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 (오호 십육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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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前趙 [[304년]]~[[329년]])는 [[오호십육국시대]] [[유연 (흉노)|유연]]이 건국한 나라이다. 처음엔 국호가 한(漢)이었으나 후에 조나라로 변경하였다. 같은시대 [[석륵]]이 똑같은 이름의 조나라을 세웠기에 유연의 조나라를 '''전조''', 석륵의 조나라를 [[후조]]라고 구별지어 부르게 되었다.
'''전조'''(前趙 [[304년]]~[[329년]])는 [[오호십육국시대]] [[유연 (흉노)|유연]](劉淵)이 건국한 나라이다. 처음 국호는 한(漢)이었으나 후에 조(趙)로 변경하였다. 같은 시대 [[석륵]](石勒)같은 이름의 조(趙)를 세웠기에 유연의 조를 '''전조''', 석륵의 조를 [[후조]](後趙)라고 구별지어 부르게 되었다.


== 역사 ==
== 역사 ==
[[후한]] 말기부터 중국의 통일 왕조들은 [[흉노]]와 [[선비족]] 등 주변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였다. 특히 흉노의 분열 이후 남흉노 사람들이 대거 [[낙양]] 근처에 정착하면서 자연히 중국의 내부사정에 정통하게 되었다. 이들은 [[팔왕의 난]] 등 [[서진]] 황족들의 권력쟁탈과 그에 따른 통치능력 상실을 보고 독립하려는 야심을 가지게 되었다.
[[후한]](後漢) 말기부터 중국의 통일 왕조들은 [[흉노]](匈奴)와 [[선비족]](鮮卑族)주변 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였다. 특히 흉노의 분열 이후 남흉노가 대거 [[낙양]](洛陽) 근처에 정착하면서 자연히 중국의 내부사정에 정통하게 되었다. 이들은 [[팔왕의 난]] 등 [[서진]](西晉) 황족들의 권력쟁탈과 그에 따른 통치능력 상실을 보고 독립하려는 야심을 가지게 되었다.


[[후한]]에 굴복했던 남흉노 [[선우]]의 후예인 유연은 진나라로부터 흉노 5부 대도독에 임명되었으나, 8왕의 난이 일어나자 스스로 나라를 건국하고 국호를 ''''''이라고 명명했다.(유연의 아버지인 [[유표 (흉노)|유표]]는 후한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유씨 성을 하사받은 데에서 비롯됨.) 유연은 아들 [[유총]]과 친족인 [[유요 (전조)|유요]], 갈족의 [[석륵]] 등을 거느리고 [[병주]](并州) 일대를 공략했다.
후한에 굴복하였던 남흉노 [[선우]](單于)의 후예인 유연은 서진으로부터 흉노오부대도독(匈奴五部大都督)에 임명되었으나, 팔왕의 난이 일어나자 자립하여 나라를 건국하고 국호를 한(漢)으로 정하였다. 유연의 아버지인 [[유표 (흉노)|유표]](劉豹)후한에 의해 유씨 성을 하사 받았는데 이를 이유로 유연은 한의 부흥을 기치로 국호를 한(漢)이라 하였다. 유연은 아들 [[유총]](劉聰)과 친족인 [[유요 (전조)|유요]](劉曜), 갈족(羯族)의 석륵 등을 거느리고 병주(并州) 일대를 공략했다.


유연은 고조(高祖) 유방의 후손 국가인 [[후한]] 및 [[촉한]]의 후계자를 자부하였으나 실제로는 양쪽의 후예을 간접적으로 살해하였다. 산양공(山陽公)을 계승했던 [[유추]](劉秋)의 죽음으로 인해 후한왕실 직계자손은 끊어지게 되었다. 또한 촉한 소열제 [[유비]]의 자손은 [[성한]]으로 도망친 [[유현 (4세기)|유현]]만이 살아 남고 나머지는 [[영가의 난]]에 휘말려 살해당하여 절멸하였다.
유연은 한의 계승자를 자처하였으나 실제로는 왕실의 후예을 간접적으로 살해하였다. 산양공(山陽公)을 계승했던 [[유추]](劉秋)의 죽음으로 인해 후한왕실 직계자손은 끊어지게 되었다. 또한 [[촉한]](蜀漢) 소열제(昭烈帝) [[유비]](劉備)의 자손은 [[성한]](成漢)으로 도망친 [[유현 (4세기)|유현]](劉玄)만이 살아 남고 나머지는 [[영가의 난]]에 휘말려 살해당하였다.


