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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Otheruses 宮本 武蔵(みやもと むさし、天正12年(1584年)? - 正保2年5月19日1645年6月13日))は、江戸時代初期の兵法者であり、また書画でも優れた作品を残している。

概要[편집]

『報讐忠孝伝 宮本武蔵』 歌川国芳

二刀を用いることで有名な二天一流兵法の祖。水墨画家・工芸家としても知られる。名字宮本、また新免通称武蔵本姓藤原玄信(はるのぶ)である。幼名辨助(べんのすけ、弁助、弁之助とも)、二天、また二天道楽。著書『五輪書』の中では新免武蔵守 藤原玄信を名乗っている。

現在、自筆とみなされている有馬直純宛書状・長岡佐渡守宛書状には「宮本武蔵玄信」と記し、長岡佐渡守宛書状には「二天」の号も書いている。熊本市弓削の墓碑は「新免武蔵居士」、養子伊織が武蔵死後9年目に建てた『新免武蔵玄信二天居士碑』(小倉碑文)には「播州赤松末流新免武蔵玄信二天居士」とある。武蔵死後71年目の『本朝武芸小伝』(1716年)で「政名」なる名が紹介された。これを引用した系図や伝記、武蔵供養塔が広く紹介されたことから諱を「政名」とする武蔵の小説、紹介書が多数あるが、二天一流門弟や小倉宮本家の史料に、この「政名」は用いられていない。逆に史的信頼性が完全に否定された武蔵系図等で積極的に用いられていることから「政名」なる諱を否定する意見もある。

京都の兵法家吉岡一門との戦いや巌流島山口県下関市)での試合が、小説、時代劇映画、テレビドラマ(時代劇ドラマ)等の題材になり有名。著書である『五輪書』は、現代も人生哲学書として、あるいは経営、スポーツなどの指導書としても読まれ、日本のみならず翻訳されて世界各地で愛読され影響を与え続けている。国の重要文化財に指定された『鵜図』『枯木鳴鵙図』『紅梅鳩図』他にも『正面達磨図』『盧葉達磨図』『盧雁図屏風』『野馬図』など優れた水墨画・鞍・木刀などの工芸品が現在に伝わっている。

生涯[편집]

生年[편집]

著書『五輪書』の冒頭にある記述「歳つもりて六十」に素直に従えば、寛永20年(1643年)に数え年60歳となり、天正12年(1584年)に生まれた。

출생지[편집]

하리마 국효고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저서 오륜서에는 生国播磨 라고 명기되어 있다.

주 : 에도 시대 후기의 지리서인 도사쿠시(東作誌)에서는 미마사카 국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기재되어 있고, 이를 근거로 미마사카 탄생설이 생겨났다. 이설은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 등에서 채용되어 널리 알려졌다. 소설을 토대로 오카야마현 미마사카시 등에서는 미야모토 무사시 탄생지로써 관광개발을 하고 있다.

생년 및 출생지에 관한 제설[편집]

에도 시대 후기에 정립된 고쿠라 미야모토 가계도(1864년 이전에 양자 이오리의 자손작성) 나란히 무사시를 미야모토 가문 역대 연보의 필두로 둔 《宮本氏正統記》에는 1582년 임오년생, 1645년 향년 64세라고 기록되어 있어 1582년 태생이라고 주장한 의견도 있다.

무사시의 양자 이오리가 무사시 사후 9년째인 1654년에 세운 고쿠라 비문에 따르면 아버지는 병법가인 신멘 무니이다. 동시대에 활약한 도리류(当理流)의 미야모토 무니노스케 후지하라 가즈마와 동일 인물리아는 견해도 있다. 무사시의 양자 이오리가 봉납한 도마리 신사의 표찰에는 〈有作州之顕氏神免者天正之間無嗣而卒于筑前秋月城受遺承家曰武蔵掾玄信〉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로 볼때 덴쇼년간 아카즈키 성에서 죽은 신멘을 무니였고, 무사시는 무니의 양자였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지만, 명백히 신멘 무니는 덴쇼년간 이후에도 생존해 있었다.

무사시의 양자 이오리가 남긴 무사시의 기록은 생전의 무사시를 알고 있는 사람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 비판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원사료가 불명확하고, 이오리가 무사시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에 대해 문제시 보는 견해도 있다. 다른 사료와 비교해 사실을 오인해 적은 것도 밝혀졌다. 또, 무사시를 추켜세우기 위해 각색한 점도 많이 보여진다.

또, 에도 시대 후기에 정립된 고쿠라 미야모토 가계도에서 〈신멘 무니노스케의 양자로 되다.《為新免無二之助養子》〉의 기술을 근거로 무니는 양부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현재 오카야마 현인 미마사카 국의 명문 집안이였던 신멘이라는 성은 무니 시대부터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小倉宮本系図》에는 이오리의 조부 다하라 이에사다의 차남이였지만, 이오리 자신이 봉납한 표찰과 고쿠라 비문에는 그러한 기록이 없다. 또, 무사시와 이오리의 관계를 나타내는 일들을 기재한 에도 시대 중기의 지리서 《하리마카가미》(播磨鑑)에도 무사시가 다하라 가문 출신이라고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주 : 《도사쿠시》(東作誌) 등에서 무사시의 부친을 히라다 무니(平田武仁)라는 설이 유명하지만, 히라다 무니는 무사시가 태어나기 이전에 죽었다. 또, 이들 사료에서는 그 밖의 무사시와 관련된 기술도 타 사료와의 일치되는 점도 전혀 없다. 무사시와 관련된 사료적 가치는 전부 부정되고 있다.

무예가・무사로서의 무사시[편집]

오륜서에는 13세에 처음 아리마 기헤이(有馬喜兵衛)와 결투해 승리하고, 16세에 다지마 국의 아키야마(秋山)라는 무예가와 결투해 승리하는 등 29세이 될때까지 60여회의 승부를 해, 모두 이겼다고 기술하고 있다.

