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폰세 데 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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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폰세 데 레온
Juan Ponce de León

출생 1474년
카스티야 연합왕국 산테르바스 데 캄포스
사망 1521년 7월
쿠바 아바나
직업 탐험가, 콩키스타도르
서명
Juan Ponce de León Signature.svg

후안 폰세 데 레온(스페인어: Juan Ponce de León, 1474년 ~ 1521년 7월), 스페인탐험가이자 콩키스타도르이다. 을 위하여 유럽인의 원정을 이끈 그는 결국 현재 미국의 남동부 해안으로 들어와 플로리다라는 이름을 지으고 푸에르토리코의 초대 총독이 되었다.

초기 생애[편집]

후안 폰세 데 레온은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산테르바스 데 캄포스에서 가난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라곤 왕국의 법원에서 수습 기사를 지내 사회적 기능, 종교와 군사 전술학을 배웠다. 그는 결국 군인이 되어 그라나다 왕국에서 무어인들을 상대로 싸웠다. 다른 콩키스타도르들처럼 폰세 데 레온은 곧 탐험을 통하여 명예와 행운을 추구하였고, 1493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2번째 원정의 일부로서 자신의 탐구를 시작하는 것으로 믿어졌다. 자신의 후반의 탐험 동안에 그는 카리브해의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통제하는 데 군사에서 자신이 배운 기능과 전술을 고용하였다.

이스파니올라와 푸에르토리코[편집]

푸에르토리코 카파라에 있는 폰세 데 레온의 저택 폐허지

1500년의 첫 10년의 세월에 폰세 데 레온은 스페인을 위하여 섬 식민지를 설립하는 희망들에 이스파니올라 섬(현재의 아이티도미니카 공화국)에 정착지들을 세워 농경들을 시작하고 방어지들을 건설하였다. 그의 노력들은 결정을 지었고 그는 잘 번영하여 귀국하는 길에 산물과 가축을 스페인의 상선으로 팔았다. 이스파니올라 섬에서 원주민 카리브족의 반란을 진압하하는 데 도움을 준 후, 1504년 폰세 데 레온은 섬나라 동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귀국하는 길에 그는 레오노라라 불리는 여인과 결혼하여 3명의 자식들을 두었다.

그러나 푸에르토리코 근처에 황금의 완고한 보고들을 들은 스페인 왕실은 1508년 공식적으로 섬을 탐험하는 데 폰세 데 레온을 보냈다. 그는 한척의 배와 50명의 군인들을 데리고 현재 산후안 근처에 정착하였다. 1년 후, 그는 이스파니올라 섬으로 돌아와 많은 금과 기회들을 찾았다. 원정은 성공으로 간주되었고 그는 푸에르토리코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자신의 이득들에 의하여 용기를 얻어 스페인 왕실은 폰세 데 레온에게 섬의 정착을 지속하고 금 체굴의 노력들을 쌓으는 데 지시하였다. 그는 곧 푸에르토리코로 돌아와 자신의 부인과 자식들을 데려왔다. 자신이 이스파니올라에 실행하면서 폰세 데 레온은 노동력으로서 노예들의 크 수를 이용하며 성공적인 정착지를 설립하였다. 어떤 역사적 기사들이 그의 원주민 인구의 관계적으로 비폭력 대우의 언급을 만들었어도 타이노족을 노예로 부리는 전체의 영향과 천연두홍역 같은 질병들의 소개는 원주민 인구에 재난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섬의 획득들에 불구하고 1509년 콜럼버스의 아들과 스페인 왕실 사이의 분투는 폰세 데 레온이 자신의 푸에르토리코 총독직을 잃는 결과를 가져왔다.

회춘 분수와 플로리다의 이름을 지으며[편집]

플로리다에서 폰세 데 레온과 그의 탐험가들이 회춘 분수를 찾는 모습

스페인 왕실이 폰세 데 레온의 라이벌들에게 어떤 의견들을 주었어도 페란도 2세는 그에게 자신의 충성적 업무들을 위한 보수를 주기를 바랬다. 1512년 국왕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대지들을 찾고 아직 더 많은 금을 찾고 스페인 제국을 확장하는 희망에서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이 시기 경에 폰세 데 레온은 "회춘 분수"라고 주장되는 초자연적인 물이 있다는 소문이 난 카리브해의 비미니 섬에 관하여 배웠다. 이야기는 대서양 양쪽에서 친하여 많은이들이 아시아에 자리잡은 것으로 믿은 에덴 동산에 용천이 있다고 단언하였다.

