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威光/拾遺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낭중령[편집]

  • 屈侯氏,魏賢人屈侯鮒,漢有郎中令屈侯豫。

풍속통의 인용… 근데 텍스트 자체를 통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초등학생 받아쓰기보다 하등 나을 게 없는 오자의 향연이 문제. —威光 (토론기여) 2021년 11월 10일 (수) 02:12 (KST)

시호 문제[편집]

경제의 공신후 중 위관·정가는 시호가 사기와 한서에서 각기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두 표(사기 혜경간후자연표·한서 효경공신표) 모두 '위관 바로 다음이 정가'인 형태로 순번이 동일하며, 사기에서는 '건릉경후-건평애후', 한서에서는 '건릉애후-건평경후'로, 시호가 서로 뒤바뀐 형태임. 한서가 표를 잘못 베낀 것이 아닐지?

무고 대잔치[편집]

정화 2년 (BC91): 무고의 난[편집]

정화 3년 (BC90)[편집]

정화 4년 (BC89)[편집]

사례교위 신설[편집]

무고를 수사함. 아마도 이충이 최초로 임명되었을 것.

후원년 (BC88)[편집]

역시나 전말을 알 수 없는 사건. 정확한 일자는 차이가 있긴 하나 마침 셋 다 사이좋게 허리가 잘려 죽었다. 칙은 제소군(齊少君)이란 무당을 시켜 무제를 저주했다고, 아아아아주 조금 자세히 적혀 있다. 아무래도 건과 비몽도 같은 사건으로 죽은 것 같다.

후2년 (BC87): 제북왕 유관의 무고[편집]

후3년 (?)[편집]

아래의 인물들은 후3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무제는 후2년에 죽었으므로 후3년은 있을 수가 없다. 일단은 후2년의 오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긴 하다만, 후3년이 세 번이나 등장하는 건 좀...

무고 연루[편집]

불명[편집]

  • 유경: 황제를 기망한 죄로 옥사
  • 유당: 모반이 발각되어 자살

며칠 전에, 후3년의 존재를 입증할 자료를 발견하는 꿈까지 꿨다(안타깝게도 내용은 기억이 안 남. 또 다른 모반 이야기였던가)... 나도 내가 무섭다...ㄷㄷ;; --威光 (토론기여) 2018년 9월 29일 (토) 03:22 (KST)

망상[편집]

문제의 여섯 구경[편집]

문제 원년 6월, 문제는 대나라에서 데려온 측근 여섯 명을 구경으로 임용했음. 이 '여섯 측근'은 문제와 함께 장안에 갔었던 장무 외 5명으로, 사실 장무는 문제가 입궁한 날 밤에 바로 낭중령이 되었으므로 열외. 나머지 다섯 명으로 추정할 만한 사람은...

표에서는 문제 2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의 역법인 전욱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한 칸 아래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임.
위위 정과 같은 맥락.
이쪽은 문제 3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냥 억지 좀 부려봤음. 하지만 풍경의 집안이 대나라 쪽에 살았단 걸 생각하면, 풍경이 본래 대나라 관료였을 개연성이 충분함.
포기할 수 없는 무리수 1
포기할 수 없는 무리수 2

대리 하 = 이하[편집]

딱 맞는 이름자, 대리 하의 증발 추정시기와 이하의 몰년의 정확한 일치.

중위 가 = 정가[편집]

'중위 정가'가 오초칠국의 난 진압 후 강도으로 파견되고, 위관이 중위 자리를 이어받은 걸로 보면 완벽히 들어맞는데... 현대 중국의 서적에 '진가陳嘉'라는, 근거를 알 수 없는 표기가 돌아다니고 있음.

동현의 처남 = 신도박[편집]

'동현의 처남'은 동현의 출세와 더불어 집금오에 임명됐음. 이때 동현의 장인은 장작대장이 되고(시기상 교망·사요 사이일 것), 아버지 동공소부·위위를 역임함. 신도박은 동현이 대사마가 되고 동공이 위위가 된 해에 집금오가 되고, 동현이 실각하고 자결한 해에 면직됨. 동현과 신도박은 출신지도 서로 가까워, 인척 관계의 개연성도 있음. 여기에 적은 수많은 뻘소리들 중, 가장 확신을 갖고 있는 뻘소리임.

