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소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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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임금의 후손인 기곤오가 소성의 하백에 봉해지고 기원전 2266년 소성이 단군조선에 영속 되었으며 기씨를 소씨로 고쳐서 소씨가 생겼다고 한다. 소곤오(기곤오)의 후손이 신라 6부 촌장중의 한사람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라고 한다.
요임금의 후손인 기곤오가 소성의 하백에 봉해지고 기원전 2266년 소성이 단군조선에 영속 되었으며 기씨를 소씨로 고쳐서 소씨가 생겼다고 한다. 소곤오(기곤오)의 후손이 신라 6부 촌장중의 한사람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라고 한다.


소벌도리의 25세손인 '''소경'''(577년 출생)은 후손이 없었는데 꿈에 소벌도리가 나타나 진주 도사곡(저동)으로 이사를 하면 9저를 얻을 것이라고 하여 660년 3월 3일(신라 무열왕 7년)에 지금의 진주시 상대동(저동)으로 이사를 한후에 9대에 걸쳐 9명의 장군을 낳게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소벌도리를 원조으로 하고 진주를 본관으로 하였으며 소경을 중시조로 하였다. 시조 '''소경'''(蘇慶)은 진공의 29세손으로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경신년 봄 3월 2일 진주의 도사곡(塗斯谷)으로 옮겼다. 소경은 관직이 각우에 이르렀고 나라에 공을 세워 656년(무열왕 3년)에 왕이 그의 조상인 소벌도리를 문열왕에 추봉하였다. 소경의 15세손인 소계령이 [[고려]]조에서 현달하여 형부원외랑(6품),신호위상장군(上將軍:정3품), 이부상서(정3품장관)등을 지내고, 그 딸이 헌종(獻宗)의 비가 되어 회순왕후(懷純王后)에 책봉됨으로써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진산은 진주의 별호)에 봉해졌다.
소벌도리의 25세손인 '''소경'''(577년 출생)은 후손이 없었는데 꿈에 소벌도리가 나타나 진주 도사곡(저동)으로 이사를 하면 9저를 얻을 것이라고 하여 660년 3월 3일([[신라 무열왕]] 7년)에 지금의 진주시 상대동(저동)으로 이사를 한후에 9대에 걸쳐 9명의 장군을 낳게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소벌도리를 원조으로 하고 진주를 본관으로 하였으며 소경을 중시조로 하였다. 시조 '''소경'''(蘇慶)은 진공의 29세손으로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경신년 봄 3월 2일 진주의 도사곡(塗斯谷)으로 옮겼다. 소경은 관직이 각우에 이르렀고 나라에 공을 세워 656년(무열왕 3년)에 왕이 그의 조상인 소벌도리를 문열왕에 추봉하였다. 소경의 15세손인 소계령이 [[고려]]조에서 현달하여 형부원외랑(6품),신호위상장군(上將軍:정3품), 이부상서(정3품장관)등을 지내고, 그 딸이 헌종(獻宗)의 비가 되어 회순왕후(懷純王后)에 책봉됨으로써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진산은 진주의 별호)에 봉해졌다.


『진주소씨족보』(1935)나 『씨족원류』에 의하면 시조는 고려 말기의 소희철(蘇希哲)이다. 소희철(蘇希哲)은 상호군(上護軍)이었으며, 소희철의 후손 소세량(蘇世良)은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이었다. 소세량의 아우 소세양(蘇世讓)도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찬성(贊成)과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고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받았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114_580_0218}}</ref>
『진주소씨족보』(1935)나 『씨족원류』에 의하면 시조는 고려 말기의 소희철(蘇希哲)이다. 소희철(蘇希哲)은 상호군(上護軍)이었으며, 소희철의 후손 소세량(蘇世良)은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이었다. 소세량의 아우 소세양(蘇世讓)도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찬성(贊成)과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고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받았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114_580_0218}}</ref>

2015년 10월 23일 (금) 23:03 판

진주 소씨 (晉州 蘇氏)
관향경상남도 진주시
시조소경 (蘇慶)
중시조소희철 (蘇希哲)
집성촌전라북도 익산시
전라북도 남원시
주요 인물소세량, 소세양
인구(2000년)37,184명

진주 소씨(晉州 蘇氏)는 경상남도 진주시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신라시대 상대등을 지낸 소경(蘇慶)이다.

