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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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00년의 위나라

(魏,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5년)는 전국 시대칠웅 가운데 하나이다. (晉)나라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한나라, 조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고 일컬어진다.

토지가 사방 일천 리에 달했으며, 춘추전국시대의 국가 중 가장 인구가 많았던 나라이다. 갑병 30만과, 말 오천 필, 전차 육백 승을 낼 수 있었다.

정치[편집]

변법(變法) 운동의 선구자 이회, 관개사업에서의 서문표(西門豹)의 활약은 유명하다. 문후(文侯)가 이회를 등용하여 새로운 경제정책을 실시하고, 토지제도와 농업기술의 개혁을 단행하여 열국(列國) 중에서 최초로 부국강병의 길을 열었다. 이회는 또한 『법경(法經)』이라는 새로운 법률서를 만든 법률학자이기도 했다.

원래 주나라봉건제 밑에서는 정치는 덕(德)의 이념에 의해서 뒷받침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집권국가가 되자, 덕의 이념은 아무런 권위도 갖지 못하게 되고 힘에 의한 법술(法術)이 권위 있는 이념이 되었다.

즉,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부국강병의 정책으로 나타나, 법률이 그 수단으로서 새로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위나라는 전국 초기에 있어서의 이같은 새로운 이념의 연구와 실천의 중심지였다.

문후(文侯)의 인재 등용, 관개사업 추진에 의해 다른 6국에 앞질러 세력을 얻어, 위나라 수도 안읍(安邑)은 전국 초기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225년 결국 진나라가 공격했고 진나라 군대의 수공으로 수도 대량성이 침수당하면서 위나라는 진나라에게 멸망당하게 된다.

역대 군주[편집]

삼진 분립 전의 위씨종주(魏氏宗主)[편집]

대수 칭호 재위 기간 비고
1 무자(武子) 주(犨)  ? ~ 기원전 594년 필만(畢萬)의 손자이자 망계(芒季)의 아들.
2 도자(悼子)  ? 무자의 아들.
3 소자(昭子)[1] 강(絳)  ? ~ 기원전 550년 무자의 아들.
4 헌자(獻子) 서(舒)[2] 소자의 아들.
5 간자(簡子) 취(取) 헌자의 아들.
6 양자(襄子) 치(侈)[3] 기원전 508년 ~ 기원전 482년 간자의 아들.
7 환자(桓子) 구(駒)  ? ~ 기원전 446년 양자의 아들.

삼진 분립 후의 위나라 군주[편집]

대수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 문후(文侯) 사(斯) 기원전 425년 ~ 기원전 387년
2 무후(武侯) 격(擊) 기원전 387년 ~ 기원전 371년
3 혜왕(惠王) 앵(罃) 기원전 370년 ~ 기원전 319년
4 양왕(襄王) 사(嗣) 기원전 319년 ~ 기원전 296년
5 소왕(昭王) 속(遬) 기원전 296년 ~ 기원전 277년
6 안리왕(安釐王) 어(圉) 기원전 277년 ~ 기원전 243년
7 경민왕(景閔王) 오(午) 기원전 243년 ~ 기원전 228년
8 (假) 기원전 228년 ~ 기원전 225년

주석[편집]

  1. 또는 장자(莊子)
  2. 또는 도(荼)
  3. 또는 치(哆) 또는 만다(曼多)


참고 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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