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황제 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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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황제 숭배 (라틴어: cultus imperatorius)에서는 황제들과 황제 가문의 일원들의 일부 등에게 고대 로마에 대한 신적 인정을 받은 권위 (아욱토리타스)가 있다고 보았다. 황제 숭배에 대한 체계는 로마와 그리스의 선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아우구스투스의 초기 원수정 당시에 구축되었다. 황제 숭배는 로마 제국과 그 속주들 전역에 빠르게 자리잡았고, 숭배에 대한 반응과 표현에 있어서는 지역마다 차이가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개혁들은 고대 로마의 공화정 체제를 전통적 로마의 관습들과 공화정의 가치들로 표현된, 사실상의 군주제로 전환시켰다. '프린켑스' (황제)는 , 원로원과 민중 등의 이해관계의 균형을 잡고, 민족적으로 방대한 제국 전역에 평화, 안보, 번영을 유지해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살아있는 황제에 대한 공식적인 '숭배' 의식은 그의 지위와 지배를 신성성을 띠는 허용되는 것이고 합법적인 것으로서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은 전통적인 공화정의 신들과 그 이상들에 대한 경건한 존중을 표현해야만 했다.

경의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죽은 황제는 원로원을 통해 국가의 신적 존재 ('divus', 복수형 'divi')로 선정되거나 이른바 신격화라는 행위로서 높여질 수 있다. 신격화를 부여하는 것은 제국의 지배자에게 종교적, 정치적, 도덕적 평가 역할을 해주었고 살아있는 황제들한테는 그들을 인기없거나 자격 없는 전임자들과는는 배제된, 신격화된 황제의 혈통의 저명한 혈통과 연관시켜주었다. 이는 베스파시아누스네로의 죽음과 내전 이후 플라비우스 황가를 이룩하는 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콤모두스 암살 이후 세베루스 황가를 구축하는 데 유용한 도구임을 보여주었다.

황제 숭배는 로마의 공식적인 신들에 대한 숭배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공식적 신들에 대한 숭배는 로마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었고 따라서 이들에 대한 냉담은 반역 행위이었다. 황제 숭배에 대한 전통적 형식은 데키우스디오클레티아누스 시기 황권 회복주의에 대한 확립에 초점이 있었다. 이에 따라 콘스탄티누스 1세 때 기독교의 우세가 이뤄졌던 동안 신학적 그리고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율리아누스가 로마의 공식적 종교 관례에 대한 줄어가던 지지를 되돌리는 데 실패하였고, 테오도시우스 1세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로마의 전통적 신들과 황제 숭배는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배경[편집]

로마[편집]

황제 부부를 묘사하기 위해 다시 만들어진 베누스와 마르스 조각상 (최초: 서기 120년–140년, 재제작 170년–175년)

다섯 세기 동안, 로마 공화정은 신성성을 띠거나 반신성성을 띠는 군주더라도 과거 인물, 살아있는 사람 등 그 누구에 대해서 숭배를 하지 않았다. 로마의 전설적인 왕들도 마찬가지였으며 이들을 지워버린 채 로마 공화정은 자신들의 도시 건설자인 로물루스를 신 퀴리누스와 동일시 여겼고 공화주의적 자유를 유지할 수 있었다. 유사하게, 로마의 선조이자 영웅인 아이네아스유피테르 인디게스로 숭배받았다.[1] 로마인들은 일부 신들 및 인간이었던 반신들을 숭배했으며, 모든 신들이 인간들로부터 비롯했다는 이론을 알고 있었, 공화정 전통 ('모스 마이오룸')은 확고하게 보수적이었고 반군주적이었다. 귀족 계층들은 거의 모든 로마의 정무직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로마 원로원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며, 그 어떤 자라도 자신들보다 우월한 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살아있건 죽어있건 어떠한 시민도 신성성을 띠지는 못했으나 화관, 조각상, 행진 등 신들에에게 적합하며 신성성이 가미된 행위들을 부여받으며 존중[2]을 받았는데 실제로 시간이 흘러 로마 황제들은 국가적 숭배를 받았을 때, 다른 어떤 영예와 마찬가지로 원로원의 칙령을 통해 이뤄졌다.[3]

최고 영예 중에 하나가 개선식이었다. 한 장군이 병사들로부터 '임페라토르'로 선언을 받으면, 원로원은 이후 그에게 제국의 수도에서 개선 장군이 법률을 통해 비무장한 병사들 무리와 함께 전쟁의 포로들과 전리품들을 보여주는 개선식을 선사하는 것을 택할 수 있었다. 개선 장군은 고대의 로마 왕들로부터 전해내려온 것으로 추측되는 방식인 신성한 문장들이 새겨진 전차를 탑승했고, 유피테르 카피톨리누스에서 그의 승리를 봉헌하는 것으로 끝을 냈다. 일부 학자들은 개선 장군이라는 것이 개선식 날 왕이나 신 (또는 둘 다)을 모방하거나 되는 것이라 보면서도 개선식의 정황이나 그 이후의 의식들이 그의 지위를 제한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기도 했다. 개선 장군의 개인적 야망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의 승리와 개선식은 로마의 원로원, 민중, 신들에게 똑같은 역할을 작용하였고 이들의 허락을 통해서만 인정받았다.[4][5]