역사

요임금의 후손인 기곤오가 소성의 하백에 봉해지고 기원전 2266년 소성이 단군조선에 영속 되었으며 기씨를 소씨로 고쳐서 소씨가 생겼다고 한다. 소곤오(기곤오)의 후손이 신라 6부 촌장중의 한사람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라고 한다.

소벌도리의 25세손인 소경(577년 출생)은 후손이 없었는데 꿈에 소벌도리가 나타나 진주 도사곡(저동)으로 이사를 하면 9저를 얻을 것이라고 하여 660년 3월 3일(신라 무열왕 7년)에 지금의 진주시 상대동(저동)으로 이사를 한후에 9대에 걸쳐 9명의 장군을 낳게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소벌도리를 원조으로 하고 진주를 본관으로 하였으며 소경을 중시조로 하였다. 시조 소경(蘇慶)은 진공의 29세손으로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경신년 봄 3월 2일 진주의 도사곡(塗斯谷)으로 옮겼다. 소경은 관직이 각우에 이르렀고 나라에 공을 세워 656년(무열왕 3년)에 왕이 그의 조상인 소벌도리를 문열왕에 추봉하였다. 소경의 15세손인 소계령이 고려조에서 현달하여 형부원외랑(6품),신호위상장군(上將軍:정3품), 이부상서(정3품장관)등을 지내고, 그 딸이 헌종(獻宗)의 비가 되어 회순왕후(懷純王后)에 책봉됨으로써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진산은 진주의 별호)에 봉해졌다.

『진주소씨족보』(1935)나 『씨족원류』에 의하면 시조는 고려 말기의 소희철(蘇希哲)이다. 소희철(蘇希哲)은 상호군(上護軍)이었으며, 소희철의 후손 소세량(蘇世良)은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이었다. 소세량의 아우 소세양(蘇世讓)도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찬성(贊成)과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고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받았다.[1]

진주소씨는 시조를 <경자보> 를 수간할 때까지는 문공공(文恭公) 소희철(蘇希哲)로 삼아왔으나, 1951년 발견된 양곡공(陽谷公) 후손 소창엽(蘇昌燁)이 소장하고 있는 세계 <부소보(扶蘇譜)>와 1975년 발견된 소종만(蘇鐘萬) 소장인 <소치선가승(蘇致善家乘)>에 의해서 문헌사적과 분묘소재 등의 고증이 이루어져서 오늘날과 같이 상대등공 소경(蘇慶)을 시조로 바로잡게 되었음이 <신유보>에 나타나 있다.[2]

인물

  • 소세량(蘇世良, 1476년 ~ 1528년) : 조선 중기의 문신. 1496년(연산군 2) 생원시를 거쳐 성균관에 들어가 명유(名儒)들과 교유하였으며, 사서삼경은 물론 소설(小說)·불경(佛經)에까지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며 이에 힘입어 문장과 글이 물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1507년(중종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한림원에 들어가 예문관검열에 등용된 뒤 오랫동안 대간(臺諫)·시종(侍從)으로 시강(侍講)하였으며, 주서(奏書)와 상소는 거의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1516년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부임, 백성을 사랑하고 가혹한 형벌을 금하고 서리들의 기강을 쇄신하여 칭송을 받았다. 4년 후 홍문관수찬, 사헌부의 지평·장령, 홍문관의 ·응교·직제학 등을 거쳐 1522년 사간·좌부승지(左副承旨)·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1524년 대사간에 승진되었다가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남원부사를 자원하였다.[3]
  • 소세양(蘇世讓, 1486년 ∼ 1562년)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언겸(彦謙). 1504년(연산군 10) 진사시에 이어 1509년(중종 4)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언을 거쳐 수찬에 재직 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 현릉(顯陵)에 이장하게 하였다.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직제학을 거쳐 사성이 되었다. 1521년 영접사(迎接使) 이행(李荇)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았고, 그 뒤 왕자사부(王子師傅) 등을 지냈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나, 1530년 왜구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했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형조판서 등을 거쳐 1533년 지중추부사에 올라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37년 형조·호조·병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다. 이듬해 성주사고(星州史庫)가 불타자 왕명에 따라 춘추관(春秋館)의 실록을 등사, 봉안하였다. 1545년(인종 1)윤임(尹任) 일파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이 해 명종이 즉위한 뒤 을사사화로 윤임 등이 몰락하자 재기용되어 좌찬성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익산에 은퇴하였다. 문명이 높고 율시(律詩)에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익산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저서로는『양곡집(陽谷集)』이 있으며, 글씨는 양주에 「임참찬권비(任參贊權碑)」와 「소세량부인묘갈(蘇世良夫人墓碣)」이 있다.[4]