종래 학설에서는 1600년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아버지 무니의 옛주군인 신멘 가문이 우키타 히데이에 슬하에 있어 서군에 참진했다고 말해 왔지만, 아버지 신멘 무니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에 동군의 구로다 가문의 사관이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구로다 가문의 문서가 존재하므로, 아버지와 함께 부젠 국영지를 가진 구로다 요시타카를 따라 동군으로 참진해 규슈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설에 따라 구로다 가의 가신 다치바나 미네히라에 의한 무사시 전기 《헤이호타이소부슈겐신코덴라이》(兵法大祖武州玄信公伝来)에서는 구로다 요시타카의 군에 속해 규슈 분고이시가키바루 전투에서 서군의 오토모 요시무네군과 싸웠으며, 출진 전의 일화와 도미쿠 성 공방전에서의 분전을 적고 있다.

《오륜서》에는 〈스물한살이 되어 서울로 상경을 했고, 천하의 무예가와 만나 수번의 승부에서 승리를 하지 않은 일이 없다〉(廿一歳にして都へ上り、天下の兵法者にあひ、数度の勝負をけつすといへども、勝利を得ざるという事なし)라고 기술하고 있다. 1584년 무사시가 태어났다고 생각하면 1604년의 일이 된다. 천하의 무예가는 고쿠라 비문에 기록된 〈후소다이이치노헤이주쓰 요시오카〉(扶桑第一之兵術吉岡), 즉 요시오카 일족이라고 사료된다. 이 결투는 문예작품 등에서 다양하게 각색되어 널리 알려졌다.

무사시가 했던 결투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간류 섬의 결투〉라고 전해져 오는 것이다. 이는 게이초년간 나가토 국 (현재 야마구치현)의 후나시마 섬에서 사사키 고지로와 결투한 일을 말한다.

1614년 ~ 1615년에 일어난 오사카 전투에서의 무사시는 도요토미 가문측에 속해 참진했다는 것이 통설로 여겨졌지만, 이는 근거없는 속설이다. 실제는 미즈노 나쓰나리의 객장으로 도쿠가와 가문측에 속해 참진했고, 가쓰나리의 적자 가쓰시게와 함께 활약을 했다는 것이 많은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히메지 성혼다 다다토키와 교섭을 가졌고 아카시 지역에서는 도시계획을 했으며 히메지, 아카시 등의 성과 사원에 정원을 조성하였다. 《海上物語》에서는 이 시기 봉술(杖術)에 하나인 신도무소류(神道夢想流)(의 무소 곤노스케(夢想権之助)와 아카시에서 시합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가 기재되어 있는 《니텐키》(二天記)에서는 에도에서 시합한 일이라고 하지만, 니텐키의 원사료인 《부코덴》(武公伝)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겐나 초엽, 미즈노 가신 나카가와 시마노스케의 셋째 아들 미키노스케를 양자로 맞이하였고, 미키노스케를 히메지 성주 혼다 다다토키에게 출사시켰지만, 1626년 혼다 다다토키가 죽자, 순사하였다. 이에 미야모토 가문은 미키노스케의 동생을 그의 후임으로 해 존속시켰지만, 같은 해에 하리마 지역의 무사 다하라 히사미쓰의 둘째 아들 이오리를 새로운 양자로 맏이하였고, 미야모토 이오리를 아카시 성오가사와라 다다자네에게 출사 시켰다. 이오리는 1631년 20세의 나이로 오가사와라 가문의 가로(家老)가 된다.

1638년에 일어난 시마바라의 난에서는 고쿠라 성주로 부임한 오가사와라 다다자네를 따라 이오리도 출진하였고, 무사시도 다다자네의 조카인 나카쓰 성오가사와라 나가쓰구의 후견인으로 하여 출진하였다. 난이 진압된 후에 노베오카 성주인 아리마 나오즈미에게 보낸 무사시의 서찰에는〈拙者も石ニあたりすねたちかね〉라고 반란군의 투석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고 적고 있다. 또, 고쿠라에 머물러 있을 때 오가사와라 다다자네의 명령으로 호조인류 창술(宝蔵院流槍術)의 다카다 요시쓰구와 시합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1640년 구마모토 성주 호소카와 다다토시에게 손님으로 초대되어 구마모토로 가게된다. 7인의 녹봉 18석에 구휼미 300석이 지급되었고, 구마모토 성 동부에 인접한 지바 성에 저택을 주었다. 가로(家老)이상의 신분이 아니면 허가되지 않는 매사냥이 허용되는 등 손님으로써는 파격적인 대우로 맞이 하였다. 같은 손님인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남겨진 아들 아시카가 도칸과 함께 야마가 온천에 초대되는 등 호소카와 다다토시에게 존중받았다. 다음해 다다토시가 죽은 후에도 2대 번주 호소카와 미쓰나오에게도 이전과 같이 매년 300석의 구휼미가 지급되어 빈객으로서의 대우를 받았다. 《부코덴》(武公伝)에는 미야모토의 수제자였던 야마모토 겐고 자에몬(山本源五左衛門)의 말에서 미야모토 무사시의 문하에 1000여명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 무렵 제작된 그림과 공예품 등이 오늘날에 전해져 온 것들이다.

1643년 구마모토 시 근교의 긴보 산(金峰山)에 있는 레이간도(霊巌洞) 동굴에서 《오륜서》의 집필을 시작하였다. 또, 죽기 수일전에는〈자철서〉(自誓書)라고 불리는 《돗코도》(獨行道)와 함께 《오륜서》를 제자 데라오 마고노조에게 주었다.

1645년 6월 13일 지바 성의 저택에서 임종을 맞이하였다. 묘는 구마모토시 유게(弓削)에 있는 통칭 무사시즈카(武蔵塚)이다. 기타큐슈시 다무케 산(手向山)에 양자 미야모토 이오리가 세운 《신멘 다케조 하루노부 니텐 거사비》 통칭 고쿠라 비문이 있다.

무사시의 무예는 엔메이류(円明流)라고 불렸지만, 《오륜서》에서는 니토이치류(二刀一流), 또는 니텐이치류(二天一流) 두가지 명칭이 사용되었고, 최종적으로는 니텐이치류로 되었다고 생각된다. 후세에서는 무사시류(武蔵流) 등의 명칭도 사용되고 있다. 구마모토에 있을 시절 제자 데라오 마고노조, 모토메노스케 형제가 있었고, 히고 구마모토 번에서 니텐이치류 검술이 융성하였다. 또, 마고노조의 제자중 한명인 시바토 산자에몬후쿠오카 번 구로다 가문에 니텐이치류를 전수하였다.