중위 패 = 정위 패[편집]

사마안·왕온서와 서로 커리어를 물려주는 사이였을 것이 분명함. 왕선겸이 이미 주장한 바이기도 하지만, 대놓고 명백한데도 기록이 없으니...

이 '패'는 경력상 무제 시기에 눈썹을 휘날리던 혹리들(장탕·의종·사마안·왕온서·윤제·조우 등등)과 동급의 인물임이 분명한데, 남겨진 기록이 전혀 없음.

원연 연간의 대사농 요 = 사요[편집]

왕선겸은 영광 연간의 대사농 요가 재취임한 것이라고 봤는데, 33년이나 차이나는 만큼 사실 말도 안 되고... 그냥 이때 여기저기 들쑤시던 사요가 아녔을까...

수위위 불해 = 위불해[편집]

안사고는 위불해가 무려 60여 년이나 차이가 나는 중위 불해와 동일인물이라는 미친 소리를 했음. 오히려 위불해가 공손용·호천의 난 진압으로 출세해서, 수위위를 지내다가 태상으로 전임된 것으로 봐야 할 것. 그래... 안사고의 주석이 뭔가 잘못 전해진 거겠지...

유영 폐태자의 원인이 된 이름 모를 전객 = 유중의[편집]

유중의가 유사한 시기(1년 차이)에 죄를 지어 작위가 박탈되었고, 마침 전객 유갈의 아들이라서... 사실 무리수임.

석편[편집]

석분의 이남·삼남 중 하나, 아니면 적어도 같은 집안은 아닐지...

왕현·왕훈[편집]

왕상이 숙청된 후, 왕상의 일족 중 성제의 측근이었던 자들은 모두 파면됨. 얘네도 그쪽 애들인 것 같은데... 특히 왕훈...

사주국[편집]

사단의 집안 사람?

경조윤 무양武襄 = 태복 무양武讓[편집]

그냥 한쪽의 이름자가 잘못 쓰인 게 분명하다. 경조윤 무양이 몸 담은 부서인 '재형'은 왕망의 부서이고, 태복 무양은 왕망의 충실한 따까리로서 적의 토벌에 나섬.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한지?

대행령 광光 = 등공鄧公[편집]

건원 연간에 구경에 이르렀다가, 한 해만에 병으로 면직됐다는 등공. 한서에서는 등선鄧先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함. 대행령 광은 건원 원년에 취임한 기록이 보이고, 이듬해에 바로 과기가 대행령이 된 것이 확인됨. 즉, 1년간 재임했을 것.

다시 등공(등선)으로 돌아와서...

그간 여러 학자들은 先이 公의 오자라는 둥, 혹은 先生의 줄임말이라는 둥의 이야기만 해댔지만... 나는, 先과 光의 자형이 비슷하다는 것, 거기다가 先(公)이 건원 연간에 1년간 구경의 반열에 들었고, 光 또한 건원 연간에 1년간 대행령을 지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대농령 객客 = 은굉(은용) = 단굉段宏[편집]

殷·段, 宏·容·客의 악연...

맹분 = 우내사 분[편집]

집금오 벽병 = 사례교위 벽병[편집]

사례교위 벽병은 사악성·두연년 등과 함께 창읍왕 폐위 & 선제 옹립을 도운 인물. 사례교위 벽병이 선제 옹립에 힘을 보태고, 논공행상으로 집금오가 된 것일 텐데... 선제 옹립 시의 '공신'들 중, 이 정도 짬밥의 인물이면서도 유달리 기록이 없음.

무제의 마지막 연호 '후원'[편집]

실제로는 연호가 아니라, 그냥 개원을 다시 한 것일 뿐. 정확히는 중국 학계에 '개원을 하고, 연호를 새로 제정하지 못한 채 죽은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한서에서도 '후원년' '후2년'이라고 표기한 것으로 보아 개연성이 매우 높음.

