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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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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제도는 고려의 지방행정 통치제도와 결합되면서 완전히 뿌리내리게 되었다. 중앙으로 진출한 상경귀족도 출신 지역과 연결되고, 또 출신 지역의 ‘토성’층은 중앙관료의 공급원 구실을 함으로써 거대 문벌귀족으로 지위를 굳혀갔다. 또한 중앙정치의 변화로 상경귀족이 몰락하더라도 토성은 그대로 유지되어 씨족의 생명력이 지속되었다. 심지어 조선 전기까지도 본관이나 문벌의 고유성을 유지하기 위해 족외혼보다는 족내혼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앞서 예로 선산김씨의 세계도(족도)에서도 김종직의 선대를 보면 같은 선산김씨끼리 혼인한 족내혼이 70%나 정도로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본관제도는 고려의 지방행정 통치제도와 결합하였고, 중앙으로 진출한 상경귀족도 출신 지역과 연결되고, 또 출신 지역의 ‘토성’층은 중앙관료의 공급원 구실을 함으로써 거대 문벌귀족으로 지위를 굳혀갔다.<ref name='ksh' /> 또한 상경귀족이 몰락하더라도 토성은 유지되어 씨족 전체의 생명력이 지속되었고, 씨족의 고유성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 전기까지는 [[족외혼]]보다는 [[족내혼]]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예컨대, [[선산 김씨]] [[김종직]]의 선대를 보면 선산김씨끼리 족내혼이 70%나 이뤄졌을 만큼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다.<ref name='ksh' />
사실 삼국시대만 하더라도 같은 씨족끼리 결혼하는 족내혼과 다른 씨족과 결혼하는 족외혼이 병존했다. 예맥이나 고구려는 족외혼이 주종을 이뤘고, 신라는 족내혼이 대부분이었다. 그 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가 이를 계승하게 됨으로써 족내혼이 일반화 되었고, 족외혼은 예외적인 것이 되었다. 하지만 조선 건국에 주축 세력을 이룬 향리 출신의 신흥 사대부들이 고려의 문벌(족벌)체제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족내혼보다는 족외혼으로 관습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렇듯 조선 초기까지 각 문벌은 자신의 고유성을 유지하기 위해 특별한 경우(정략혼)를 제외하면 족내혼을 했다.


삼국시대만 하더라도 같은 씨족끼리 결혼하는 족내혼과 다른 씨족과 결혼하는 족외혼이 병존했다. 예맥이나 고구려는 족외혼이 주종을 이뤘고, 신라는 족내혼이 대부분이었다. 고려가 신라를 계승하게 됨으로써 족내혼이 일반화 되었고, 족외혼은 예외적인 것이 되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족내혼보다는 족외혼으로 관습이 바뀌게 되었으나, 조선 초기까지는 가문의 고유성을 유지하기 위해 특별한 경우(정략혼)를 제외하면 족내혼을 했다.<ref name='ksh' />
하지만 고려 중기의 무신정권시대와 몽골 침략 이후로 본관제도의 변화는 불가피해졌다. 중앙정권의 변화가 무쌍하다보니 그로 인해 몰락하는 유력 토성들이 비일비재하게 생기고, 또 몽골 침략 이후 본관을 떠난 유민들이 급증하면서 문벌을 지탱하던 유력 토성의 기반이 약화되거나 무너진 것이다.