決闘伝説に関する諸説[편집]

요시오카 가문[편집]

《오륜서》에는 21세에 서울로 올라가 천하의 무예가를 만나 수번의 결투를 해서 승리를 얻지 않은 적이 없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1584년 무사시가 태어났다고 생각하면, 1604년의 일이 된다. 천하의 무예가는 고쿠라 비문에 기재된 〈후소다이이치노헤이슈쓰 요시오카〉 즉 요시오카 가문이라고 사료된다.

무사시의 양자 이오리가 1654년에 세운 고쿠라 비분의 기록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무사시는 교토로 올라가 후소다이이치노주쓰의 요시오카와 결투하였다.
  • 처음에 요시오카 가문을 계승한 세이주로와 교토 외각 렌다이노에서 결투하여 목검 일격으로 세이주로를 꺽었다.
  • 予め一撃で勝負を決する約束だったので命を奪わなかった。清十郎の弟子は彼を板にのせて帰り、治療の後、清十郎は回復したが、兵術をやめ出家した。
  • その後、吉岡伝七郎と洛外で戦った。伝七郎の五尺の木刀を、その場で武蔵が奪いそれで撃ち倒した。伝七郎は亡くなった。
  • そこで、吉岡の門弟は秘かに図り、兵術では武蔵に勝てないので、吉岡亦七郎と洛外下松で勝負をするということにして、門下生数百人に弓矢などを持たせ、武蔵を殺害しようとした。武蔵はそのことを知ったが、弟子に傍らから見ているように命じた後、一人で打ち破った。
  • 吉岡は代々将軍家の師範で、「扶桑第一兵術者」の号であった。
  • 足利義昭の時に新免無二を召して吉岡と兵術の試合をさせた。三度の約束で、吉岡が一度、新免が二度勝利した。それにより、新免無二は「日下無双兵法術者」の号を賜った。
  • このこともあって、武蔵は京で吉岡と戦ったのである。
  • この戦いにより、吉岡兵法家は滅び絶えた。

宮本伊織が残した『小倉碑文』などの記録は、他史料と比し事実誤認や武蔵顕彰の為の脚色も多く見られる。吉岡家の記述に限定すれば、武蔵に完敗し引退した清十郎、死亡した伝七郎、洛外下松の事件の記録は他史料になく、創作である可能性を否定する事はできない。また、兵仗弓箭(刀・槍・薙刀などの武具と弓矢)で武装した数百人の武人を相手に一人で勝利するなどの記述は明らかに現実離れしている。同様に新免無二と吉岡家との足利義昭御前試合に関する逸話も他の史料になく、因縁を将軍家と絡めて描くことで物語性を高めるための創作である可能性を否定できない。

福住道祐が貞永元年(1684年)に著した『吉岡伝』に武蔵と吉岡の対決の異説が記されている。筆者の道祐は、宇喜多氏の伝記物『宇喜多伝』等を執筆する伝記作家である。この文書には吉岡源左衛門直綱・吉岡又市直重という二人の吉岡側の人物と、松平忠直の家臣で無敵流を号し二刀の名手北陸奥羽で有名であるとの肩書きの宮本武蔵が登場する。洛外下松のくだりは記されていない。また試合内容が碑文と全く異なるため、直綱が清十郎で直重が伝七郎であると単純に対応づけすることはできない。要約すると以下の通りである。

「源左衛門直綱との試合の結果、武蔵が額から大出血し、直綱勝利と引分けの2つの意見が出た。直綱は再試合を望んだが武蔵はこれを拒否し、又市直重戦を希望した。しかし直重戦では武蔵が逃亡し直重の不戦勝となった。」

これは宮本武蔵と吉岡家が試合をし引き分けたという内容の最初の史料である。 ただし、『吉岡伝』は朝山三徳・鹿島林斎という原史料不明の武芸者と同列に宮本武蔵が語られ、前述のようにその肩書きは二刀を使うことを除き現実から乖離しており、創作である可能性を否定できない。この史料は昭和になり司馬遼太郎が小説『真説宮本武蔵』の題材にしたことから、有名になり武蔵側の記録に対する吉岡側の記録として紹介される機会が多い。

巷間に武蔵吉岡戦を引き分けとする逸話が伝承されている。

日夏繁高が享保元年(1716年)に著した『本朝武芸小伝』には、巷間に伝わる武芸者の逸話が収録されているが、ここに武蔵と吉岡が引き分けた二つの話が記されている。

柏崎永以が1740年代に編纂した『古老茶話』も巷間の伝承を記録したものであるが、宮本武蔵と吉岡兼房の対戦が記されており、結果はやはり引き分けと記されている。

黒田藩の二天一流師範、立花峯均が享保12年(1727年)に著した武蔵の伝記『兵法大祖武州玄信公伝来』にも、吉岡家との伝承が記されている。これを要約すると以下の通りである

  • 清十郎との試合当日、武蔵は病になったと断りを入れたが、幾度も試合の要求が来た。
  • 竹輿に乗って試合場に到着した武蔵を出迎え、病気の具合を聞く為に覗き込んだ清十郎を武蔵は木刀で倒した。
  • 清十郎は後に回復したが、兵術を捨てて出家した。
  • 伝七郎は洛外で五尺の木刀を用いて武蔵に立ち向かったが、木刀を奪われ撲殺された。
  • 又七郎は、洛外下り松のあたりに鎗・薙刀・弓矢で武装した門人数百人を集めて出向いた
  • 武蔵側にも十数人門人がおり、若武者の一人が武蔵の前に立つが弓矢で負傷した。
  • これを見た武蔵は門人達を先に退却させ、自らがしんがりとなって、数百人の敵を打払いつつ退却した。
  • 武蔵は寺に逃げ込み、寺伝いに退却し、行方をくらませた。
  • 与力同心がその場に駆けつけ、その場を収めた。
  • この事がきっかけで吉岡家は断絶した。

