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라 대리석은 고대 로마 시대 이래로 사용되었으며[1] 당시에는 "루니 대리석"이라 불렸다. 17-18세기에 카라라 대리석 채석장은 마사와 카라라를 지배했던 키보-말라스피나 가문의 통제에 있었다. 이 가문은 대리석 채굴 산업을 규제하기 위해 1564년에 "대리석 부서"를 신설했다.[2] 특히나, 마사는, 이탈리아계 국가의 중심지로서 적합하기 위한, 대대적인 재개발 계획 (새로운 도로, 광장, 교차로, 포장도로 등)을 겪었다.[3] 키보-말라스피나 가문이 단절되고 나선, 이들의 영지는 오스트리아 가문의 지배를 받았고 채석장 관리도 그들에게 넘겨졌다. 마사의 바실리카는 전체가 카라라 대리석으로 지어졌고 옛 마사 공작의 궁전도 이 귀중한 석재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4]
19세기 말쯤에, 카라라는 이탈리아의 아나키즘의 요람이 되었으며, 특히나 채석장 노동자들 사이에 유행하였다. 1894년의 뉴욕 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대리석 채석장 노동자들은 이탈리아의 가장 방치된 노동자들에 속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은 전과자들이거나 도망 범죄인들이었다. 채석장의 작업은 몹시 고되고 험하여 노동자들의 배경을 상관하지 않고 충분한 근력과 인내력이 있는 자들만이 고용되었다.[5]
채석장 작업자들과 석각(石刻)업자들은 이들을 다른 이들과 분간하는 급진적인 이념이 있었다. 아나키즘과 급진주의는 석각 업자들의 유산의 일부가 되었다. 벨기에와 스위스 등지에서 추방당한, 많은 호전적인 혁명론자들이 1885년 카라라로 몰려와 이탈리아 내 최초의 아나키즘 조직을 세웠다.[5] 카라라에서, 아나키스트 갈릴레오 팔라 (Galileo Palla)는 “돌조차도 아나키스트들이다.”라며 촌평하였다.[6] 채석장 노동자들은 1894년 1월 루니기아나 소란의 주요 관련자들이었다.
아푸아 알프스 위에 있는 카라라에선 최소한 650개의 채석장이 있으며, 이 중의 절반은 최근에 버려지거나 채석되지 않고 있다.[11] 카라라의 대리석 채석장은 지구상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 많은 대리석들을 생산하고 있다.
채석장 작동은 몹시나 위험하며 현재까지도 이러한 위험은 계속되고 있다. 1911년 9월, 베토글리 채석장의 붕괴한 단애면이 그 절벽 아래에서 점심을 먹던 작업자 10명을 덮쳤다. 카라라에서 촬영된 2014년 영상은 손가락이 없는 노동자들과, 어떠한 청각 보호 장치 없이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소음에서 작업하는 이들을 보여준다.[12]
1천년간 카라라 채석장에서 생산된 최상품은 순수한 백색의 대리석인 스타투아리오 [Statuario, (다른 대리석들의 색상은 열과 압력으로 대리석이 형성될 때, 석회암에 존재하는 다른 광물들과 혼합되어 생긴다)]였다. 그러나 20세기 말쯤에, 알려진 카라라 인근의 스타투아리오 매장량이 고갈되었다. 채석장들은 주로 수출을 위해, 덜 가치있는 대리석들을 매년 백만톤 이상을 캐내어 선적을 계속하고 있다.
C와 CD로 분류되는, 비앙코 카라라는 비앙코 베나티오와 스타투아리에토와 마찬가지로, 카라라 채석장 전역에서 채석된 칼라카타 골드, 칼라카타 보르기니, 칼라카타 마키아 베키아, 아라베스카토 체르바이올레, 아라베스카토 바글리 등 같은, 훨씬 값비싸고 이국적인 바리에이션을 가진 가장 흔한 타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