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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견: 9년 전 (양념파닭님) - 주제: 경고

편집 되돌림 및 특정판 삭제 신청 알림[편집]

안녕하세요, Dnlzldi님!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에 기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귀하께서 청산리 대첩, 봉오동 전투 문서에 해 주신 편집은 다른 이의 배타적인 저작권이 있는 자료를 복사하셔서 저작권을 침해했기 때문에 문서를 편집하시기 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이전의 편집 내용은 편집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다시 한 번 편집 내용을 확인해 주세요.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위키백과 도움말을 참고하시거나 다른 사용자에게 질문해 주시면 됩니다. 연습이나 실험은 연습장에서 하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Hwangjy9 ( 토론 | 기여 | 편지 ) 2013년 10월 9일 (수) 16:04 (KST)답변

최소한[편집]

[1]와 같은 편집을 하기 전에 병합이라도 하고 삭제신청하시면 안 될까요? 기존의 기여들을 모두 삭제하자는 견해입니까? --Hun99 (토론) 2013년 11월 29일 (금) 08:59 (KST)답변

신탁통치와 관련한 동아일보의 오보 관련한 편집[편집]

해당 내용은 학교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북침인줄 알고 참전했다", "65년까지 논설문은 소련이 써준 것"이라는 것과 신탁통치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팝저씨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5:50 (KST)답변

그리고 아무리 외신기사를 받아 썼다 해도 오보는 오보입니다. 김정은 얼굴 닮은꼴 사건은 그럼 오보가 아닌가요? --팝저씨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5:52 (KST)답변
편집충돌 일어났군요. 이전 버전 내용이 제가 기사로 추가한 동아일보 기사인데요. 기사 내용이나 백과사전에도 언론기사하고는 상관없는데요. 뒤에 정상진 기사나 소 군정기 자료는 소련은 신탁 생각이 없는데 동아일보 주도로 반탁이 일어났다는 내용에 관련 내용 추가한건데요. 그리고 이 내용은 오늘 편집된게 아닌데요.--Dnlzldi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5:54 (KST)답변
오보라는 자료 링크해보세요. 왠 김정은?--Dnlzldi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5:54 (KST)답변
정상진이나 소군정기 보고서는 소련 관련 내용인데 미군정기에 왜 삽입해야되는거죠?--Dnlzldi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6:00 (KST)답변
외신기사 받아써도 오보는 오보라는 이야기로 김정은 닮은꼴 사진을 일본에서 기사로 냈다가 우리가 받아쓴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북침인줄 알았다", "논설문은 소련 작품"은 동아일보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편집자 마음이 아니고, 표제어에 맞는 이야기가 있는겁니다. 주제를 찾아 알맞은 곳에 기록하시라는데 그걸 편집자 마음이라고 하시면 곤란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군정기로 하나로 합쳐져 있습니다. 미 군정기라는 문서는 방금 넘겨주기 처리하였습니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6:02 (KST)답변
오보인지 아닌지는 내용에 적었구요(이전 편집 버전 내용도 제가 링크추가한 동아일보 기사 내용입니다.) 북침인줄 알았다 부분은 내용이 아니라 기사 제목으로 한국전쟁때 이야기인데요. 정상진 인터뷰 기사에서 독립운동(소련군)부터 생애를 이야기한 기사입니다. 제목만 확인하시고 내용은 확인을 안하신거같네요. 소련자료를 미국의 군정기 문서에 넣어야 이유는 없죠.--Dnlzldi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6:06 (KST)답변
그리고, 오보라는 근거 여기 있습니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6:07 (KST)답변
다시 알려드리죠. 미 군정기 문서는 한국의 군정기 문서로 합쳐져있고, 저기서는 미국과 소련 군정을 모두 다룹니다. 미 군정기라는 표현은 제가 잘못 사용한 것이 맞으나, 주제에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군정기, 한국전쟁으로 옮기시기 바랍니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6:08 (KST)답변
한겨레21 기사 링크 확인하고 왔습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27일의 오보뿐 아니라 그전에도 집요하게 소련과 좌익을 흠집 내려는 기사를 실어왔으며, 이후에도 반탁운동 정국에서 일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왜곡 및 과장 보도를 거듭했다. 가령 12월24일에는 “소련이 원산과 청진을 노리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는데, 12월3일치 <뉴스위크>를 인용한 이 보도는 정작 <뉴스위크>에서는 “노릴지도 모른다”고 단순히 예상한 것을 “노리고 있다”며 사실로 둔갑시켰다. 또한 28일 이후부터 “민족적 모독-신탁 운운하는 소련에 경고한다” 등 선동적일 뿐 아니라 마치 소련이 제2의 일제 침략자라도 되는 듯 몰아가는 사설을 연일 내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좌익 쪽에서 3상회의 결정을 받아들인다는 입장을 밝히자, 그것이 “침략자 소련의 지시에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것”이라 규정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 과정에서 소련이 ‘북조선’ 공산당에 보내는 ‘권고’를 ‘남한’ 공산당에 내리는 ‘지령’으로 왜곡해 보도하기도 했다."