この文書には『小倉碑文』の全文が転記されており、碑文の内容を基に伝承を追記し、内容を発展させたものであると考えられる。本文書とは直接関わりがないが、立花峯均も編集に関わった文書として茶書『南方録』がある。この文書は後世、明治時代の文芸評論家・小宮豊隆により内容が疑問視され偽書とされた。この事から類推し『兵法大祖武州玄信公伝来』の内容を同様に疑問視する意見もある。

細川家筆頭家老松井氏の家臣で二天一流師範、豊田正脩が宝暦5年(1755年)に完成させた『武公伝』には、正脩の父・豊田正剛が集めた武蔵の弟子達が語った生前の武蔵に関する伝聞が記載されている。これには、道家角左衛門が生前の武蔵から度々聞いた話として、洛外下松での詳しい戦いの模様が記されている。これによると、

  • 武蔵に従いたいという弟子に対して、集団同士の戦闘は公儀が禁ずるところであると断った。
  • 清十郎・伝七郎のときは、遅れたことで勝利したので、今回は逆のことをやることにした。
  • 下松に行く途中に八幡社の前を通ったとき、普段はやらない勝利祈願をしようとしたが止めた。
  • まだ夜のうちに下松に来て松陰に隠れていた。
  • 清十郎の子である又七郎が門弟数十人を連れてやってきた。
  • 「武蔵待得タリ」と叫びながら現れ、又七郎を斬り殺した。
  • 門弟が斬り付け、また、半弓で射られ矢が武蔵の袖に刺さったが、進んで追崩したため門弟は狼狽し縦横に走散し、勝利を得た。

この説話は、武蔵が度々語ったものとして当時の細川藩の二天一流の門弟間に伝えられていた伝聞を記録したものである。

また『武公伝』に角左衛門の説話として、御謡初の夜の席での雑談で、志水伯耆から「先年吉岡清十郎ト仕合ノ節、吉岡先ヲ打タル由致風聞候ガ如何ニテ候哉」と、武蔵が先に清十郎から打たれたという話があるが本当か、と武蔵が訊ねられ武蔵が否定する話が記述されている。『武公伝』の話に従えば、晩年の武蔵は弟子等に盛んに吉岡に勝利したことを語っていたが、武蔵の生前に巷間に「吉岡が勝利した」という異説があったと考えることができる。

『武公伝』の内容は正脩の子・豊田景英によって『二天記』に再編集され、明治42年(1909年)熊本の宮本武蔵遺蹟顕彰会編纂による『宮本武蔵』通称『顕彰会本』で『二天記』が原資料の一つとなりそのまま史実とされ、さらに吉川英治が小説『宮本武蔵』(1935年-1939年)で『顕彰会本』の内容を用いたことから現代にも広く知られるようになった。

小倉碑文』や『兵法大祖武州玄信公伝来』『武公伝』には武蔵との戦いで吉岡家が絶えたとあるが、吉岡家がその後も存続したことは『駿河故事録』等、いくつかの史料から推測できる。それらの史料によると、慶長19年(1614年)に禁裏での一般にも開放された猿楽興行で、吉岡清次郎重賢(建法)なる者が警護の者と諍いをおこし切り殺されるという事件がおこり、これにより兵術吉岡家は滅んだという説があり、武蔵戦以降も吉岡家は存続している事になる。

前述の『本朝武芸小伝』にも猿楽興行の異説があり、事件を起こしたのは吉岡又三郎兼房であり、事件の最中吉岡一族の者が多く居たが、騒ぎたてず加勢しなかったため、所司代板倉勝重が吉岡一族を不問にしたとある。この説を取るならば武蔵戦・猿楽興行事件以降も吉岡家は存続している。

『吉岡伝』にも同様の記録があり、吉岡清次郎重堅が事件を起こしたが、徳川家康の命により兵術指南は禁止されたが吉岡一族の断絶は免れたとある。更に翌年の大坂の陣で吉岡源左衛門直綱・吉岡又市直重の兄弟が豊臣側につき大坂城に篭城、落城とともに京都の西洞院へ戻り染物を家業とする事になったとあり、この説でも武蔵戦・猿楽興行事件以降も吉岡家は存続している。

各文書の比較を下に示す。

文書名
執筆年
執筆編者 第一
対戦者
一戦結果 第二
対戦者
二戦結果 第三
対戦者
三戦結果 吉岡家
小倉碑文
承応3年
(1654年)
宮本伊織 吉岡清十郎 清十郎引退
武蔵勝利
吉岡伝七郎 伝七郎死亡
武蔵勝利
吉岡亦七郎
と武装した
門人数百名
武蔵勝利 絶滅
吉岡伝
貞永元年
(1684年)
福住道祐 吉岡
源左衛門
直綱
武蔵出血
直綱勝利
引分両論
吉岡
又市直重
武蔵逃亡
直重不戦勝
なし -- 存続
本朝武芸小伝
(二説)
正徳4年
(1714年)
日夏繁高 吉岡 引分 なし -- なし -- 存続
兵法大祖
武州玄信
公伝来
享保12年
(1727年)
二天一流師範
黒田藩士
丹治峯均
吉岡清十郎 清十郎引退
武蔵勝利
吉岡伝七郎 伝七郎死亡
武蔵勝利
吉岡亦七郎
と武装した
門人数百名
武蔵と門人
退却に成功
絶滅
古老茶話
1740年代
柏崎永以 吉岡兼房 引分 なし -- なし -- --
武公伝
宝暦5年
(1755年)
二天一流師範
松井氏家臣
豊田正脩
吉岡清十郎 清十郎引退
武蔵勝利
吉岡伝七郎 伝七郎死亡
武蔵勝利
吉岡亦七郎
と武装した
門人数十名
亦七郎死亡
武蔵勝利
絶滅

巌流島[편집]

武蔵が行った試合の中で最も広く知られているものは、俗に「巌流島の決闘」といわれるものである。これは慶長年間に当時豊前小倉藩領であった舟島(関門海峡に浮かぶ巌流島、現在は山口県下関市に属している)で、岩流なる兵法者と戦ったとされるものである。

