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엘 데 고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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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데 고도이

마누엘 데 고도이(Manuel de Godoy y Álvarez de Faria, 1767년 5월 12일 ~ 1851년 10월 7일)는 스페인의 귀족이자 정치가이다.

생애[편집]

출세[편집]

고도이는 1767년 바다호스 지방의 카스투에라(Castuera)에서 가난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1784년 근위부대에 입대해 마드리드로 상경한 고도이는 1788년 스페인의 왕위 계승자인 카를로스를 만나게 되었다. 카를로스와 그 아내 마리아 루이사는 고도이를 무척 총애하여 그는 급속도로 승진을 거듭해 1790년 8월, 지휘관이 되었으며 이듬해 7월에는 육군 중장이 되었다. 1791년 총리 플로리다블랑카(Floridablanca)는 고도이와 왕비가 애인 관계에 있다고 폭로하였으나 그는 이듬해 초 실각했다. 후임 아란다(Aranda) 총리 또한 10개월만에 실각하고 1792년 11월 15일, 고도이는 총리가 되었다. 그는 알쿠디아(Alcúdia) 공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황금양모 기사단의 단원이 되었다. 또 이듬해에는 총사령관, 스에카 공작, 알바레즈 후작, 소토 데 로마(Soto de Roma) 경에 봉해졌다.

스페인 총리[편집]

1793년 루이 16세의 처형이 이루어지자, 프랑스 공화정에 대한 스페인의 입장은 보다 강경한 것이 되었다.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으로서 프랑스와 전투를 벌인 스페인은 1795년 이스파뇨라 섬 일부를 프랑스에 넘긴다는 것을 조건으로 바젤 조약을 체결하고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고도이는 평화대공(Príncipe de la Paz)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1797년 잠시 총리직에서 물러났던 고도이는 1801년 다시 총리로 복귀하여 포르투갈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듬해에는 아미앵 조약을 통해 트리니다드 섬을 양보하는 대신 미노르카 섬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아미앵 조약으로 맺어진 영국과 프랑스의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고 1805년 스페인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영국과 전쟁을 하게 되었다. 10월 21일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완패를 겪은 고도이는 1807년 나폴레옹과 퐁텐블로 조약을 체결해 향후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 했지만, 같은 해 프랑스는 스페인을 침공했다. 고도이는 카를로스 부처와 함께 아랑후에스로 피신했지만 아랑후에스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카를로스는 고도이의 재산을 몰수하고 감금했다. 이후 카를로스가 나폴레옹의 요구로 퇴위를 하자 고도이는 수 년간 카를로스 부처 및 딸들과 함께 망명 생활을 했다.

망명 생활[편집]

마르세유로마 등지를 떠돌던 고도이 일행에게 카를로스의 아들 페르난도 7세의 복위 소식이 들려왔으나 그는 부모와 고도이가 스페인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되자 고도이 일행은 베로나로 몸을 피했고, 그 뒤 고도이만 페자로에 남은 채 카를로스 부처는 로마로 향했다. 카를로스의 애인 페피타와 그 아들은 피사에 정착했으며, 고도이는 나폴리에서 카를로스의 임종을 지켰다. 페르난도 7세는 카를로스의 사후에도 고도이의 귀국을 금지했으며 연금도 지급하지 못하도록 했으나 1821년 고도이의 딸 카를로타가 로마의 왕족과 결혼하는 것은 인정했다. 고도이는 카를로스의 애첩이자 자신의 애인이었던 페피타와 결혼했고 1832년 파리로 건너가 여생을 보냈다. 1836년에는 비망록을 출판했으며 1847년에는 스페인 정부로부터 지난날 몰수된 재산의 일부를 돌려받았다. 고도이는 1851년 10월 7일 파리에서 죽었고 이듬해 페르 라쉐즈 공동묘지에 이장되었다.

가족[편집]

1797년 왕비 마리아 루이사는 고도이의 결혼을 주선했고, 그의 신붓감으로 남편 카를로스 4세의 사촌인 마리아 테레사를 택했다. 이는 고도이의 여성편력을 청산하고 동시에 자신과의 염문을 없애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한다. 고도이와 마리아 테레사는 그 해 10월 2일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서는 딸 카를로타 루이사가 태어났다. 두 번째 아내이자 오랜 애인이었던 페피타와의 사이에서는 마누엘과 루이스 두 아들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