무슨 까닭이었을까? <동아일보> 오보와 관련해 한민당이야 이유가 뻔했다. 그들은 좌익과는 물과 기름이었다. 임시정부가 세워져서 친일 청산이 이뤄질 경우를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좌우합작으로 이뤄질 공산이 큰 임시정부 수립을 저지하고 좌익을 궁지에 몰 수 있는 행동이라면 오보가 아니라 더한 것도 불사하는 것이 당연했다."

친일파는 좌파에서도 수두룩했는데요? 또한 교과서에서 실렸으니 팩트라구요? 현재 우파고 좌파고 교과서 서로 자기 자료가 맞다고 논란이 많은 사안에서 그건 자료로 인용될수가 없지요.

kbs 한국전쟁 2편 전쟁의 시그널 편에서 니콜라이 레베데프이라는 소련 민정책임자는 반탁을 주장한 조만식을 반동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인터뷰 영상이 등장하고 해당 방송분은 북한이 단독정부 준비했다고 묘사하고있습니다. 즉 뒤에 소군정기 보고서 자료나 정상진 자료는 추가에 아무런 이상없습니다. kbs 한국전쟁 방송은 타임 워너사의 세계 100대 다큐멘터리에 선정된 1990년 《KBS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에 기초, 이후 새롭게 밝혀진 사실과 자료들을 증보하여 10부작으로 제작한 프로그램입니다. 한겨레21보다 더 신뢰성이 있다고 보여지는데요.

동아일보 2005년 12월 29일 기사입니다. 1945년 12월 28일자에 ‘華盛頓(화성돈·워싱턴의 음역)二十五日發合同至急報’라고 출처를 밝히고 이 기사를 보도했다. 본보는 이날 1면 사설을 통해 “전문이 간단하야 그 주장의 근거에 대한 설명도 모호한 감이 없지 않으나…”, “아직 진상의 전모가 들어나지 않앗슴으로 우리는 차후의 진행을 주시하는 동시에 이 이상의 비판을 보류하거니와…”라고 신중한 자세를 견지했다. 동아일보에서 신탁통치 관련 기사화한 기사입니다.--Dnlzldi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6:32 (KST)답변