注:岩流には俗に佐々木小次郎の呼称があるが後年の芝居で名づけられ定着したもので根拠がない。また巌流は岩流の異字表現に過ぎない、史料によっては他に岸流・岸柳・岩龍という呼称がある。

この試合を記した最も古い史料は、武蔵の養子伊織による承応3年(1654年)の『新免武蔵玄信二天居士碑』(『小倉碑文』)である。これによると「爰に兵術の達人、岩流と名のる有り。彼と雌雄を決せんことを求む。岩流云く、真剣を以て雌雄を決せんことを請ふ。武蔵対へて云く、汝は白刃を揮ひて其の妙を尽くせ。吾は木戟を提げて此の秘を顕はさんと。堅く漆約を結ぶ。長門と豊前との際、海中に嶋有り。舟嶋と謂ふ。両雄、同時に相会す。岩流、三尺の白刃を手にして来たり、命を顧みずして術を尽くす。武蔵、木刃の一撃を以て之を殺す。電光も猶遅し。故に俗、舟嶋を改めて岩流嶋と謂ふ。(原文漢文)」とある。

『小倉碑文』の次に古い記録は試合当時に門司城代であった沼田延元の子孫が寛文12年(1672年)に編集し、近年再発見された『沼田家記』がある。

延元様門司に被成御座候時 或年宮本武蔵玄信豊前へ罷越 二刀兵法の師を仕候 其比小次郎と申者岩流の兵法を仕是も師を仕候 双方の弟子ども兵法の勝劣を申立 武蔵小次郎兵法之仕相仕候に相究 豊前と長門之間ひく島に出合 双方共に弟子一人も不参筈に相定 試合を仕候処 小次郎被打殺候 小次郎は如兼弟子一人も不参候 武蔵弟子共参り隠れ居申候 其後に小次郎蘇生致候得共 彼弟子共参合 後にて打殺申候 此段小倉へ相聞へ 小次郎弟子ども致一味 是非とも武蔵を打果と大勢彼島へ参申候 依之武蔵難遁門司に遁来 延元様を偏に奉願候に付御請合被成 則城中へ被召置候に付 武蔵無恙運を開申候 其後武蔵を豊後へ被送遣候 石井三之丞と申馬乗に 鉄砲之共ども御附被成 道を致警護無別条豊後へ送届武蔵親無二と申者に相渡申候由に御座候

内容を要約すると以下の通りである。

  • 宮本武蔵玄信が豊前に来て二刀兵法の師になった。この頃、すでに小次郎という者が岩流兵法の師をしていた。
  • 門人の諍いによって武蔵と小次郎が試合をする事になり、双方弟子を連れてこないと定めた。
  • 試合の結果、小次郎が敗れた。
  • 小次郎の弟子は約束を守り一人も来ていなかったが、武蔵の弟子は島に来ていて隠れていた。
  • その後、勝負に敗れ気絶した後蘇生した小次郎を武蔵の弟子達が皆で打ち殺した。
  • それを伝え聞いた小次郎の弟子達が島に渡り武蔵に復讐しようとした。武蔵は門司まで遁走、城代の沼田延元を頼った。
  • 沼田延元は武蔵を門司城に保護、その後鉄砲隊により警護し豊後に住む武蔵の親である無二の所まで無事に送り届けた。

「豊後」がどこであったのかには以下の説が挙げられる。

  • 豊後の杵築は細川家の領地で、慶長年間は杵築城代に松井康之松井興長が任じられていた。宮本無(原文は無の異字体の无)二助藤原一真が慶長12年(1607年)細川家家臣友岡勘十郎に授けた当理流の免許状が現存することから、宮本無二助を新免無二と同一人物であると考えるなら、舟島での試合以前から新免無二と細川家の結びつきが深かったと推察する事ができる。また前述の通り新免無二は慶長5年(1600年)関ヶ原の戦いの際、黒田家の家臣であった。黒田如水は松井康之が守備する同じ東軍の細川領・杵築城防衛に援軍加勢し勝利している。この折に新免無二と松井家が強く結びついたとの推察もできる。更には武蔵と松井家との晩年の親密さから試合当時も松井家に縁があり、武蔵は杵築に住む無二の許へ送られたと考えられる。
  • 当時、日出城主であり、細川忠興の義弟であった木下延俊の慶長18年日記に延俊に仕えていた無二なる人物のことが記されている。宝暦元年(1751年)日出藩家老・菅沼政常が記録した平姓杉原氏御系図附言の木下延俊の項にも「剣術は宮本無二斎の流派を伝たまふ」と記載されている。この無二=宮本無二斎を新免無二と同一人物であると考え、沼田家記と照らし合わせるならば、試合当時も豊後の日出に新免無二が滞在しており、武蔵はそこに送られたとも考えられる。

様々な武芸者の逸話を収集した『本朝武芸小伝』(1716年)にも巌流島決闘の伝説が記されており、松平忠栄の家臣中村守和(十郎右衛門)曰くと称して、『沼田家記』の記述と同様、単独渡島の巌流に対し武蔵側が多くの仲間と共に舟島に渡っている様子が語られている。

江戸時代の地理学者古川古松軒が『二天記』とほぼ同時代の1783年に『西遊雑記』という九州の紀行文を記した。ここに当時の下関で聞いたという巌流島決闘に関する民間伝承が記録されている。あくまでも試合から100年以上経った時代の民間伝承の記録であり、史料としての信頼性は低いが、近年再発見された『沼田家記』の記述に類似している。内容を現代語訳すると以下の通りである。

