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복
서복(徐福)은 문헌상으로 서복 또는 서불(徐巿)의 이름으로 나타난다.('徐巿'는 '서불'이라고 읽는다. 이하 서불) 서불은 기원전 255년 제나라에서 태어서 진나라의 방사(方士)로 일했다. 그의 생애 동안 불로초를 찾아 동해를 두번 가게 된다.
목차 |
[편집] 개요
BC 221년(시황 26년)에 6국을 복속하고 중국을 천하 통일한 진나라의 진시황제는 불로장생을 위한 영약을 구하기 위해 신하들을 내보내 불로초를 구하러 사방으로 보냈으나 불로초를 구해오지 못했다. 제나라 출신의 서불(徐福)은 자기가 불로초를 구하러 가야 할 차례임을 알고 기원전 219년(시황 28년) 진시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저멀리 바다 건너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의 삼신산(三神山)에 신선이 사는데, 동남동녀를 데리고 가서 모셔오고자 합니다."
-
- 이에 시황은 크게 기뻐하여 동남동녀 수천을 뽑아 그에게 주고 바다로 나가 신선을 찾아오게 하였다. (史記의 秦始皇本紀)
그리하여 기원전 219년에서 210년 사이에 그의 두번에 걸친 여행이 시작된다. 진황도를 떠난 그의 행적은 지금의 한국을 거쳐, 일본까지 폭넓게 이어진다. 그의 여행에는 60척의 배와 5,000명의 일행, 3,000명의 동남동녀와 각각 다른 분야의 장인들이 동반했다고 한다. 기원전 210년 그는 진황도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기록에는 서불이 중국을 떠나 단주(亶洲) 또는 이주(夷洲)에 도달하였다고 나온다. 중국에서 이주(夷洲)는 대만을 가리키며, 단주(亶洲)는 일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의 학자들은 정방폭포의 서불과지(徐福過之)라는 글자를 근거로 단주(亶洲)를 제주도라고 주장하고 있다.[1]
[편집] 서불의 행적
서불의 상소문에 있는 봉래산(蓬萊山)은 금강산이요, 영주산(瀛洲山)은 한라산이다. 분명한 것은 한국의 옛 문헌에도 서불이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갔다는 기록이 나온다는 것이다. 고려 시대 이인로의 《파한집》과 조선 시대 신숙주의 《해동제국기》가 그것이다.[2]
일본에서도 미야자키 현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서불의 흔적이 남아있다.
[편집] 서불 관련 유적
[편집] 우리 문학 속의 서불
- 심청가
- 선상탄(船上歎), 노계집(蘆溪集) 중 박인로의 가사, 1605년(선조)
[편집] 관련 서적
- 太白逸史/ 蘇塗經典本訓
- 사마천의 사기 /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와 회남형산열전(淮南衡山列傳)
- 삼국지(三國志) 오서·오주권전(吳書·吳主權傳)
-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 회남형산열전(淮南衡山列傳)
- 봉선서(封禪書)
- 서복이 한반도에 남긴 유적과 문명의 성과, 이형석(제6회 서복문화 동아세아 국제학술대회, 2007.10.19)
[편집] 주석
- ↑ 이형석 (2007년 10월 19일). 서복이 한반도에 남긴 유적과 문명의 성과. 제6회 서복문화 동아세아 국제학술대회. 2008년 4월 21일에 확인.
- ↑ 김강임. “서불과 동남동녀는 어디로 갔을까?”, 《오마이뉴스》, 2003년 10월 14일 작성. 2008년 4월 21일 확인.
| 이 글은 중국 사람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의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