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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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파(廉頗, 생몰년 미상)는 중국 전국시대 (趙)의 명장이다. 노년의 나이에도 젊은 장군에 못지 않은 완력을 보여 《삼국지》의 황충과 함께 중국의 대표적인 노익장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또한 같은 시대 재상 인상여(藺相如)와의 교우는 「문경지교(刎頸之交)」라는 고사의 유래가 되기도 하였다.

생애[편집]

전반생의 활약[편집]

기원전 283년, 염파는 장군으로서 (秦)을 쳐서 석양(昔陽)을 차지하였다. 기원전 282년에는 (齊)를 쳐서 양진(陽晋, 지금의 산동 성山東省)을 함락시킨 공으로 상경(上卿)에 임명되었으며, 그의 용기는 당시 제후들 사이에서 유명한 것이었다.

문경지교[편집]

《사기(史記)》에 따르면, 당초 조의 총대장으로서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운 자신에 비하면 단지 말재주만 가지고 출세하여 지위가 자신보다 높아진 인상여에 대해 험악한 감정을 품고 이 불만을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털어놓았다. 이 소문을 듣고 인상여는 병을 핑계로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데, 며칠이 지나고 가신(家臣)을 데리고 마차로 산책을 나갔던 인상여는 길에서 염파의 모습을 보고 길을 바꾸어 그를 피해버렸고, 염파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야 되돌아왔다. 이를 지켜본 가신들은 그 날 밤 한자리에 모여 "나리의 필부와 같은 행동이며 그것을 부끄러워하시지도 않는 태도를 참을 수가 없습니다"라며 사직을 청했는데, 인상여는 "저 강대한 진나라가 어째서 우리 나라를 멸하지 못하고 있는 줄 아는가? 그건 나와 염파 장군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염파 장군과의 사이에 문제라도 생기면, 그것이야말로 진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한 것은 국가를 위한 것이었다."며 가신들을 달랬다. 이 이야기는 곧바로 궁중에 퍼졌고, 염파는 웃옷을 벗고 등에는 가시나무를 진 채 인상여를 찾아가, 자신의 부덕함과 어리석음을 사죄하며 "이 가시나무 채찍으로 나를 매우 쳐주시오"라며 손에 든 채찍을 내밀었다. 상여는 "장군은 조나라요"라고 대답했고, 염파는 "그대를 위해서라면 그것이 내 목을 치는 일이라고 해도 후회하지 않겠소이다"라고 했고, 인상여도 "나 또한 장군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을 내놓겠소."라고 대답하였다. 「문경지교」 또는 「문경지우(刎頸之友)」라는 고사는 이 일화에서 비롯되었다.

노익장[편집]

천하통일을 꿈꾸던 진은 장군 백기(白起) 등에게 명하여 타국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염파와 인상여가 건재한 가운데 진의 침공을 받지 않고 있던 조에서 인상여가 병으로 쓰러지고, 염파 또한 여든을 넘긴 고령인 와중에, 기원전 260년 진의 장수 왕흘(王齕)이 조의 상당(上党)을 함락시켰다. 상당의 피난민을 구출하기 위해 파견된 염파는 그곳에서 진군의 기세를 둘러본 뒤 요새에 틀어박혀, 싸움은 장기전이 되었다.

적지 안에서 장기전을 벌이는 것에 위기감을 느낀 진은 계책을 짜서 역전의 맹장인 염파 대신 젊고 경험이 부족한 조괄(趙括)이 총대장이 되도록 획책했다. 진의 획책에 넘어간 효성왕(孝成王)은 총대장을 염파에서 조괄로 교체했고, 이 소식을 들은 인상여는 중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와중에 왕궁까지 찾아가 효성왕에게 간했지만 효성왕은 듣지 않았다. 결국 조군은 참패하고, 포로가 된 40만 병사는 진에 의해 모두 생매장당했다(장평 전투).

이후 조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는데, 염파는 늙은 몸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장평 전투 이후 조의 쇠퇴를 지켜본 (燕)의 연왕(燕王) 희(喜)는 그 틈을 노려 조군을 침공하지만, 염파는 지금의 하북 성(河北省) 백향현(柏郷県) 북부에서 연군을 크게 쳐부수고, 연군을 추격해 연의 도읍이었던 계(薊)를 포위한 채 연으로부터 다섯 성을 할양받고 화친을 맺었다. 진에서도 염파가 있는 조에는 더 손을 뻗지 못하는 가운데 조의 효성왕은 염파의 오랜 공적을 기려 위문(尉文)이라는 읍의 땅을 내리고 신평군(信平君)에 봉했으며, 기원전 251년에 평원군(平原君)이 사망하면서 공석이던 상국(相国) 대행에 임명되었다.

불우한 만년[편집]

기원전 245년, 염파는 (魏)를 쳐서 번양(繁陽, 지금의 하북 성 내황 현内黄県)의 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그 직후 조에서는 효성왕이 죽고 도양왕(悼襄王)이 즉위하였는데, 태자 시절부터 염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도양왕은 그를 장군직에서 파면시켰다. 이에 한을 품은 염파는 후임 장군이 된 악승(樂乘)을 공격했고, 이 일로 더 이상 조에 머무르지 못한 채 위의 대량(大梁, 지금의 하남 성河南省 개봉 시開封市 서북쪽)으로 망명하게 된다(악승 또한 다른 나라로 망명). 염파는 위에서 별다른 신임을 얻지 못하고 대군을 통솔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염파가 사라진 조는 새로 진의 왕으로 즉위한 영정(嬴政)에게는 가장 좋은 표적으로 지목되었다. 조에서는 염파에게 사자를 보내 귀국을 허락했고, 염파는 연로한 몸으로도 한 끼에 밥 한 말, 고기 열 근을 먹었으며 갑옷을 입고 말에 오르는 건강한 모습을 보이며 자신이 아직 쓸모 있음을 사자에게 보이고(一飯斗米肉十斤, 被甲上馬, 以示常可用) 귀국 요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염파가 조에 있을 때부터 그와 불화하던 간신 곽개(郭開)의 모략에 넘어간 사자는 조왕 앞에서 "사신을 만나는 도중에 세 번이나 오줌을 쌌는데 그걸 눈치채지도 못했다(三度遺失)"며 참언해버렸다. 결국 조왕은 염파가 너무 나이가 들어 쓸 수 없겠다며 포기해버렸다. 염파는 훗날 다시 (楚)로 망명했지만, 장군으로 임명되지도 공을 세우지도 못한 채 수춘(壽春)에서 병사하였다.

인물됨[편집]

  • 상당히 많은 양을 먹는 대식가로 전하고 있다. 한 끼에 쌀 한 말과 고기 열 근을 먹었다고 한다.
  • 만년에 다른 나라로 망명해서도 고향 조에 대한 생각을 하며 "(전투를 하게 된다면) 조나라 사람을 지휘해 싸우고 싶다"고 했다.
  •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에서 염파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를 인상여와 더불어 스러져가던 조를 지탱한 기둥으로 보았던지 인상여와 조사(趙奢) ・ 이목(李牧)과 함께 명장의 한 사람으로서 열전을 지었다. 《소자고사(蘇子古史)》에서는 염파를 높이 평가하여 「국가의 주춧돌」로까지 평가하였다.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