두식杜式[편집]

의종의 죄를 판결할 때 단 한 번 등장하는 인물. 심지어 직책도 기록이 없음. 두주의 오기인가 싶었지만, 두주와 의종의 세대차이도 있을뿐더러 애당초 두주가 의종의 졸개로 커리어를 시작했기 때문에 가능성이 심히 떨어짐. 어쨌든, 했던 일을 생각하면 당시 두식의 직책은 중위·정위 중 하나였을 듯.

종정자설[편집]

당초 성명이 '종정', 가 '자설'이라고 생각했었으나, 종정씨의 존재·이 사람이 장안 사람이라는 기록 때문에 입장을 바꿈.

《만성통보》에 따르면, 종정씨는 종정의 후손이 관직명을 성씨로 삼은 것이라고 함. 즉, 종정자설은 전한의 종실일 것. 초원왕 계통인가?

왕백 = 왕건[편집]

왕백도 아버지 왕존처럼 경조윤을 지냈다가 일을 못해서 잘렸다고 하는데... 왕존 이후의 경조윤들 중 왕씨인 사람은 왕건이 유일함. 마침 반짝 등장했다가 사라졌고.

이흡李翕 = 이옹李翁[편집]

이옹: 신나라 건국 후, 흉노 토벌에 동원된 장군 중 하나로 딱 한 번 언급됨.

李翕과 李翁... 제발... 동일인물이라고 해줘...

부은후 유귀[편집]

한서 왕자후표의 머릿말을 보면, 거섭 이후의 왕자후는 올바르지 않으므로 싣지 않았다고 밝혔음. 안 그래도 '부은'(扶恩)이라는, 그... 뭐랄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왕망 특유의 감성 돋는 작명센스가 느껴지는 이름을 보면, 분명히 거섭 이후에 왕망이 봉한 왕자후일 것.

물론, 이 모든 것은 반고가 '안 적었기' 때문이다. 백관공경표도 원시 연간까지만 기록이 있는데, 이것도 반고의 그 이상한 씹선비 정신이 빚어낸 고의 누락일 것. (아, 어쩌면 반고가 아니라 반소일지도 모르겠다. 그놈이나 그년이나...)

그래, 너 잘났다, 인마... 네가 더럽다고 한 왕망의 작위를 받은(아니, 받은 것으로 보이는) 유귀가 전한 살리겠답시고 반란 일으켰단다... 어휴, 재수없는 새×. 바로 위의 '이흡=이옹' 떡밥도, 네가 백관공경표를 거섭 연간까지 적었으면 해결됐을 거다. 퉤.

오록충종의 출신지[편집]

유림전의 '(梁丘)臨五鹿充宗君孟為少府'에서 五鹿充宗君孟為少府만 읽고 '대군 사람 오록충종 군맹은 소부가 되었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 마땅히 '양구림은 오록충종 군맹에게 (학통의) 대를 잇게 하였고, (오록충종은) 소부가 되었다'라고 해석하거나, 왕선겸의 말마따나 '양구림은 오록충종 군맹을 대신하여 소부가 되었다'라고 해석해야 할 것.

근데 왕선겸의 해석은 쫌 그런 게, 애당초 백관공경표에 양구림이 등장하지 않으며, 오록충종의 후임 소부는 소신신으로 기록되어 있음. 이건 순리전의 기록과 어느정도 교차검증이 되기까지 함. 이에 대해서 왕선겸은 '양구림이 아~~~~주 잠깐 지냈기 때문에, 표에 실리지 못한 것이 아닐까?'하는 이야기를 해놨는데... 양구림과 오록충종을 사제간으로 해석하지 않을 경우, 학통이 도중에 끊겨 버림...-_-;;

사실 내가 밀고 있는 '대를 잇게 하다'도 문제인 것이, 유림전에서는 다른 사제간에는 이걸 라고 표현했지, 라고 하진 않았음. 그렇다고 '대군'으로 옮기면, 잘 아시다시피 문장구조 자체가 붕괴되고...

한편 우리의 영원한 호프, 천쯔는... 오록충묘(五鹿充墓)의 주인을 오록충종으로 (밑도 끝도 없이) 추정하였는데, 오록충묘의 소재지는 화이안 현. 근데 여기는, 무려 전한의 대군 마성현(馬城縣)으로 비정되는 곳.