하지만 고려 중기의 [[무신정권]] 시대와 [[대몽항쟁|몽골 침략]] 이후로 본관제도의 변화는 불가피해졌다. 중앙정권의 변화 및 몽골의 침략으로 상경귀족과 토성층의 몰락이 비일비재하자 문벌의 기반도 약해졌다.
?더욱이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본관제도는 두 가지 문제로 인해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하나는 조선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며 지방 토성의 분정을 허락지 않거나 격하시킨 것이다. 즉, 지방 유력토성에서 호장을 세습하며 지방세를 징수하고 행정을 총괄하는 분정 정책이 폐기되고, 지방 유력토성의 지위와 권한을 약화시킨 것이다. 그에 따라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사람은 중인계급(6방)으로 격하되거나 몰락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족내혼보다는 족외혼이 강화되고, 거주지 이전이 손쉬워졌다. 즉, 지방 유력토성에 의해 세습적으로 관장되던 지방행정이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가 중심이 되는 행정체제로 재편되고, 족외혼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거주지 이전에 대한 통제도 약화된 것이다. 따라서 본관제도는 지방통치체제의 근간으로서 현실적 통치제도가 아닌 관념적인 혈연의식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족보의 발간으로 성관 통합이 이뤄지고, 또 군소 성관은 유력 본관을 따라 개관을 함으로써 집단적 신분질서로서의 본관제도가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더욱이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본관제도는 가지 문제 때문에 변화하게 된다. 하나는 조선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며 지방 토성의 분정을 허락지 않거나 격하시켰고, 그에 따라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사람은 중인계급(6방)으로 격하되거나 몰락하였었다. 다른 하나는 족내혼보다는 족외혼이 강화되고, 거주지 이전이 손쉬워졌다. 이에 따라 본관제도는 현실적 통치제도가 아닌 관념적인 혈연의식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족보의 발간으로 성관 통합이 이뤄지고, 또 군소 성관은 유력 본관을 따라 개관을 함으로써 집단적 신분질서로서의 본관제도가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따라 본관은 다른 씨족과 구분하는 기준이 되고, 그가 속한 부계친족 집단의 신분적 상징이 되었다. 특히 성씨만 가지고 신분을 구별할 수 없게 되면서 본관을 더욱 중시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을 반영하듯 조선 후기 실학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은 “풍속이 문벌을 중시하여 사족(士族)들은 반드시 원조(遠祖)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삼았으며, 비록 자손들이 흩어져 살면서 100대가 지나도 본관을 바꾸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본관은 다른 씨족과 구분하는 기준이 되고, 그가 속한 부계친족 집단의 신분적 상징이 되었으며, 성씨만 가지고 신분을 구별할 수 없게 되자 본관을 중시하는 풍조가 널리 퍼졌다. 이런 현상을 반영하듯 조선 후기 실학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은 “풍속이 문벌을 중시하여 사족(士族)들은 반드시 원조(遠祖)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삼았으며, 비록 자손들이 흩어져 살면서 100대가 지나도 본관을 바꾸지 않는다”라고 하였다.<ref name='k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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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9일 (토) 10:45 판

본관(本貫)은 시조(始祖)의 관향, 곧 고향을 뜻한며, 본적(本籍), 본(本), 관향(貫鄕)이라고도 부른다. 어느 한 시대에 정착했던 조상의 거주지를 나타내는 공간상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 같고 본관이 같으면, 부계 친족의 친밀성이 높아진다. 한국의 본관제도는 성씨와 함께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며, 본격적으로 정착된 시기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로 여겨진다.[1]

특징

본관제도는 처음에는 그 사람의 출신지를 나타내었는데, 예컨대, 안동김씨 ○○이라고 하면 안동 출신의 김○○였다.[1]

처음에는 출신지를 나타내던 본관이 점차 사람의 신분 및 집안을 나타내는 이름이 되었다. 즉, 본관이 씨족의 발상지뿐 아니라, 그 씨족(동본)의 집단적 신분까지 나타내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같은 성씨가 너무 많고, 또 같은 성씨에서도 시조나 성씨의 탄생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하나의 성씨(金氏)가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나 되고, 몇 개의 성씨(金, 李, 朴, 鄭, 崔 등)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니, 성씨와 이름만으로는 각각의 개인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혈통관계와 신분질서의 징표로 성씨보다는 본관이나 족보의 중요성이 커져 갔다.[1]

이러한 이유로 유래지인 중국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본관이 한국에서는 널리 쓰이게 되었다.

유래

본관제도의 출발은 중국이다.[1] 주나라 시대 봉토를 제후에게 하사하고, 사성정책을 쓰면서 “○○지역 ○○○”이라는 표식이 나타난다. 그것이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지만, 그 사람이 태어난 곳에 따라 “○○지역 ○○○”이라는 식으로 표현되었다. 그것은 한국의 한자 성씨의 정착에 영향을 미친 당나라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한국에서 사람의 출신지를 뜻하던 본관이 씨족의 발상지로 변하였다. 이렇게 정착된 본관제도는 성씨보다 더 중요한 구실을 하는 측면도 있다. 특히 하나의 성씨가 많은 인구를 형성하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에서 성씨는 수식어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본관은 혈통과 신분를 파악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성씨를 보면서 외국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본관제도라고 한다.

성립

보통 시조의 본적지를 본관으로 표기해 왔으나, 시조의 본적지를 본관으로 표기하지 않는 성씨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외국으로부터 전래된 몇몇 성씨는 시조의 본적지보다는 씨족의 발상지를 본관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또한 왕으로부터 성을 받을 때(사성) 본관도 함께 받은 사례가 많아, 시조의 본적지와 본관이 다른 경우가 많다. 따라서 본관은 씨족의 발상지로 봐야 타당하다.[1]

현재 우리나라에는 286개 성씨와 4179개 본관이 파악되고 있다(통계청 2000년 인구센서스). 본관도 주요 성씨와 마찬가지로 거대 씨족으로 몰리는 경향이 뚜렷해서 김해 김씨가 9.0%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밀양 박씨 6.6%, 전주 이씨 5.7%를 차지한다. 반면 1000명 미만의 본관도 66%가 넘고, 1985년 이후 새로 만들어진 본관도 한양 강(姜)씨, 장지 김(金)씨 등 15개 성관(姓貫)이나 된다.[1]