岩龍島は昔舟島と呼ばれていたが、宮本武蔵という刀術者と佐々木岩龍が武芸論争をし、この島で刀術の試合をし、岩龍は宮本に打ち殺された。縁のある者が、岩龍の墓を作り、地元の人間が岩龍島と呼ぶようになったという。
赤間ヶ関(下関)で地元の伝承を聞いたが、多くの書物の記述とは違った内容であった。
岩龍が武蔵と約束をし、伊崎より舟島へ渡ろうとしたところ、浦の者が岩龍を止めた。
「武蔵は弟子を大勢引き連れて先ほど舟島へ渡りました、多勢に無勢、一人ではとても敵いません、お帰りください。」
しかし岩龍はこう言って強引に舟島に渡った。
「武士に二言はない、堅く約束した以上、今日渡らないのは武士の恥、もし多勢にて私を討つなら恥じるべきは武蔵」
浦人の言った通り、武蔵の弟子四人が加勢をして、ついに岩龍は討たれた。
しかし岩龍を止めた浦人たちが岩龍の義心に感じ入り墓を築いて、今のように岩龍島と呼ぶようになった。
真偽の程はわからないが、地元の伝承をそのまま記し、後世の参考とする。
ある者は宮本の子孫が今も小倉の家中にあり、武蔵の墓は岩龍島の方向を向いているという。

豊田正脩が宝暦5年(1755年)にまとめた『武公伝』には、巌流島での勝負が詳述されている。これによると

  • 巌流小次郎は富田勢源の家人で、常に勢源の打太刀を勤め三尺の太刀を扱えるようになり、18歳で自流を立て巌流と号した。その後、小倉城主の細川忠興に気に入られ小倉に留まった。
  • 慶長17年に京より武蔵が父・無二の縁で細川家の家老・松井興長を訪ね小次郎との勝負を願い出た。興長は武蔵を屋敷に留め、御家老中寄合で忠興公に伝わり、向島(舟島)で勝負をすることになった。また、勝負の日は、島に近づくことは固く禁じられた。
  • 勝負の前日、興長から武蔵に、勝負の許可と、明日は小次郎は細川家の船、武蔵は松井家の船で島に渡るように伝えられた。武蔵は喜んだが、すぐに小倉を去った。皆は、滞在中に巌流の凄さを知った武蔵が逃げたのだと噂した。武蔵は下関の問屋小林太郎右衛門の許に移っていた。興長には、興長への迷惑を理由に小倉を去ったと伝えた。
  • 試合当日、勝負の時刻を知らせる飛脚が小倉から度々訪れても武蔵は遅くまで寝ていた。やっと起きて、朝食を喰った後、武蔵は、太郎右衛門から艫を貰い削り木刀を作った。
  • その後、太郎右衛門の家奴(村屋勘八郎)を梢人として舟で島に向かった。
  • 待たされた小次郎は武蔵の姿を見ると憤然として「汝後レタリ(来るのが遅い!)」と言った。木刀を持って武蔵が汀より来ると小次郎は三尺の刀を抜き鞘を水中に投げ捨てた。武蔵は「小次郎負タリ勝ハ何ゾ其鞘ヲ捨ント(小次郎、おまえは敗れた。勝つつもりならば大事なを捨てはしないはずだ。)」と語った。
  • 小次郎は怒って武蔵の眉間を打ち、武蔵の鉢巻が切れた。同時に武蔵も木刀を打ち、小次郎の頭に中った。倒れた小次郎に近づいた武蔵に小次郎が切りかかり、武蔵の膝上の袷衣の裾を切った。武蔵の木刀が小次郎の脇下を打ち骨が折れた小次郎は気絶した。
  • 武蔵は手で小次郎の口鼻を蓋って死活を窺った後、検使に一礼し、舟に乗って帰った。その時、半弓で射かけられたが中らなかった。

この話は、武蔵の養子伊織の出自が泥鰌捕りの童であったという話と共に、戦いの時に武蔵が島に渡るときの梢人であったとする小倉商人の村屋勘八郎なる人物が、正徳2年(1712年)に語ったものと記されている。『武公伝』で慶長17年(1612年)に行なわれたとされる巌流との戦いで梢人だった者が100年後に正脩の祖父の豊田正剛に語った話とされているのである。仮に、この勝負の内容が、事実であれば、細川家でこれだけの事件が起こったにもかかわらず、それについての記述が『武公伝』の編集当時に、細川家中や正剛・正脩の仕える松井家中になく、藩外の怪しげな人物からの伝聞しかなかったことになる。また、前述の『沼田家記』の内容とも大きく異なっている。

『武公伝』では武蔵の弟子たちが語ったとされる晩年の武蔵の逸話が多く記載されているが、岩流との勝負については、村屋勘八郎の話以外、弟子からの逸話はなく、松井家家臣の田中左太夫が幼少の頃の記憶として、松井興長に小次郎との試合を願い出た武蔵が、御家老中寄合での決定を知らず下関に渡り、勝負の後に興長に書を奉ったという短い話のみ記載されているのみである。これは、晩年の武蔵が度々吉岡との勝負を語っていたという逸話と対照的であり、『五輪書』に岩流との勝負についての記述が全くない事実を考えると晩年の武蔵は舟島での岩流との勝負について自ら語ることが殆どなかったと推測することができる。

本朝武芸小伝』(1716年)、『兵法大祖武州玄信公伝来』(1727年)、『武公伝』(1755年に完成)等によって成長していった岩流の出自や試合の内容は、『武公伝』を再編集した『二天記』(1776年)によって、岩流の詳しい出自や氏名を佐々木小次郎としたこと、武蔵の手紙、慶長17年4月13日に試合が行われたこと、御前試合としての詳細な試合内容など、多くの史的価値が疑わしい内容によって詳述された。『二天記』が詳述した岩流との試合内容は、明治42年(1909年)熊本の宮本武蔵遺蹟顕彰会編纂による『宮本武蔵』通称『顕彰会本』で原資料の一つとなりそのまま史実とされ、さらに吉川英治が小説『宮本武蔵』(1935年-1939年)で『顕彰会本』の内容を用いたことから広く知られるようになった。

また、様々な文書で岩流を指し佐々木と呼称するようになるのは、元文2年(1737年)巌流島決闘伝説をベースとした藤川文三郎作の歌舞伎「敵討巌流島」が大阪で上演されて以降である。この作品ではそれぞれに「月本武蔵之助」「佐々木巌流」という役名がつけられ、親を殺された武蔵之助が巌流に復讐するという筋立てがつけられている。