친일파를 북쪽에서도 제대로 청산 못한건 저도 압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게 주제는 아니죠. 주제는 동아일보가 신탁통치 오보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입니다. 북한이 단독정부 세우려고 했다, 소련이 실질적으로 65년까지 지배했다, 북침인줄 알았다는 그에 알맞는 주제를 찾아가달라 이겁니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6:45 (KST)답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도 오보로 반탁이 일어났다는 내용없습니다. 편집에 북침인줄 알았다 내용없습니다 이부분은 한국전쟁 주제에서 한 얘기입니다만.--Dnlzldi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6:48 (KST)답변
편집에 북침인줄 알았다 이 내용이 없다니요. 출처 기사 제목을 그걸로 달고 있는데. 그리고 한국전쟁 주제 아니고 신탁통치 오보했다는 헛소문 문단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보로 반탁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백번 양보해서 모르겠다고 쳐도, 오보 했느냐 안했느냐에 대한 논란과는 별개 문제입니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6:51 (KST)답변
북침인줄알았다 부분은 그 기사의 제목입니다. 언론기사 링크를 주석에 달때 제목, 날짜, 언론사명을 기재해야죠.--Dnlzldi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6:53 (KST)답변
그리고 아까부터 말씀드리는데, 정상진씨의 이야기가 허무맹랑하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그저 한국의 군정기한국전쟁이라는 주제에 맞는 곳으로 이동해달라고 하는데, 그걸 왜 거부하시는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소련 장군이 한 말도 동아일보 문서보다는 한국의 군정기로 옮기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6:58 (KST)답변
그런데 왜 되돌리기 버전은 저의 편집 내용 전체를 되돌리기하시는거죠?--Dnlzldi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7:03 (KST)답변
동아일보 오보 발단은 2003년 kbs 미디어포커스입니다.--Dnlzldi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7:04 (KST)답변
  1. 2005년 동아일보의 기사는 백:이해관계에 저촉된다고 판단합니다. 1945년의 동아일보 기사 또한, 단순히 오보였다에서 멈추는 수준에서 인용되어야 합니다.
  2. KBS 다큐의 경우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10부작이니, 확인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요. 확인후 수정할 내용이 있다면 수정하는 방향으로 하겠습니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7:06 (KST)답변
동아일보 오보 이유는 한민당의 친일 전력때문에 그랬다는 한겨레21도 추가하면안되지요. 우파나 좌파나 친일은 자유롭지못했으니 이건 논의에 여지없는 팩트니깐요.--Dnlzldi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7:08 (KST)답변
한겨레21이 당시에 언론사로 등록되어있었는지 의문이군요. 제 기억으로는 90년대에 창간한 것으로 아는데요. 그리고, 친일에 관한 문제와 반탁과는 표면적으로는 연관이 있죠. 친일한 사람들이 이를 계기로 민족투사로 변하니까요. 물론 동아일보가 그걸 노렸다는 근거는 제가 알기로는 없으니, 그걸 쓰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리고, 단독보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제 수정본에도 남아있습니다. --팝저씨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7:14 (KST)답변
칼럼은 출처로 사용할수없구요 계속 되돌리기하는 버전인 내용은 제가 편집한 출처에 반론되어있습니다.--Dnlzldi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8:08 (KST)답변
그리고 위키백과:이해관계의 충돌 관련은 현재 검토중이네요. 설령 공식정책이어도 귀하께서 주장하시는 부분은 아니죠. 한겨레21 기사를 주장하고있으니깐요.--Dnlzldi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8:11 (KST)답변
북한은 물론 남한에서 활동했던 남로당에도 친일파들이 많이있습니다.--Dnlzldi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8:13 (KST)답변
언론사에 실린 칼럼은 출처로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겨레21의 내용이 어딜봐서 이해관계의 충돌인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친일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논점을 흐리지 마시고, 반론이 되면 반론문단을 만드시면 되겠군요. 비판이 있으면 그에 대한 반론을 실을 수 있으니까요. 반론이 있으니 비판 자체를 날려버리자는 이야기는, 설마 아니시겠지요? --팝저씨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8:22 (KST)답변
기고는 누구나 할수있습니다 이는 위키피디아가 출처로 사용하는거랑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거 이야기를 안해도 우파성향의 뉴데일리 같은 정치적 성향에 따라 이현령비현령으로 논의가 될 수 있습니다. 논점은 지금 귀하가 하시고 있는거죠. 제가 편집한 버전은 오보 논란의 발단과정을 적고있는데. 이런거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서술을 해야죠.--Dnlzldi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8:29 (KST)답변
그리고 귀하도 토론에서 남긴 의견 달리 편집 버전은 전체 되돌리기하시고있죠.--Dnlzldi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8:32 (KST)답변
헛소문이 아니고 엄연한 사실인 것을 헛소문이라 호도하고 있으며, 동아일보 자료사진을 삭제하고, 해당 논란이 있었던 1945년 자료를 삭제하는데, 이를 당연히 되돌려야죠. 이정도면 문서 훼손입니다. 요즘들어 나오는 내용은 그 아래에 기술하세요. --팝저씨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8:41 (KST)답변
귀하도 동아일보가 오보 주도한것으로 제 편집 버전을 전체 되돌리기하셨죠. 어쨌든 발단 과정대로 서술되어야 합니다.--Dnlzldi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9:05 (KST)답변
'신탁통치 관련 논란'으로 임시 수정했습니다.--Dnlzldi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9:07 (KST)답변

토론 범위를 줄이고 나누시지요[편집]

두 사용자의 토론은 처음부터 읽어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토론이 길어질 수록 논지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일단, 동아일보 문서에서 다룰 필요가 없는 것은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그렇게 했습니다. 먼저 이에 대해서 이의가 있으신지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떤 기술에 대해서 적절한 출처가 있어야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문장 중에서 아무 출처도 없는 곳에 출처필요 틀을 달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역시 이의가 없으신지요? 그리고 나서, 각 내용별로 토론을 했으면 합니다.HappyMidnight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9:45 (KST)답변

주석 보충했습니다. 그리고 [2] 한국의 군정기 이 내용은 본문에 중복이던데요.--Dnlzldi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9:48 (KST)답변
(1) "한국의 군정기 이 내용은 본문에 중복이던데요."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다시 설명 부탁드립니다. (2) 제가 한국의 군정기 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로 옮겨 놓았던 부분에 대해서 다시 동아일보 문서에 기술하셨는데,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동아일보와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것인지요?HappyMidnight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9:54 (KST)답변
소련은 한반도에 관심이 없는것처럼 느껴져서 관련 자료 추가했습니다.