회춘 분수의 추구가 가끔 그의 원정 뒤에 동기를 준 요점으로 인용되었다. 폰세 데 레온은 그것을 쌓으는 데 왕실과 실질상 유리한 거래를 체결할 수 있었다. 그는 독점권을 보유라여 자신이 건너온 아무 대지들의 종신 총독으로 선언하려고 하였다. 현저하게 왕실의 명령들에 회춘 분수의 언급이 없었고 최근의 연구는 그런 탐색이 그의 사망 후 그의 이름 만으로 관련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513년 3월 폰세 데 레온은 자신의 비용에서 3척의 배와 200명 이상의 부하들과 비미니에서 푸에르토리코로 원정을 지도하였다. 한달의 시간에 그와 그의 부하들은 플로리다의 동해안에 상륙하였다. 자신이 북아메리카의 본토에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그는 자신이 다른 섬에 상륙한 줄 알았다. 그 무성한 꽃의 초목에 참조로, 그리고 부활절에 자신이 발견한 이유로 그는 지방을 플로리다("꽃이 많은"의 뜻)라고 이름을 지었다.

가끔 플로리다를 "발견"과 명예가 되었어도 폰세 데 레온은 단지 숙고적으로 장기간 동안 사람들에 의하여 거주되어 온 지역에 상륙하였다. 추가로 그는 지역을 탐험하는 데 첫 유럽인이 아니었다. 스페인의 노예 원정들은 이전의 세월 동안 정규적인 근거에 바하마를 침입하였고 플로리다의 동해안만큼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있다.

그해 후반에 푸에르토리코로 돌아오면서 폰세 데 레온은 섬이 혼돈에 놓인 것을 찾았다. 카리브족의 이웃하는 종족이 정착지를 불태우고 몇몇의 스페인인들을 살해하였다. 그의 소유의 저택은 파괴되었고 그의 가족은 좁게 죽음을 탈출하였다.

더욱 나가서의 위업과 사망[편집]

산후안 바우티스타 성당에 있는 폰세 데 레온의 묘비

1514년 폰세 데 레온은 스페인으로 돌아와 자신의 발견들을 보고하고 비미니와 플로리다의 군사 총독으로 임명되어 그 지방들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데 허가들을 안정시켰다. 스페인의 왕실은 또한 그의 결석에서 지속되어 온 푸에르토리코에 원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작은 군인을 결성하도록 그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는 1515년 5월 그는 작은 배와 함께 스페인을 떠났다. 푸에르토리코에 카리브족과 그의 마주침의 역사적 평가는 막연하나 명확한 성과 없이 군사적 교전의 연속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폰세 데 레온은 결국 자신의 주요 후원자 페란도 2세가 스페인에서 죽은 것을 알게 된 것에 적대 행위들을 깨고 빠르게 자신의 주장들과 칭호들을 보호하는 데 돌아갔다. 그는 자신이 결국적으로 그의 재정적 제국이 안정되었던 보증들을 받고 푸에르토리코로 돌아갈 때까지 2년 동안 거기에 있었다.

1521년 2월 폰세 데 레온은 2번째 플로리다 탐험을 위하여 푸에르토리코를 떠났다. 기록들은 부족하였으나 어떤이들은 부족하게 결성된 여행으로 묘사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원정은 곧 컬루사 전사들에 의하여 공격당한 플로리다 반도의 서부에 어떤 곳에 상륙하였다. 폰세 데 레온은 대결에서 상처를 입었으며, 아마 자신의 넓적다리에 독화살을 맞았을 것이다. 원정은 그가 7월 경에 사망한 쿠바로 돌아갔다.

영예[편집]

올드 산후안에 있는 폰세 데 레온의 동상

폰세 데 레온은 자신 시기의 소산이었으며, 야망적이고, 열심히 일하고 그리고 무자비하였다. 그는 카리브해에서 스페인의 식민지 건설을 추진한 작은 재정적 제국을 건설하고 자신이 콜럼버스 가족과 정치적인 음모를 피해온 더욱 나가서 갔을 것이다.

많은 역사적 근원들은 그가 대부분의 콩키스타도르들보다 더욱 낳은 그의 통제 아래에서 원주민들을 대우하였다고 동의한다. 하지만 노예화와 질병은 이 인구들에 매우 무거운 희생을 가져갔고 그는 자신의 총독 기간 동안에 몇몇의 폭력들이 일어나는 것을 향하였다.

폰세 데 레온은 자신이 회춘 분수를 신중히 찾았다는 기록이 없어도 그것과 함께 영원히 연상될 것이다. 그가 자신의 회고록에 이야기의 존재를 인정하여도 그는 그의 행운을 쌓으는 데 그런 환상적인 복판에 시간을 낭비한 너무 실습적인 사람으로 평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