 "Dom" 이라는 작위를 하사하였고, 그 작위의 세습을 허락하였다. 또한 그에게 "인도양의 제독(Admiral of the Indian Seas)"이라는 명칭도 주었다.

제2차 항해

1502년 2월 12일 바스쿠 다 가마는 20척의 군함을 이끌고 인도로 향한다. 이는 그가 첫 항해 후 남겨두고 온 포르투갈인들이 살해당한 것에 대한 보복성 조치였다. 그는 인도 북부에서 메카에서 돌아오는 아랍 상선인 miri호를 잡아, 타고 있는 상인들과 함께 불태워 버렸다. 그 외에도 그의 함대는 아랍 상인들의 배를 상대로 해적질을 했으며 캘리컷에서 29척의 아랍 함대를 격퇴시킨다. 이를 계기로 1502년 10월 30일 Zamorin과 쉽게 무역 협정을 맺는다. 함대는 1503년 7월 귀국한다.

제3차 항해

1519년 그는 왕가의 피가 안 섞인 사람 중 최초로 Count of Vidigueira 가 되어 백작 작위(count)를 받았다. 1524년 인도 통치를 담당하는 Eduardo de Munezes의 무능함으로 인해 그를 대신하기 위해 바스쿠 다 가마가 파견된다. 하지만 고아(Goa)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1524년 12월 24일 코친(Cochin)에서 숨을 거둔다.

비판

바스쿠 다 가마가 캘리컷 토후와 전투를 일으킨 것은 탐험 지역 원주민들의 문화를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므로, 이런 점을 비판하는 의견들이 존재한다.[2]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해 500주년 행사를 인도 정부와 포르투갈 정부가 추진하였다. 그러나 인도 국민들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극우에서부터 극좌에 이르기까지 바스쿠 다 가마는 식민 지배를 가져온 장본인이라고 한 목소리를 내었다.[3][4]

주석

  1.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2. 《판타지 라이브러리》 제32권 〈대항해시대〉
  3. Explorer or Exploiter? Rediff On The Net - www.rediff.com
  4. Indians say no to Vasco da Gama, B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