그리고 아래

2010년에는 1945년 12월 29일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가 소련군 진주 후 북한의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등 3개도를 방문조사한 뒤 만든 총 13p 분량의 보고서가 공개되었는데, 보고서 내용에는 258 소총사단장 드미트리예프 대좌는 “조선사람은 35년간 노예로 있었다. 좀 더 노예로 있게 하자”는 말도 남겼다고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 내용은 한국의 군정기 미국과 소련의 진주 문단에 내용이 있네요. 1945년 8월 26일 평양비행장에 도착한 소련극동군 연해주군관구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자신들을 ‘해방군’으로 규정하며 “조선 인민들이여, 여러분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행복은 이제 여러분 손 안에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고서에 따르면 치스차코프 사령관은 북한에서 소련군이 한 약탈과 관련해 봉기가 일어난다면 “조선사람 절반을 교수형에 처하겠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또 258 소총사단장 드미트리예프 대좌는 “조선사람은 35년간 노예로 있었다. 좀 더 노예로 있게 하자”는 말도 남겼다고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보고서는 “군내 질서를 잡고 25군단 내 정치적 도덕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시급히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이 요구된다”며 “시범 케이스로 처벌한 뒤 이 사실을 널리 전군에 알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북한대학원대학교 신종대 교수는 “소련군 역시 미군과 마찬가지로 북한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진주했고 진주 후에도 현지 사정에 무관심했다”며 “이는 북한 진주 초기 소련군의 비행과 풍기문란이 심각했음을 잘 보여주는 문건”이라고 말했다.

1945년 12월 29일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가 소련군이 1945년 8월 이후 5개월간 북한에서 드러낸 행태에 대한 기록한 문건이 발견되었다. 문건에는 “우리 군인(소련군)의 비도덕적인 작태는 실로 끔찍한 수준이다. 사병 장교 할 것 없이 매일 곳곳에서 약탈과 폭력을 일삼고 비행(非行)을 자행하는 것은 (그렇게 해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고 전제하면서 당시 ‘붉은 군대’의 만행을 이같이 기술했다. 그는 “우리 부대가 배치된 시나 군 어디서나 밤에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며 “특히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범죄도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

--Dnlzldi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9:57 (KST)답변

소군정기 자료 내용은 삭제했습니다.--Dnlzldi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9:59 (KST)답변

그럼 현재까지의 제 생각과 편집에 동의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현재 서술되어 있는 내용에 대해서 토의하고,또 편집과정에서 일부 내용이 누락되었는데, 그와 같이 누락된 것이 타당한 것인지 의견 나누었으면 합니다. 저는 지금 새벽이라서, 나중에 다시 들어오겠습니다.HappyMidnight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20:02 (KST)답변

허성택의 문서 되돌림[편집]

허성택 문서에 대해서 상당량의 내용을 아무런 커멘트도 없이 삭제하셔서, 제가 되돌려놓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귀 사용자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HappyMidnight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9:49 (KST)답변

이의없습니다.--Dnlzldi (토론) 2013년 12월 5일 (목) 19:49 (KST)답변

주의[편집]

반갑습니다, Dnlzldi님, 죄송하지만 잠시 주목해 주세요. Dnlzldi님이 고자라니 문서에 해 주신 편집은 문서를 훼손했기 때문에 문서를 편집하시기 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이전의 편집 내용은 편집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다시 한번 편집 내용을 확인해 주세요. 길라잡이질문방 등을 참고하시면 작성하신 내용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더 쉽게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이 계속될 경우 일시적 혹은 무기한으로 편집이 차단될 수 있습니다. 부디 좋은 편집을 부탁드립니다. --양념파닭 (토론 · 기여) 2015년 2월 27일 (금) 18:27 (KST)답변

경고[편집]

일방적으로 해당과 같은 편집을 하시면, 훼손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삭제 토론에 회부해서 절차 밟으세요. --양념파닭 (토론 · 기여) 2015년 2월 27일 (금) 19:04 (KST)답변

분명 여러번 말하지만, 삭토를 통해 가리는 것이 맞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제 토론 문서에서 이 일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 없습니다. --양념파닭 (토론 · 기여) 2015년 2월 27일 (금) 20:06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