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루쇼프의 반종교 운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책의 시행자 - 니키타 흐루쇼프

흐루쇼프의 반종교 운동(러시아어: Хрущёвская антирелигио́зная кампа́ния; хрущёвские гонения на религию, хрущёвские гонения на Церковь)은 소련의 종교와 전쟁한 시기 중 하나로, 특히 1958-1964년에 절정에 달했다. 이 시기 소련의 최고 지도자는 소련 공산당 제1서기였던 니키타 흐루쇼프로, 대중의 시선에서는 7개년 계획 말, 즉 1965년(몇몇 자료에서는 1975년이나 1980년) "텔레비전에 마지막 교황을 본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는 인물이다.[1][2]

많은 연구자들과 종교계 관계자들은 흐루쇼프의 정책 기간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종교 조직에게 있어 가장 힘든 시기였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3][4][5][6][7]

시행된 원인[편집]

외부 그림
Богослужение в зимнем лесу (Независимая баптистская церковь в Киеве готовится к совершению Вечери Господней.)
Опубликовано в Fundamentalist Journal. — 1989. — July/August. — С. 34

미국 역사학자 발터 사와츠키는 이 정책이 시작된 원인 중 하나가 흐루쇼프의 권력 쟁취과정의 영향이라고 추측한다. 스탈린 개인 숭배 사상을 제거하는 입장에서, 그리고 스탈린의 죽음 후 국가의 지도자로 임명된 입장으로서, 흐루쇼프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경쟁자들을 권력에서 배제해왔고, 유일한 권력이 되자 개인 숭배를 시작한다. 사와츠키는 이것으로 보았을 때 "스탈린이 꾸준히, 묵묵히 이어왔다면, 흐루쇼프는 억제할 수 없는 그의 본성을 '분출'했다"며 이러한 '분출'은 그가 유일한 권력을 지니고 있던 기간, 즉 소련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서 퇴임하는 그 순간까지 계속되었다고 말한다.[8]

정책이 시행된 두번째 이유는 여러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사항으로,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가진다. 1950년대 말 흐루쇼프는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한다는 계획의 구상을 시작한다, 이 구상 속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에서 종교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그는 확신에 찬 공산주의자였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헌신적인 그 모습은 흐루쇼프가 교육과 농촌 정책의 과도하게 밀어붙였던 것을 설명할 뿐 아니라, 정치적 측면에서 종교를 심각하게 공격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종교는 필요없는 물건이자, 대단히 편리한 희생양이 되었다"고 사와츠키는 말한다.[8]

방법[편집]

외부 동영상
Преследование протестантов в послевоенный период
Гимн «Страшно бушует житейское море». Сопровождается фотографиями разрушенных и опечатанных домов молитвы, арестов верующих, тайных богослужений в лесах, семей узников и т. д.

흐루쇼프의 반종교 운동은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 종교계 지도자 압박
  • 프로파간다 운동
  • 종교 조직의 박멸과 예배당의 해체
  • 종교 조직에 부과되는 세금의 과중
  • 신도들에 대한 형사적 기소
  • «기생 생활»을 죄목으로 기소
  • 신도 가정의 자녀 제한

종교계 지도자 압박[편집]

소련 종교 조직의 중앙 기관들은 1930년의 탄압으로 인해 거의 궤멸된 상황이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의 측면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이 종교를 대하는 태도가 유화되었다. 1943년 스탈린의 지령으로 대주교좌 성당(러시아어: Архиерейский собор)이 관구장주교 세르기이를 주교좌에 임명하며 만들어졌으며, 1944년에는 전연방 복음주의 교회-침례교회 회의가 만들어졌다. 이는 복음주의 교회와 침례교의 통합을 관장하는 기관이었다. (이후 오순절주의의 일파로 통합되었다). 전연방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회의 또한 재개되었다. (그러나 이는 1960년 해체되었다.)[9]

적법한 종교계 지도자들은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신자로서 그들은 항상 신자들과 정부의 정치적인 무신론 노선 사이의 균형을 맞춰야 했기 때문이다. 중앙집권적 지도체제의 존재는 한 편으로 교파들이 적법하게 존재할 수 있는 이유였고 과격한 상황 속에서 의미하는 바가 컸다. 다른 한 편으로는 적법한 기관으로 남으려는 시도 속에, 그들은 타협접을 찾아야 했다. 이따금 그 타협점은 너무 멀리 떨어져있기도 했다.

반종교 운동이 시작된 후였던 1959년, 총대주교 알렉세이 1세는 흐루쇼프를 알현하려고 시도했지만 성과가 없었다.[10] 그와 만난 것은 러시아정교회 업무 담당평의회 의장 게오르기 카르포프와 그의 후임자 블라디미르 쿠로예도프였다. 1960년 쿠로예도프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좌의 2인자인 크루티츠키와 콜로멘스키 관구의 관구장주교 니콜라이를 재임 중인 모든 자리에서 해임시키는 작업을 실시했다. 그는 자신의 담당 관구에서 '종교적 사업을 제한'하는 조치에 있어 정권에 협조하는 것을 거부했다.[11]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Степанов 2009.
  2. Курганская 2011.
  3. Рудык.
  4. Загуляев 2012.
  5. Махов 2012.
  6. Рева.
  7. Морозов 2010.
  8. Заватски 1995.
  9. Никольская 2009.
  10. Письма 1994.
  11. Чумаченко Т. А. «Поразила всех нас, как громом, отставка митрополита Николая». Крах одной церковной карьеры // Исторический архив : журнал. — 2008. — № 1. — С. 47—68.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