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한국프로야구 포스트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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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한국프로야구 포스트시즌은 10월 7일부터 10월 28일까지 열렸다.

준플레이오프[편집]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삼성 라이온즈와 빙그레 이글스가 맞붙었고 빙그레는 한화(당시 빙그레) 재단인 북일고 감독을 역임했던[1] 김영덕1988년 빙그레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강병철이 수석코치를 맡았으며 이 과정에서 그 해(1990년) 소위 '종신감독 파동' 등[2] 북일파와 비북일파 사이의 갈등이 있었고 이 탓인지 시즌에는 페넌트레이스 1위를 달렸다가 후반기에 페이스가 떨어진 데다 주전 유격수 장종훈의 어깨 부상 때문에 2패로 탈락했는데 장종훈은 1차전 대타로만 출전했으며 장종훈 외에도 이정훈[3] 타자 쪽에서 부상 선수가 많았다.

1차전[편집]

1 2 3 4 5 6 7 8 9 R H E
삼성 라이온즈 0 0 0 0 0 0 2 0 0 2 9 0
빙그레 이글스 0 0 0 0 0 0 0 0 0 0 7 0
승리 투수: 성준  패전 투수: 송진우  세이브: 김상엽
홈런:  삼성이만수(7회 솔로)

2차전[편집]

10월 7일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1 2 3 4 5 6 7 8 9 R H E
빙그레 이글스 0 2 0 0 0 0 2 0 0 4 5 1
삼성 라이온즈 0 0 1 0 1 0 1 0 2x 5 6 0
승리 투수: 김성길  패전 투수: 한희민
홈런:  삼성강영수(5회 솔로), 김용철(7회 솔로/9회 솔로), 이만수(9회 솔로)

삼성 라이온즈2승으로 플레이오프 진출

플레이오프[편집]

플레이오프에 오른 삼성은 해태와 87년 KS 이후 포스트 시즌에서 3년 만에 재대결을 가졌는데 지방팀끼리의 3년 연속 플레이오프 격돌이었으며 만약 4차전까지 두 팀이 3승을 거두지 못하면 5차전을 잠실에서 개최할 예정이었으나[4] 88~89년에 이어 3연승으로 마무리(88년 빙그레, 89년 해태, 90년 삼성)되는 바람에 좌절됐는데 해태는 큰경기에 강하다는 막연한 자신감에 도취되어 경기를 이틀 앞두고도 유흥가를 얼씬거린 데다[5] 3경기 모두 구원투수 투입에 실패한 것 외에도[6] 주전들의 부상으로 장타력 등 타선이 많이 약화되어[7] 정규시즌 팀홈런이 78개로 7개 구단 중 3위에 그쳐[8] 3연패했다.

1차전[편집]

1 2 3 4 5 6 7 8 9 R H E
삼성 라이온즈 0 0 0 0 2 0 0 0 2 4 6 1
해태 타이거즈 0 0 0 0 0 1 0 0 0 1 10 0
승리 투수: 이태일  패전 투수: 이강철  세이브: 김성길
홈런:  삼성김용국(5회 투런)  해태한대화(6회 솔로)

2차전[편집]

1 2 3 4 5 6 7 8 9 10 11 R H E
삼성 라이온즈 0 0 0 0 0 0 4 1 2 0 1 8 12 1
해태 타이거즈 1 0 0 0 1 0 0 5 0 0 0 7 11 2
승리 투수: 김상엽  패전 투수: 선동열
홈런:  삼성김용철(9회 투런)  해태김성한(1회 솔로), 장채근(8회 스리런), 홍현우(8회 솔로)

3차전[편집]

1 2 3 4 5 6 7 8 9 R H E
해태 타이거즈 0 0 0 1 1 0 0 0 0 2 6 0
삼성 라이온즈 0 0 1 0 1 3 0 0 X 5 7 1
승리 투수: 김상엽  패전 투수: 이강철
홈런:  해태백인호(5회 솔로)  삼성김용국(5회 솔로)