개인 생활 면에서도, 공화정의 전통은 몇몇 인간들은 신성성을 더 띠거나 덜 띠어지게 다뤄질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숭배는 가정의 아랫 사람에서 윗 사람에 대한 것에서 비롯했다. 모든 가주들은 선조들의 '게니우스' (수호령)를 갖고 있었고, 가정 내 다른 사람들은 그를 숭배하고 가족들과 노예들은 그에 대한 맹세를 하였다.[6] 예속된 평민은 그의 후원자에 대해 '지상의 유피테르'라고 부를 수 있었다.[7] 집단으로 그리고 혼자이던 죽은 자들은 지하 세계 또는 사후 세계의 신들('마네스')이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의 남아있는 서신에서 그녀가 죽었을 때 아들들이 그녀에 대해 어버이 (또는 육아)의 신성성을 띠는 '데우스 파렌스'로서 숭배해주기를 바라고 있으며 이에 대한 효심은 충실한 아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8]

유력한 가문들은 자신들의 가주에게 신적 영향력과 준신적인 영예를 주장하기도 했다. 모든 유명 로마인들의 데스 마스크 ('이마기네스')가 제작되었고 이들 저택의 '아트리움'에서 전시되었는데 이 마스크들은 가문의 장례 때 유명인들의 영적인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코르넬리아의 아버지이자 한니발에 승리를 거둔 인물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데스마스크는 유피테르 신전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그의 비문 (엔니우스가 저술)에서는 그가 천상으로 승천했다고 한다.[8] 스키피오가 죽고 나서 수 세기 동안에 그가 예지몽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자신이 유피테르의 아들이었다라고 하는 전승이 생기기도 하였다.[9]

군사적 또는 정치적 인물을 구원자로 보는 비공식적인 숭배에 대한 사례들이 존재한다. 기원전 70년대의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에서, 충성파 로마인들은 프로콘술 메텔루스 피우스를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평민파(populares)의 일원인 세르토리우스가 주도한 루시타니아 반란을 진압하려는 그의 활동들에 대해 "마치 신에게 하는 것처럼" 향을 피웠다. 스페인에서 그에 대한 행사에서 토착 및 수입된 별미의 음식들로 된 화려한 만찬이 곁들여졌고, 개선 자군의 '토가 픽타'를 착용 (불법적)한 메텔루스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기 위한 빅토리아 여신의 기계로 작동되는 조각상이 등장했다. 이러한 행사들은 재무관[10]인 가이우스 우르비누스가 기안한 것으로, 로마 정부의 공식적인 지침은 아니었다. 메텔루스 본인은 이러한 것들을 좋아했지만, 그보다 연장자 및 독실한 (veteres et sanctos) 동시대인들은 이를 거만하고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11][12] 토지 개혁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가이우스 그라쿠스 등이 반대자들에게 살해된 뒤, 그라쿠스 형제의 지지자들은 "마치 신들의 성소에 방문한 것처럼" 그라쿠스 형제의 조각상에 '엎드리고' 매일 공물을 바쳤다.[13] 가이우스 마리우스튜튼족들을 격퇴시키고 나서, 평민 시민들은 자신들의 게니우스들(수호령)과 더불어 그에게 음식과 마실 것을 바쳤으며 그는 로물루스 그리고 카밀루스에 이어 로마의 세 번째 설립자로 불렸다.[14] 기원전 86년에는, 성소들이 교차하는 곳에 있던 마리우스의 조카이자 여전히 살아있는 인물이던 마리우스 그라티디아누스의 조각상에 향이 피워지고 포도주가 공물로 바쳐졌는데, 그는 법무관 시절에 로마의 경제 위기를 완화시킨 화폐 개혁이라는 부분에서 스스로 많은 인기를 얻어냈다.[15]

그리스[편집]

제우스 암몬과 같은 뿔이 달린 디아뎀을 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모습이 담긴 르푸세 펜던트. 알렉산드로스의 형상은 마술을 띤 부적으로서 착용되었다 (기원전 4세기 로마).

로마인들이 그리스 세계의 많은 영역을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 로마에서 파견된 고위 대표자들은 그리스에서 헬레니즘 시대의 지배자들같이 마찬가지로 신성성을 띠는 영예를 부여받았다. 이는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이 외부 세력에 자신들의 충성을 나타날 때 쓰던 잘 확립된 방식이었다. 이러한 숭배는 그리스 도시가 아폴론이나 다른 신들에게 자신들이 복종하거나 존경을 보이는 것처럼 왕들에게 복종하고 존경을 표하는 것이었다.