한국의 본관은, 삼국유사의 신라 6부족을 예로 들며, 신라시대부터 본관이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 씨족 시조의 태생(본적)을 거론하며 드는 예로 볼 뿐이고, 한국의 본관제도가 시작된 때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지방 호족들이 발흥을 하면서부터라는 설이 정설이다. 즉, 신라 말에 중앙집권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호족이 독립된 세력을 형성하며 지배권을 확립하고, 그것이 성씨제도와 연결되면서 씨족의 발상지가 되었고, 그 발상지가 본관으로 굳어졌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다.[1]

본관제도가 정착된 다른 이유는 씨족의 발상지뿐 아니라 고려 초의 통치정책과도 관련이 있다. 고려 태조는 고려를 건국하기 위해 지방 호족을 회유하고 연합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태조 23년경에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하면서 군현제 개편과 토성분정(土姓分定) 사업을 시행하였고, 광종조에서 호족 정비책, 성종조에서 지방제도 정비책을 시행하였다. 이렇게 태조에서 성종에 이르기까지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하면서 본관제도가 정착되었다고 여겨진다. 다시 말해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하면서 지방 유력 토성(土姓)의 수장에게 행정실무를 맡겼으며, 심지어 일부 군현은 지방의 토성이 ‘호장’직을 세습하며 징세와 지방행정 관리를 도맡아 처리하였다. 그리고 본관의 양민(백성)은 국가에 의해 공식적인 허가를 받지 않고 거주지를 이전할 수 없었고, 이전했다가 발각되면 본관으로 되돌려졌다.

이처럼 본관의 정착 시기가 주로 신라 말 고려 초이다보니, 대부분의 본관이 신라와 고려의 국경(평양과 원산만) 이남에 존재하게 되었으며,[1] 평양과 원산(영흥) 이북에 발상지를 둔 본관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변화

본관제도는 고려의 지방행정 통치제도와 결합하였고, 중앙으로 진출한 상경귀족도 출신 지역과 연결되고, 또 출신 지역의 ‘토성’층은 중앙관료의 공급원 구실을 함으로써 거대 문벌귀족으로 지위를 굳혀갔다.[1] 또한 상경귀족이 몰락하더라도 토성은 유지되어 씨족 전체의 생명력이 지속되었고, 씨족의 고유성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 전기까지는 족외혼보다는 족내혼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예컨대, 선산 김씨 김종직의 선대를 보면 선산김씨끼리 족내혼이 70%나 이뤄졌을 만큼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다.[1]

삼국시대만 하더라도 같은 씨족끼리 결혼하는 족내혼과 다른 씨족과 결혼하는 족외혼이 병존했다. 예맥이나 고구려는 족외혼이 주종을 이뤘고, 신라는 족내혼이 대부분이었다. 고려가 신라를 계승하게 됨으로써 족내혼이 일반화 되었고, 족외혼은 예외적인 것이 되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족내혼보다는 족외혼으로 관습이 바뀌게 되었으나, 조선 초기까지는 가문의 고유성을 유지하기 위해 특별한 경우(정략혼)를 제외하면 족내혼을 했다.[1]

하지만 고려 중기의 무신정권 시대와 몽골 침략 이후로 본관제도의 변화는 불가피해졌다. 중앙정권의 변화 및 몽골의 침략으로 상경귀족과 토성층의 몰락이 비일비재하자 문벌의 기반도 약해졌다.

더욱이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본관제도는 두 가지 문제 때문에 변화하게 된다. 하나는 조선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며 지방 토성의 분정을 허락지 않거나 격하시켰고, 그에 따라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사람은 중인계급(6방)으로 격하되거나 몰락하였었다. 다른 하나는 족내혼보다는 족외혼이 강화되고, 또 거주지 이전이 손쉬워졌다. 이에 따라 본관제도는 현실적 통치제도가 아닌 관념적인 혈연의식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족보의 발간으로 성관 통합이 이뤄지고, 또 군소 성관은 유력 본관을 따라 개관을 함으로써 집단적 신분질서로서의 본관제도가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따라 본관은 다른 씨족과 구분하는 기준이 되고, 그가 속한 부계친족 집단의 신분적 상징이 되었으며, 성씨만 가지고 신분을 구별할 수 없게 되자 본관을 중시하는 풍조가 널리 퍼졌다. 이런 현상을 반영하듯 조선 후기 실학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은 “풍속이 문벌을 중시하여 사족(士族)들은 반드시 원조(遠祖)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삼았으며, 비록 자손들이 흩어져 살면서 100대가 지나도 본관을 바꾸지 않는다”라고 하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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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석

  1. 김성회 (2011년 3월 15일).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4> 성씨와 본관”. 《세계일보》. 2016년 1월 9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