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초칠국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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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초칠국의 난
날짜 기원전 154년
장소 중원 동부
결과 전한 제국의 승리
교전국
전한 제국
7왕국
오 왕국, 초 왕국, 교서 왕국, 조 왕국, 교동 왕국, 치천 왕국, 제남 왕국
지휘관
경황제,
주아부
유비
병력
360,000 200,000 (오 왕국)
300,000 (그 외)
피해 규모
미상 거의 전멸

기원전 154년 경제(景帝)는 과격한 정치가 조조(晁錯)의 적극책을 채용하여 제후왕의 죄를 폭로한 다음에 조(趙), 교서(膠西), 초(楚) 등의 영지를 깎아 왕국의 축소책을 노골적으로 추진해갔다. 이에 화가 자신의 몸에 미칠까 두려워한 오왕(吳王) 유비(劉濞)는 초, 교서, 조, 교동(膠東), 치천(菑川), 제남(濟南)의 제후왕과 공모하여 황제 측근의 간신인 조조를 칠 것을 구실로 선수를 쳐서 군사를 일으켰다. 이 사건을 오초칠국의 난(吳楚七國-亂)이라고 한다.

이 제후왕의 반란은 주아부(周亞夫)가 거느린 정부군의 교묘한 전략에 의해 오왕은 살해당하고, 오와 공모한 제후왕도 모두 살해당하여 전란은 불과 3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이 싸움에서 한의 조정이 승리를 거둔 것은 제후왕에 대한 조정의 우위(優位)를 결정지어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한초(漢初)의 정치사상 오초칠국의 난의 평정이 지닌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국내의 제후왕 문제는 오초칠국의 난을 계기로 하여 크게 진전되었으나, 한편 진말(秦末), 한초(漢初)의 중국의 혼란을 틈타 중국에 침입해 들어온 흉노(匈奴)에 대한 대책은 국내사정으로 인해 거의 방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국내의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그 국력을 발휘하여 흉노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중국의 국위(國威)를 신장하는 것이 다음 위정자에게 남겨진 커다란 정치과제였다.

참고 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