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 (화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박영선
신상정보
출생 일제강점기 평양부
사망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분야 서양화
주요 작품
영향

박영선(朴泳善, 1910년 4월 10일 ~ 1994년 6월 15일[1])는 한국의 서양화가이다.

생애[편집]

평양 출신이다.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등단한 뒤, 일본에 유학해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한국과 일본의 서양화가들이 공동 결성한 단광회에 가입해 활동하였고, 호전적인 미술 작품을 전시한 결전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했다.[2] 이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가운데 미술 부문에 포함되었다.

광복 후인 1946년 좌익 계열 미술인 모임인 조선미술가동맹이 김주경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추대해 결성되었을 때 중앙집행위원과 회화부 위원장을 맡았으나[3], 이후 조선미술가동맹이 조선미술동맹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정치 논리가 미술에 개입하는데 대하여 반대하고 순수미술을 옹호하여 우파적 입장을 개진하였다.[4] 이화여자대학교, 홍익대학교, 서라벌예술대학, 중앙대학교 미술대학의 교수를 지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역임했고, 1969년 3·1문화상, 1982년 국민훈장 문화장을 받았다.

박영선은 누드화를 포함하여 여성을 소재로 한 인물화를 즐겨 그렸다. 색채와 구도를 강조하는 화풍은 서양화의 우아함과 세련됨이 가득하여 현대적인 느낌을 주며, 여성의 얼굴도 서구형으로 묘사된다. 1955년부터 4년간 프랑스에 유학하여 활동하면서 작풍에 큰 변화가 일어나 이 시기를 기점으로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파리 유학 전에는 사실주의적 경향이 강했으나, 유학 후에는 환상적이고 추상적인 화풍으로 변화했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자료[편집]

각주[편집]

  1. “원로서양화가 朴泳善씨 별세”. 동아일보. 1994년 6월 16일. 30면면. 
  2. 김민수 (2004년 9월 5일). "당시 친일 안한 사람은 실력이 없었어" - 소위 '재능론·상황론·전국민 친일론'을 반박함”. 오마이뉴스. 2008년 6월 16일에 확인함. 
  3. 편집부 (1999년 12월 22일). 《한국현대 예술사대계 1 (해방과 분단 고착 시기)》. 서울: 시공사. 241쪽쪽. ISBN 895270522X. 
  4. 편집부 (1999년 12월 22일). 《한국현대 예술사대계 1 (해방과 분단 고착 시기)》. 서울: 시공사. 255쪽쪽. ISBN 895270522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