삼성 라이온즈3승으로 한국시리즈 진출

한국시리즈[편집]

삼성은 포스트시즌에서 빙그레와 해태를 5연승으로 제압하며 창단 첫해 우승을 노리던 재계 라이벌 LG 트윈스와 한국시리즈에서 대결한다. 그러나 정작 한국시리즈에서는 그동안의 상승세가 무기력하게 4연패를 당하며 허무하게 무너졌는데 정동진 삼성 감독은 한국시리즈에서 4연패를 당한 데다 사생활 문제로 물의를 일으켰던 황규봉 1군 투수코치의 2군행을 요구한 편송언 사장과의 마찰 탓인지[9] 계약기간을 1년 남겨둔 채[10] 1990년 시즌 후 삼성의 감독직에서 물러났으며 황규봉 코치는 1989년 말 외국 유학을 떠나면서 구단과 작별했고 그 이후 프로야구계와 인연을 끊었으며 은퇴 후 개인사업을 했지만 잇따른 사업 실패 때문에[11] 가족과의 불화가 겹쳐 부산에서 홀로 지낸 데다 경상중학교 때부터 같이 선수 생활을 한 이선희 외엔 대부분의 야구계 인사들과도 연락을 끊었고 이 와중에 병을 키워 허리가 너무 아파 2015년 11월 중순 병원을 찾은 결과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으며[12] 결국 2016년 1월 18일 별세했는데 황규봉 전 코치의 빈소를 찾은 야구인은 드물기도 했다. 반면 LG는 창단 첫해에 우승하면서 90년대 전성시대의 시작을 알리게 되었다.

각주[편집]

  1. 김배중 (2020년 6월 8일). “‘코끼리’, ‘야신’에 이어 ‘성골’도 못 고친 한화의 무기력증[김배중 기자의 핫코너]”. 동아일보. 2020년 7월 27일에 확인함. 
  2. 권오중 (1990년 10월 18일). "독수리「영구 감독」설로 추락". 중앙일보. 2020년 7월 27일에 확인함. 
  3. “프로야구 "準(준)플레이오프전 향방 첫판에 달렸다" 독수리-사자 내일 격돌”. 동아일보. 1990년 10월 5일. 2020년 9월 9일에 확인함. 
  4. “독수리—사자 플레이 오프전 8일부터 5전3승제 돌입”. 동아일보. 1988년 10월 4일. 2020년 6월 1일에 확인함. 
  5. “三星(삼성) 구단의 꾸준한投資(투자) 결실 해태는 자기도취에 빠져 자멸”. 동아일보. 1990년 10월 17일. 2020년 7월 27일에 확인함. 
  6. “삼성,한국시리즈 진출”. 조선일보. 1990년 10월 17일. 2020년 7월 27일에 확인함. 
  7. 정의길 (1990년 10월 9일). “징크스 깬 사자,호랑이와 멋진한판 예고”. 한겨레신문. 2020년 9월 9일에 확인함. 
  8. 고석태 (1990년 10월 10일). “거포군단-홈런명문 타격대결”. 조선일보. 2020년 9월 9일에 확인함. 
  9. 최영호 (1999년 3월 5일). “[삼성라이온즈18년 .4] 정동진감독”. 영남일보. 2020년 5월 19일에 확인함. 
  10. 최두성 (2011년 10월 3일). “[with 라이온즈 30년] (18) 옷 벗은 감독들”. 매일신문. 2020년 5월 19일에 확인함. 
  11. 권태호 (2016년 1월 20일). “‘원조 불사조’ 삼성 원년 에이스 황규봉 별세”. 한겨레신문. 2020년 5월 19일에 확인함. 
  12. 이재국 (2016년 1월 20일). “삼성 ‘원년 에이스’ 황규봉, 별이 지다”. 스포츠동아. 2020년 5월 19일에 확인함.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