[[310년]] 유연이 죽고 장남 [[유화]]가 제위를 물려받았으나, 폭군 유화는 인망이 없어 동생인 초왕 유총(3남) 모반을 일으켰다. 신황제 유화는 어머니측의 숙부 [[호연유]] 함께 유총과 내통하던 부하에 의해 살해되었다. 제위를 계승한 유총은 다음해 진나라 수도 낙양을 함락시켜 [[회제]] 사로잡았다.('''영가의 난''') 진나라는 장안에서 [[서진 민제|민제]]을 옹립하여 전조에 저항했으나 유총은 장안마저 함락시키고 민제를 사로잡았다. 이로써 서진은 멸망했고 이때부터 '''[[오호십육국 시대]]''' 시작되었다.
[[310년]] 유연이 죽고 장남 [[유화 (전조)|유화]](劉和)가 제위를 물려받았으나, 인망이 없어 동생 초왕(楚王) 유총이 모반을 일으켰다. 유화를 살해하고 제위를 계승한 유총은 [[311년]] 서진의 수도 낙양을 함락시켜 [[서진 회제|회제]](懷帝)를 사로잡았다.('''영가(永嘉)의 난''') 장안(長安)에서 [[서진 민제|민제]](愍帝)가 즉위하여 저항하였으나 유총은 [[316년]] 장안을 함락하여 민제를 사로잡았다. 이로써 서진은 멸망하였으며 이때부터를 '''[[오호십육국 시대]]'''라고 부른다.


[[318년]] 유총이 죽고 아들인 [[유찬]]이 뒤를 계승했으나 부하가 반란을 일으켰다. 유요와 석륵이 협력하여 이를 제압하고 유요는 장안에서 황제가 되어 국호을 '''조'''(趙)로 고쳤다. 이것이 바로 전조이다. 석륵은 조공(趙公)에 봉해졌으나 이윽고 자립하여 양국(襄国;현재의 하북성 형대(邢台)에서 조왕으로 즉위했다.('''후조''') 유요의 조나라는 서쪽에서 석륵의 조나라는 동쪽에서 각자 화북을 양분하여 다툼을 벌였으나 유요는 이후 추락하여 [[328년]] 석륵에게 멸망당했다. 아들 유희가 뒤를 계승했으나 329년 [[석호]]에 의해 살해당하여 이로써 전조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318년]] 유총이 죽고 아들인 [[유찬 (전조)|유찬]](劉粲)이 뒤를 계승했으나 부하가 반란을 일으켰다. 유요와 석륵이 협력하여 이를 제압하였으며 유요는 장안에서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319년]]에 국호를 '''조'''(趙)로 고쳤다. 석륵은 조공(趙公)에 봉해졌으나 319년 11월, 자립하여 양국(襄国;현재의 하북성 형대(邢台)에서 조왕으로 즉위했다.('''후조''') 유요는 장안을 중심으로 서쪽, 석륵은 양국을 중심으로 동쪽에서 각자 화북을 양분하여 서로 대립하였으나 [[328년]] 석륵에게 포로로 사로잡혀 전조는 급격하게 쇠락하였다. 아들 [[유희 (전조)|유희]](劉煕)가 뒤를 이었으나 [[329년]] [[석호]](石虎)에 의해 살해당하였으며 이로써 전조는 멸망하였다.


==역대황제일람==
==역대황제일람==

2008년 12월 8일 (월) 17:45 판

전조(前趙 304년~329년)는 오호십육국시대 유연(劉淵)이 건국한 나라이다. 처음 국호는 한(漢)이었으나 후에 조(趙)로 변경하였다. 같은 시대 석륵(石勒)이 같은 이름의 조(趙)를 세웠기에 유연의 조를 전조, 석륵의 조를 후조(後趙)라고 구별지어 부르게 되었다.