음... 으음... '오록충종=오록충'인지도 확실치 않은 일이긴 하다만, 진짜로 오록충종이 대군 사람일 가능성이 생겨버렸음. 하지만, 유림전의 구절은 그렇게 해석이 안 되는 건 여전하고... 그래... 반고를 까자...

경조윤 윤립[편집]

윤상의 아들로, 경조윤을 지냄. 일단은 전한의 경조윤으로 해석되는데... 사실 윤상 자체가 평제 때 죽은 양반인데다가, 그만큼 윤립 또한 활동시기가 뒤로 밀려나기 때문에, 사실은 신나라 때 경조윤... 즉 경조대윤을 지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듦. 윤립을 칭송하는 비가 있다는 기록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그게 적힌 서적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 나란 놈은 정말...

요양후 강인[편집]

한서 경무소선원성공신표에 따르면, '6년', 강덕의 뒤를 이어 요양후에 봉해짐. 연호 없이 '6년'이라고만 적혀 있는데, 강덕이 파면된 후부터 강인이 작위를 유지할 때까지의 연호들 중, '6년'이 존재하는 것은 원봉 단 하나뿐임. '원봉 6년'의 탈자라고 강하게 믿고 싶은데, 청나라의 고매한 선생들은 왜 아무도 연구를 안 한 걸까?

적공 = 적불의[편집]

그냥, 시나리오가 기가 막혀서...

첨사 융노 = 박융노[편집]

사기 권22에, 문제 사후 효문태후를 모신 인물로 단 한 번 등장하는 첨사 융노... 효문태후의 조카 박융노가 황후첨사로서 자기 고모를 보살핀 것으로밖에 보이질 않음.

의외의 악당[편집]

이충[편집]

사례교위는 정화 3년(BC90), 무제무고 조사를 맡길 요량으로 처음 설치한 관직. 최초의 사례교위라는 명시적 기록은 없지만, 정황상 이충이 최초의 사례교위인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옥사를 관장할 정위강충이 미쳐 날뛸 즈음부터 무제가 죽는 그날까지 숱하게 갈려나간 걸 보면(··), 무제는 정위의 일처리도 맘에 안 들어서 그네들도 같이 조졌는가 싶기도 하다. 그러니까 사례교위를 신설해서 무고 수사를 전담하게 했겠지.

意의 정위 취임 추정시기와 이충의 사례교위 취임 추정시기가 동일한데, 어쩌면 意만큼은 이충과 콤비로 애들을 조졌을 지도 모를 일. 아니, 오히려 이충이 효소제 즉위년에 정위로 임명된 걸 보면, 意도 끝이 좋지 않았을 것 같다. 意와 이충의 정위 취임 사이에 공백이 있는데, 오히려 이때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산화한 또 다른 정위들이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충은 효소제 원년에 정위로 전임되었다. 왜일까?

  1. 사례교위 때 환상적으로 애들을 조져서, 효소제가 '이놈 이거 잘 조지네 껄껄껄' 하고 정위 감투를 씌워준 건가?
  2. 무제가 죽었으니, 더 이상 무고에 매달릴 필요가 없어서?

아마 둘 다 해당하지 않을까...

이충의 죽음은 곽광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임선任宣이 곽우에게 한 말), 어쨌든 표면적 이유는 '방자하게 행동한 죄'이다. 사례교위 시절에 원한을 많이 산 것은 아닐까?

이충이 최초의 사례교위이건 아니건 간에, 무제 말년의 사례교위는 엄청난 녀석이었을 게 분명하다. 한 짓을 보면 혹리전에 당당히 이름을 실어야 할 모양새인데, 이름자는커녕 여태자 사후의 무고 대숙청 관련 기록이 본기에조차 없는 상황이니, 원... 저소손은 대체 뭘 한 거야?

우정국[편집]

20년 가까이 정위를 지낸 그. 본인의 열전에는 어질고 올바른 관리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가 정위로 있던 시절에 벼슬 또는 모가지가 달아난 사람이 한둘이 아녔다.

아마 더 있겠지.