이오니아의 그리스 도시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직후에 직접 그리스를 지배했던 스파르타의 장군 리산드로스를 숭배했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 숭배는 그리스 역사상 통치자 숭배에 대한 첫 번째 예시라고 한다. 같은 세기에 인간들에 대한 신성성 숭배의 유사한 예시들이 있었으며, 아게실라오스 같은 일부 지도자들은 이런 행위를 거부하였다.[16] 헤라클레이아의 참주 클레아르코스제우스처럼 차려 입고 스스로를 신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헤라클레이아인들이 그를 살해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이소크라테스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고 나면 신이 되고 것 외에는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도시 암피폴리스와 아테네의 비밀 조직은 이 정복 없이도 그를 숭배했었으며, 필리포스 2세는 신처럼 차려입은 자신의 조각상을 올림포스 12신의 13번째 신으로서 설치하였다.[17]

하지만 그리스인들 사이에 왕들의 신성성이라는 표준 관습을 만들어낸 것은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었다. 이집트인들은 그가 이집트에서 페르시아인들을 몰아내자 그를 파라오로, 이에 따라 신성성을 받아들였으며 다른 민족들도 그가 자신들을 차지할 때마다 자신들만의 전통적인 신 또는 반신성성의 지배자로 받아들였다. 기원전 324년에, 그는 그리스들에 자신을 신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전하였다. 도시들은 이 명령을 무관심함을 띤 채 따랐고,[18] 이 숭배는 도시들이 다음 해에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라미아 전쟁이 벌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각주[편집]

  1. 유피테르 인디게스로서 아이네아스에 대한 숭배가 공식적인 숭배 (이에 따른 국가의 후원을 받았는가에 대해)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2. 해당 직위에 대응하는 정도
  3. Gradel, pp. 32–52, as is much of this section.
  4. 개선 장군의 지위 (그리고 개선식의 의미)에 대해서 이질적인 관점들의 요약은 Versnel, 56–93에서 참조 가능, limited preview via Books.Google.com
  5. Beard, 272-5: 개선 장군의 뒤 또는 근처에서 그에게 "단지 인간에 불과하다"라고 상기 시켜주거나 "뒤돌아 보거라"라고 유도하던 국가의 노예 (또는 다른 형태로서)들에 대한 아주 적은 기록들은 다양한 해석들이 열려 있다. 게다가 이 기록들은 공화정 이후의 것들이다. 그럼에, 이 기록물들은 개선 장군은 왕과 같은 외관, 잠깐의 신과 같은 지위나 신성성의 연관성 등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간에 그의 필멸자로서의 성격을 공공연하게 상기되었다. 이런 방식이 제정 시대에 새롭게 도입된 것이라 추측할 이유는 없다.
  6. Taylor, p.67
  7. Gradel, p.46, citing Plautus – this is Plautus' addition to the Greek originals; Gradel also suggests that the corona civica began as an acknowledgement by A.A. that N.N. had saved his life – as a god might – by crowning N.N. with the leaves of Jupiter's tree.
  8. Taylor, p. 55
  9. Walbank, 120-37. Books.Google.co.uk, Convenience link
  10. 아마 메텔루스 전속부관으로, 속주의 관료는 아니었을 것이다.
  11. Taylor, p.48; Taylor는 살루스티우스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용문인 마크로비우스의 'Saturnalia' 3.13.9를 인용하였다. 'quasi deo supplicabatur'는 살루스티우스한테서 비롯한 것이다. 정확한 시기는 불분명하며 사군툼 전투가 벌어진 뒤인 기원전 77년로 추정한다.
  12. 이 사건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의 'Facta et dicta memorabilia' 9.1.5에서도 언급된다
  13. Vout, 119: citing Plutarch, Gaius Gracchus, 10, 18.2. Loeb edition available at Thayer: Penelope.Uchicago.edu
  14. Taylor, p.48, 플루타르코스의 '마리우스'편, 27 인용
  15. Gradel, 51, citing Cicero, De officiis, 3.80: Stoics.com (accessed 2 August 2009).
  16. When the messengers of 타소스의 전령들은 자신들의 도시가 그를 신이라 선포하였다는 사실을 알리자, 그는 그들에게 당신네들이 인간을 신으로 만들 수 있다면 자기 자신들도 신으로 만들어야만 한다고 하였다. 그 뒤에 그는 그들이 그를 신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 Taylor, p. 12,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210d 인용.
  17. Taylor, pp. 12–13
  18. The Spartan decree was "Since Alexander wishes to be a god, let him be a god"; at Athens, Demades argued against provoking Alexander over this: don't protect Heaven and lose the earth; Demosthenes said "Let him be the son of Zeus – and Poseidon too, if he lik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