史料を比較すると記述に以下のような差異が認められる。

文 書 名 執筆年 執筆者・編者 武蔵年齢 巌流名称 巌流年齢 巌流出自 武蔵側加勢
小倉碑文 承応3年
(1654年)
宮本伊織 不明 岩流 不明 兵術の達人 武蔵一人
沼田家記 寛文12年
(1672年)
細川藩士
沼田家家人
(細川家家老だった
延元の記録を編集)
不明 小次郎 不明 豊前の兵法師範 武蔵の弟子達が
隠れ来ていた
江海風帆草 宝永元年
(1704年)
吉田重昌 十八歳 上田宗入 不明 磯に結跏趺坐し
修行の末に巌流創始
武蔵を批判し
無二と因縁がある
長門の兵法師範
武蔵一人
本朝武芸小伝 正徳4年
(1714年)
日夏繁高 不明 巌流 不明 兵法遣い 武蔵一人
宮本の仲間は多い
両論併記
兵法大祖武州玄信公伝来
(武州伝来記)
(丹治峯均筆記)
享保12年
(1727年)
二天一流師範
黒田藩士
丹治峯均
十九歳 津田小次郎 不明 無二が恐れた
長門の兵法師範
武蔵一人
武公伝 宝暦5年
(1755年)
二天一流師範
松井氏家臣
豊田正脩
二十九歳 巌流小次郎 不明 富田勢源の弟子
十八歳で独立
巌流創始し修行
細川忠興が登用
豊前の兵法師範
武蔵一人
二天記 安永5年
(1776年)
二天一流師範
松井氏家臣
豊田景英
二十九歳 巌流小次郎
(佐々木小次郎)
十八歳 富田勢源の弟子
独立し巌流創始
細川忠興が登用
豊前の兵法師範
武蔵一人
兵法先師伝記 天明2年
(1782年)
二天一流師範
元黒田藩士
丹羽信英
二十九歳 津田小次郎 不明 無二と幾度も戦い
決着しなかった
豊前の兵法者
武蔵一人
西遊雑記 天明3年
(1783年)
古川古松軒
(下関民間伝承を記録)
不明 佐々木岩龍 不明 伊崎から渡島した
(長門側の)武芸者
門人の士四人與力

예술가로서의 무사시[편집]

枯木鳴鵙図

무사시 사후 21년 후인 1666년에 쓰여진 《海上物語》에 무사시가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과 화가로써도 유명했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武公伝』(松井家の二天一流師範が著した武蔵伝記・宝暦5年(1755年)豊田正脩編)には、「武公平居閑静して(中略)連歌或は書画小細工等を仕て日月を過了す、故に武公作の鞍楊弓木刀連歌書画数多あり」と書かれている。

현재 전해지는 작품의 대다수는 만년에 창작된 것이라고 사료된다.

그가 그린 수묵화에는 니텐이란 호가 다수 사용되었다. 화풍은 가이호 유쇼와 하세가와 도하쿠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 있지만, 전문적으로 누구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剣禅一如の境地が見事に描かれた作品との評価もあるが、職業画家ではない稚拙さ素朴さが逆に作品の評価を高めているとの意見もある。筆致、画風や画印、署名等で真贋に対する研究もなされているが明確な結論は出されていない。

주요한 그림으로는「鵜図」「正面達磨図」「面壁達磨図」「捫腹布袋図」「芦雁図」(以上永青文庫蔵)「芦葉達磨図」「野馬図」(以上松井文庫蔵)「枯木鳴鵙図」(和泉市久保惣記念館蔵)「周茂叔図」「遊鴨図」「布袋図」(以上岡山県立美術館蔵)「布袋観闘鶏図」(福岡市美術館蔵)등이 있다.

붓글씨로는「長岡興長宛書状」(八代市立博物館蔵)「有馬直純宛書状」(吉川英治記念館蔵)「独行道」(熊本県立美術館蔵)「戦気」(松井文庫蔵)이 진품으로 인정되고 있다.

전해지는 무사시의 공예품으로는 검게 옷칠을 한 안장과 간류 섬에서의 결투에 사용된 목검을 모방한 목검 한자루가 있다. 그리고, 니텐이치류에서 사용되는 대소 한쌍의 목검이 마쓰이 가문에 소장되어 있다. また、武蔵作とされる海鼠透鐔が島田美術館等にいくつか残されているが、武蔵の佩刀伯耆安綱に付けられていたとされる、寺尾家に伝来していた素銅製の「海鼠透鐔」(個人蔵)が熊本県文化財に指定されている。

더우기, 서화의 필체로 볼때 왼손으로 작업한 부분이 있어 왼손잡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주 : 무사시의 작품으로 유명한 부동명왕상(不動明王像)은 진품이 아니다.

創作への影響[편집]

巌流島の戦いなど、武蔵に関わる物語は江戸時代から脚色されて歌舞伎浄瑠璃講談などの題材にされ、吉川英治1930年代朝日新聞に連載した小説『宮本武蔵』によって最強の青年剣士武蔵のイメージが一般に広く定着した。

備考[편집]

松井家の二天一流師範である豊田景英が著した武蔵の伝記『二天記』には、大和国奈良宝蔵院流槍術の使い手奥蔵院日栄伊賀国鎖鎌の使い手宍戸某、江戸の柳生新陰流大瀬戸隼人辻風左馬助等との試合を記しているが、『二天記』の原史料である『武公伝』に記載が無く、また、他にそれを裏付ける史料が無いことから史的事実ではないと考えられている。

丹治峯均(立花峯均)が著した武蔵の伝記『兵法大祖武州玄信公伝来』によると、身長は六尺(約180センチメートル)程であったと記されている。また、細川家家老で後に八代城主になった松井寄之の依頼により巌流島の試合で使用した木刀を模したと伝えられる武蔵自作の木刀が現在も残っている。ちなみに熊本県は『宮本武蔵』(1984年 NHK新大型時代劇)の放送を記念し、前記の木刀の複製を販売した。