숨겨진 명신들?[편집]

장무[편집]

문제대나라 왕이었을 때부터 낭중령이었고, 문제가 장안에 들어온 그날 밤부터 바로 황실의 낭중령이 되고, 문제가 죽는 그날까지 계~~~~속 낭중령을 지내, 문제의 장례까지 주관한, 문제의 영원한 보디가드. 경제가 즉위한 후 낭중령은 바로 주인으로 교체되었고, 장무는 사서에서 증발함. 이 정도면, 장무가 문제를 따라 죽었으리라는 망상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

문제가 대나라에서 데려온 구경들 중, 오로지 장무만이 문제가 죽을 때까지 자리를 지킴. 문제 치세의 낭중령은 장무 단 한 사람이었음.

전청천[편집]

집금오·정위 역임. 정적들 까기 좋은 관직을 2연타로 거쳤는데, 출신성분을 도무지 알 수 없음. 건질 만한 건 위엄 쩌는 이름자(聽天... 포청천 따윈 아무것도 아니다) 정도?

대홍려 현[편집]

백관공경표에 이름자만 남긴 애들 중에선 상당히 안정적으로 관직을 지켰는데(11년간 대홍려 재임),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음. 병현이랑 동일인물인가 싶었지만, 아귀가 안 맞는 걸 알고 포기.

염포[편집]

염파의 후손·서역도호라는 후덜덜한 명함. 심지어 반고의 찬贊에 따르면, 서역도호 당시 선정을 베푼 인물. 정작 조정에 불려온 이후에는, 순우장이 죽을 때 도매금으로 숙청된 이후 등장이 없음. 반고의 찬이 없었으면 그냥 간신 정도로만 기억되었을 듯.

염파의 후손이란 사실은 한서에서는 입도 뻥긋 안 하고 있고, 후한서 염범전(廉范: 염포의 손자)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음. 그래... 그냥 반고를 까자.

한훈[편집]

알짜 관직(우부풍·중소부·집금오·우장군)을 두루 거치다가 죽은 양반. 한연수의 손자 한위韓威가 혹시 이 사람은 아닐까...

사요[편집]

백관공경표만 봐도 상당한 존재감을 내뿜은 사람 같은데, 표를 벗어나먼 기록이 전혀 없음. 마치 소창 같은 사람이랄까... 아니다. 소창은 창읍왕 폐위 때 동조한 기록이라도 보이지, 사요는 진짜로 없다.

칼도 만져보고(집금오), 공구리도 쳐보고(장작대장), 도장도 좀 만져보고(대홍려), 광역시장도 해본(우부풍) 양반인데... 진짜 이것저것 다 해본 양반인데... 은퇴할 때 평제가 고생했다고 연금도 챙겨준(관내후) 양반인데(실제론 왕망이 챙겨준 셈)... 진짜로, 기록이 하나도 없다.

謝씨는 심지어, 전한의 가문들 중 따로 찾아볼 만한 기록도 없다. 진짜 그냥 입지전적인 인물인 건가? 지방 토호 정도의 집안에서 성공한 건가? 그나마 경시제 때 인물인 사궁謝躬이 사요와 성씨도, 출신지도 같아서 같은 가문으로 생각되긴 하는데... 이 녀석은 신나라 멸망 후부터 기록이 있는 놈이라 써먹을 건덕지도 없다. 왕망의 따까리 사은謝殷이 그나마 사요와 가까운 세대의 인물인데(유자 시기), 출신지를 알 수가 없어서 아쉽게도 논외.

이쯤 되면 좀 무리한 바람이긴 하지만, 한서에 관내후표가 있었더라면 해결되지 않았을까 싶다. 예를 들어... 공손용·호천의 난 진압으로 전광명 등이 포상을 받을 때, 용감하게 꼽사리 껴서 무제로부터 관내후를 받은 아무개... 한서에는 전혀 이름이 안 나오지만, 금석문으로 알 수 있음(국삼로원량비). '아무개'의 주인공은 원간이란 인물로, 부락 원씨(원환의 집안)의 시조격 인물. 왕선겸도 지적한 바이지만, 한서에 관내후표가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비극임. 저 비문이 아니었더라면, 이름을 영영 알 수 없었을 것. 사요도 그렇고, 경수창도 그렇고... 관내후 중에는 뒷배경이 궁금한 인물들이 너무너무 많은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