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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7일 (수) 16:05 판

이봉룡
기본 정보
본명이봉용 (아명)
출생1914년 8월 3일(1914-08-03)
일제강점기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목포
사망1987년 1월 9일(1987-01-09)(72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
성별남성
직업작곡가, 前 가수
장르트로트
활동 시기1930년대 후반 ~ 1980년대
가족이난영(누이동생)
김해송(매제)
대표작
목포는 항구다 1942년
낙화유수 1942년
인생선 1942년
남아일생 1943년
달도 하나 해도 하나 1949년

이봉룡(李鳳龍, 1914년 ~ 1987년 1월 9일)는 한국의 대중음악 작곡가이다. 어릴 때 이름은 이봉용(李鳳用)이다.

생애

전라남도 목포시 출신이다.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이난영의 오빠였다.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지 않고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외지에 나간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다.[1]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음반 상점을 운영하였고, 두 살 아내의 여동생 이난영을 가수로 데뷔시켰다.

이난영은 인기 가수가 되어 악극단에서 만난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하였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작곡가였던 김해송은 처남이 된 이봉룡에게 작곡을 가르쳐주었다. 이봉룡은 1930년대 후반에 데뷔하여 동생 이난영이 부른 〈목포는 항구다〉(1942)가 크게 히트하는 등 인기 작곡가로 활동했다. 이 노래는 〈목포의 눈물〉과 함께 지금까지도 목포를 상징하는 곡으로 남았다.

이봉룡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가수인 남인수의 〈낙화유수〉와 〈남아일생〉 등 널리 불리는 노래를 계속 만들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군국가요 작곡에 참여한 일이 있다.[2][3] 신민요의 여왕으로 불리던 기생 출신 가수 이화자의 〈마지막 필적〉(1942)과 같은 해 발표된 장세정의 〈아가씨 위문〉 등이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

남북 분단을 묘사한 〈달도 하나 해도 하나〉로 광복 후에도 명성을 유지하던 중, 1950년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김해송이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봉룡은 김해송 실종 이후 동생 이난영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했으며, 이난영은 7남매를 혼자 키우며 어렵게 생활해야 했다. 전쟁이 끝나도 김해송은 조선인민군에게 사살당했다는 소문만 남기고 돌아오지 않았고, 월북했을 가능성도 있는 김해송의 곡들은 대한민국에서 자유롭게 부를 수가 없었다. 이 가운데 이봉룡이 작곡한 것으로 작곡자 이름을 바꾸어 살아남은 곡도 있었다.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고운봉의 〈선창〉, 백년설의 〈고향설〉, 이화자의 신민요 〈화류춘몽〉 등 그 수는 적지 않다.

후에 이난영과 김해송의 딸들이 결성한 음악 그룹 김시스터즈의 멤버 중에는 이들과 외사촌 사이인 이봉룡의 딸도 포함되어 있다. 이봉룡은 음반 기업을 운영하다가 1960년대 후반에 딸의 초청으로 미국에 이민하여 생활했다. 말년까지 작곡 활동을 계속했으며, 1986년부터 잠시 서울에 들러 소일하던 중 사망했다.

같이 보기

참고자료

주석

  1. 최성환. “항구의 딸로 목포에서 태어나다 - “목포의 눈물”의 가수 이난영 평전②”. 오마이뉴스. 2008년 5월 17일에 확인함. 
  2. 이준희. “이화자의 '결사대의 아내'를 아십니까 -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된 유행가, ‘군국가요’ 다시 보기 (26)”. 오마이뉴스. 2008년 5월 20일에 확인함. 
  3. 이준희.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된 유행가, ‘군국가요’ 다시 보기 (12)”. 오마이뉴스. 2008년 5월 20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