渡辺幸庵(渡辺茂 通称は久三郎、天正10年(1582年)摂津で生まれ唐天竺を巡礼したと称し、宝永8年、130歳?で没)の対話集『渡辺幸庵対話』の宝永6年9月10日の対話によると、「竹村武藏といふ者あり。自己に劔術を練磨して名人也。但馬にくらへ候てハ、碁にて云ハ井目も武藏強し。」「然るに第一の疵あり。洗足行水を嫌ひて、一生沐浴する事なし。外へはたしにて出、よこれ候へは是を拭せ置也。夫故衣類よこれ申故、其色目を隠す爲に天鵡織兩面の衣服を着、夫故歴々に疎して不近付。」とありここから、宮本武蔵が一生風呂にはらなかったといわれる。(ただし沐浴は宗教行為であり、入浴にあるとおり庶民が風呂にいくのは江戸時代から。)

円明流時代の高弟[편집]

thumb|240px|武蔵像と一乗寺下り松の古木

研究書[편집]

  • 池辺義象 編、宮本武蔵遺蹟顕彰会編纂 『宮本武蔵』 金港堂、1909年
  • 福原浄泉 『宮本武蔵の研究』 武蔵顕彰五輪会、1964年
  • 冨永賢吾 『史実宮本武蔵』百泉書房 1969年
  • 丸岡宗男 編 『宮本武蔵名品集成』 講談社、1977年

宮本武蔵を主人公にした作品[편집]

歌舞伎絵の宮本無三四

小説[편집]

  • 宮本武蔵(1935年–1939年、朝日新聞連載、吉川英治
  • 佐々木小次郎(1949年–1950年、朝日新聞連載、村上元三
  • よじょう(1952年、山本周五郎
  • それからの武蔵(1952年–1957年、小山勝清)
  • 二人の武蔵(1956年–1957年、1968年改訂、五味康祐)
  • 真説宮本武蔵(1962年、司馬遼太郎
  • 宮本武蔵(1967年、司馬遼太郎)
  • 決闘者宮本武蔵(1970年–1973年、柴田錬三郎)
  • 宮本武蔵(1983年–1984年、津本陽)
  • 捨剣夢想権之助(1992年、佐江衆一)
  • 素浪人宮本武蔵(1993年–1995年、峰隆一郎)

映画[편집]

  • 宮本武蔵 1929年 千恵プロ 監督:井上金太郎 武蔵:片岡千恵蔵
  • 宮本武蔵 地の巻 1936年 新興 原作:吉川英治 監督:滝澤英輔 武蔵:嵐寛寿郎
  • 宮本武蔵 地の巻 1937年 日活 原作:吉川英治 監督:稲垣 浩 武蔵:片岡千恵蔵
  • 宮本武蔵 風の巻 1937年 東宝 原作:吉川英治 監督:石田民三 武蔵:黒川弥太郎
  • 宮本武蔵 草分けの人々 1940年 日活 原作:吉川英治 監督:稲垣 浩 武蔵:片岡千恵蔵
  • 宮本武蔵 栄達の門 1940年 日活 原作:吉川英治 監督:稲垣 浩 武蔵:片岡千恵蔵
  • 宮本武蔵 剣心一路 1940年 日活 原作:吉川英治 監督:稲垣 浩 武蔵:片岡千恵蔵
  • 宮本武蔵 一乗寺決闘 1942年 日活 原作:吉川英治 監督:稲垣 浩 武蔵:片岡千恵蔵
  • 宮本武蔵 決戦般若坂 1942年 大都 原作:吉川英治 監督:佐伯幸三 武蔵:近衛十四郎
  • 宮本武蔵 二刀流開眼 1943年 大映 原作:吉川英治 監督:伊藤大輔 武蔵:片岡千恵蔵
  • 宮本武蔵 決闘般若坂 1943年 大映 原作:吉川英治 監督:伊藤大輔 武蔵:片岡千恵蔵
  • 宮本武蔵 1944年 原作:菊池寛 監督:溝口健二 武蔵:河原崎長十郎
  • 武蔵と小次郎(1952年、松竹、武蔵:辰巳柳太郎
  • 宮本武蔵(1954年、東宝、武蔵:三船敏郎
  • 続宮本武蔵 一乗寺の決闘(1955年、武蔵:三船敏郎)
  • 宮本武蔵完結編 決闘巌流島(1956年、武蔵:三船敏郎)
  • 宮本武蔵(1961年、東映、監督:内田吐夢 原作:吉川英治 武蔵:中村錦之助(萬屋錦之介)全五部作)
    • 宮本武蔵 般若坂の決闘(1962年、東映、監督:内田吐夢 原作:吉川英治 武蔵:中村錦之助)
    • 宮本武蔵 二刀流開眼(1963年、東映、監督:内田吐夢 原作:吉川英治 武蔵:中村錦之助)
    • 宮本武蔵 一乗寺の決闘(1964年、東映、監督:内田吐夢 原作:吉川英治 武蔵:中村錦之助)
    • 宮本武蔵 巌流島の決斗(1965年、東映、監督:内田吐夢 原作:吉川英治 武蔵:中村錦之助)
  • 宮本武蔵(1973年、武蔵:高橋英樹
  • 巌流島 GANRYUJIMA(2003年、監督:千葉誠治 武蔵:本木雅弘
  • 荒神(監督:北村龍平)
    • 敵役である荒神(加藤雅也)が宮本武蔵を名乗る

TVドラマ[편집]

吹奏楽[편집]

  • Overture“FIVE RINGS”(1984年、作曲:三枝成彰 『宮本武蔵』NHK新大型時代劇のオープニングテーマ並びにお通のテーマを合体したもの。全日本吹奏楽コンクール1985年度課題曲)
  • MUSASHI(2002年9月11日、作曲:スティーヴン・メリロ (Stephen Melillo) #906 STORMWORKS)

TVアニメ[편집]

漫画[편집]

実際の宮本武蔵が400歳になっても生きているという設定。佐々木小次郎柳生十兵衛なども描かれている。
ヒロインの薬師丸鋼に宮本武蔵のDNAが植え付けられているという設定。佐々木小次郎のDNAを植え付けられた敵方の幹部なども登場する。

ゲーム[편집]

その他[편집]

関連項目[편집]

外部リンク[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