과거 급제자

진주 소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2명, 무과 급제자 15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소광진(蘇光震) 소대항(蘇大恒) 소동도(蘇東道) 소두산(蘇斗山) 소봉(蘇逢) 소사식(蘇斯軾) 소사원(蘇泗源) 소세량(蘇世良) 소세양(蘇世讓) 소우석(蘇禹錫) 소혜(蘇徯) 소호인(蘇好仁)

무과

소계성(蘇啓盛) 소계희(蘇繼禧) 소근술(蘇謹述) 소무신(蘇武臣) 소산준(蘇山濬) 소섭(蘇涉) 소예민(蘇禮民) 소익량(蘇益亮) 소잇심(蘇㗡心) 소종붕(蘇從鵬) 소창(蘇鋹) 소후열(蘇後烈) 소흡(蘇潝) 소흡(蘇潝) 소희익(蘇希益)

생원시

소개(蘇凱) 소대진(蘇大晉) 소동도(蘇東道) 소면규(蘇冕圭) 소명국(蘇鳴國) 소봉(蘇逢) 소봉선(蘇奉善) 소사원(蘇泗源) 소산복(蘇山福) 소성문(蘇聖門) 소세검(蘇世儉) 소세량(蘇世良) 소수규(蘇洙規) 소수중(蘇洙中) 소엽(蘇曄) 소운핵(蘇雲翮) 소이망(蘇爾望) 소정진(蘇貞震) 소지(蘇遲) 소진문(蘇振門) 소진황(蘇鎭璜) 소현도(蘇顯道) 소형우(蘇亨宇) 소후석(蘇厚錫) 소후유(蘇后由) 소희철(蘇希轍)

진사시

소건(蘇建) 소계흥(蘇啓興) 소광진(蘇光震) 소동명(蘇東鳴) 소두산(蘇斗山) 소두열(蘇斗烈) 소두원(蘇斗元) 소명곡(蘇鳴鵠) 소명국(蘇鳴國) 소선(蘇鍹) 소세양(蘇世讓) 소순(蘇巡) 소언산(蘇彦山) 소여유(蘇汝由) 소영복(蘇永福) 소욱(蘇昱) 소자파(蘇自坡) 소종선(蘇宗善) 소진천(蘇鎭千) 소태영(蘇泰永) 소학규(蘇學奎) 소형진(蘇亨震) 소휘만(蘇輝晩) 소휘식(蘇輝植) 소흥우(蘇興宇)

음관

소정규(蘇正奎)

집성촌

인구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진주 소씨는 1985년에는 총 9,196가구 38,872명, 2000년에는 총 11,521가구 37,184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2,000여 가구가 늘어났다. 2000년 현재는 서울 8,896명, 부산 1,570명, 대구 1,790명, 인천 1,450명, 광주 1,027명, 대전 1,184명, 울산 385명, 경기 6,730명, 강원 295명, 충북 488명, 충남 1,165명, 전북 8,125명, 전남 1,976명, 경북 845명, 경남 1,131명, 제주 127명이다. 서울을 제외하고 전라북도 지역이 단연 가장 인구가 많다.[5]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