역사

후한(後漢) 말기부터 중국의 통일 왕조들은 흉노(匈奴)와 선비족(鮮卑族) 등 주변 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였다. 특히 흉노의 분열 이후 남흉노가 대거 낙양(洛陽) 근처에 정착하면서 자연히 중국의 내부사정에 정통하게 되었다. 이들은 팔왕의 난서진(西晉) 황족들의 권력쟁탈과 그에 따른 통치능력 상실을 보고 독립하려는 야심을 가지게 되었다.

후한에 굴복하였던 남흉노 선우(單于)의 후예인 유연은 서진으로부터 흉노오부대도독(匈奴五部大都督)에 임명되었으나, 팔왕의 난이 일어나자 자립하여 나라를 건국하고 국호를 한(漢)으로 정하였다. 유연의 아버지인 유표(劉豹)는 후한에 의해 유씨 성을 하사 받았는데 이를 이유로 유연은 한의 부흥을 기치로 국호를 한(漢)이라 하였다. 유연은 아들 유총(劉聰)과 친족인 유요(劉曜), 갈족(羯族)의 석륵 등을 거느리고 병주(并州) 일대를 공략했다.

유연은 한의 계승자를 자처하였으나 실제로는 한 왕실의 후예을 간접적으로 살해하였다. 산양공(山陽公)을 계승했던 유추(劉秋)의 죽음으로 인해 후한왕실 직계자손은 끊어지게 되었다. 또한 촉한(蜀漢) 소열제(昭烈帝) 유비(劉備)의 자손은 성한(成漢)으로 도망친 유현(劉玄)만이 살아 남고 나머지는 영가의 난에 휘말려 살해당하였다.

310년 유연이 죽고 장남 유화(劉和)가 제위를 물려받았으나, 인망이 없어 동생 초왕(楚王) 유총이 모반을 일으켰다. 유화를 살해하고 제위를 계승한 유총은 311년 서진의 수도 낙양을 함락시켜 회제(懷帝)를 사로잡았다.(영가(永嘉)의 난) 장안(長安)에서 민제(愍帝)가 즉위하여 저항하였으나 유총은 316년 장안을 함락하여 민제를 사로잡았다. 이로써 서진은 멸망하였으며 이때부터를 오호십육국 시대라고 부른다.

318년 유총이 죽고 아들인 유찬(劉粲)이 뒤를 계승했으나 부하가 반란을 일으켰다. 유요와 석륵이 협력하여 이를 제압하였으며 유요는 장안에서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319년에 국호를 (趙)로 고쳤다. 석륵은 조공(趙公)에 봉해졌으나 319년 11월, 자립하여 양국(襄国;현재의 하북성 형대(邢台)에서 조왕으로 즉위했다.(후조) 유요는 장안을 중심으로 서쪽, 석륵은 양국을 중심으로 동쪽에서 각자 화북을 양분하여 서로 대립하였으나 328년 석륵에게 포로로 사로잡혀 전조는 급격하게 쇠락하였다. 아들 유희(劉煕)가 뒤를 이었으나 329년 석호(石虎)에 의해 살해당하였으며 이로써 전조는 멸망하였다.

역대황제일람

전조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 한왕
(漢王)
유연(劉淵) 원희(元熙) 304년 ~ 308년 304년 ~ 308년
1대 고조
(高祖)
태조(太祖)
(유요가 추증)
광문황제
(光文皇帝)
유연(劉淵) 영봉(永鳳) 308년 ~ 309년
하서(河瑞) 309년 ~ 310년
308년 ~ 310년
2대 - 폐제
(廢帝)
{여왕(厲王)}
유화(劉和) - 310년
3대 열종
(烈宗)
소무황제
(昭武皇帝)
유총(劉聡) 광흥(光興) 310년 ~ 311년
가평(嘉平) 311년 ~ 315년
건원(建元) 315년 ~ 316년
인가(麟嘉) 316년 ~ 318년
310년 ~ 318년
4대 - 은황제
(隱皇帝)
유찬(劉粲) 한창(漢昌) 318년 318년
5대 - - 유요(劉曜) 광초(光初) 318년 ~ 329년 318년 ~ 328년
6대 - - 유희(劉煕) " 328년 ~ 329년
  • 유요가 318년에 국호을 (漢)에서 (趙)로 변경하였다.

틀:중국 오호십육국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