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스기 요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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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 요잔 / 우에스기 하루노리(일본어: 上杉鷹山, うえすぎ ようざん / 일본어: 上杉治憲, うえすぎ はるのり, 1751년 9월 9일 ~ 1822년 4월 2일)는 일본 에도 시대의 정치가, 다이묘이며, 요네자와 번의 번주이다. 본명인 하루노리보다 은거 후에 쓰기 시작한 법명인 요잔이 더 유명하다.

인물 소개[편집]

아키즈키 다네미쓰(秋月種美)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외할머니가 4대 요네자와 번주인 우에스기 쓰나노리의 딸이었던 인연으로 10세에 8대 요네자와 번주 우에스기 시게사다의 딸 유키(幸)와 결혼하여 서양자(婿養子, 사위를 후계자로 하는 것)가 되었다.

에도 시대 중기엔 지방 재정이 궁핍했던 곳은 주민들이 마을에서 도망치거나, 끼니 걱정으로 태어난 아기를 죽이는 일명 '솎아내기(=마비키:間引き)'까지 자행하는 등 재정 악화를 겪는 번이 많았다.

우에스기 가문의 영지는 우에스기 켄신전국시대에는 120만 석을 자랑하기도 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한 우에스기 카게카츠 대에 대폭 박탈당해 30만 석으로 줄어들었다. 이것도 몇 대 후엔 15만 석으로 줄어들게 되고, 이렇게 몇 대를 이어가던 우에스기 가문에 우에스기 요잔이 양자가 되어 17세 때 가독을 상속받게 된다.

당시 요네자와 번은 과거에 비해 영지가 줄어들었음에도 가신들의 수에는 변화가 별로 없었기에 재정이 어려웠으며, 거기다 8대 번주인 시게사다가 근검절약과는 거리가 먼 사치스런 인물이어서 막부에 15만 석 영지의 반납을 고려할 정도였다. 농사 외에 별다른 생산이 없었기에 흉년 같은 경우에는 뾰족한 대책이 없었고, 주민들 사이에는 끼니를 위해 갓난애를 죽여버리는 풍습도 존재하는 등 당시 번 내에는 여러 문제가 산재해 있었다. 이에 요잔은 스스로 검소한 식사를 하며 솔선수범하였고 다른 번의 기술자를 초빙해 작물 재배를 가르쳐 특산물을 생산하도록 하였다. 가신들의 영지에도 작물을 심도록 하였으며 가신과 농민의 신분을 불문하고 학문을 배우게 하는 등 실용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을 고려해 정치적 기반에도 신경을 썼다.

요잔의 이런 개혁의 성과는 바로 나타나진 않았지만, 35세에 은거해 번주에서 물러나 후견인이 되어서도 지지를 받아 꾸준히 개혁 정책을 추진해 갔다. 은거 시기에 그 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보였고, 요잔 사후에는 번 재정이 막부에서 칭찬할 정도가 되었으며, 주민들의 생활도 나아졌다. 52세에 요잔이란 법명으로 개명하였고, 72세의 나이까지 살았다.

그가 쓴 전국의 사(伝国の辞)란 글은 지방영주로서의 마음가짐을 담은 내용으로, 메이지 유신 때까지 우에스기가의 가훈으로 이어진다.

일화[편집]

미국케네디 전 대통령이 당선된 후 일본 기자들이 가장 존경하는 일본 정치가를 물었을 때 우에스기 요잔이라고 답변했는데, 당시 이 얘기를 들은 일본인들 중에는 요잔이 누군지 몰랐던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많이 연구되어 있고 한국에도 관련 번역서가 나와 있다.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 인물에 관한 도몬 후유지의 소설 '불씨(원제:소설 우에스기 요잔)'를 읽고 감명해서, 청와대 쪽에 이 책이 꽤 보급되었고 시중에도 많이 출판되었다.

2007년 일본 요미우리 신문에서 각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앙케이트 한 결과, 이상적인 리더로서 1위의 인물로 뽑히기도 했다.

한편 친형인 아키즈키 다네시게도 명군으로 꼽힌다.

전 임
우에스기 시게사다
제9대 요네자와 번 번주
1767년 ~ 1785년
후 임
우에스기 하루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