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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 장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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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8일 (화) 12:01 판

인동 장씨 (仁同 張氏)
관향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
시조장금용(張金用), 장계(張桂)
주요 인물장현광, 장말손, 장만, 장승원, 장지연, 장석영, 장택상, 장면, 장기영, 장건상, 장직상, 장경순, 장재식, 장태완, 장세동, 장세용, 장하준, 장하석, 장하진, 장하성, 장영신, 장세주, 장윤석, 장준규
인구(2015년)666,652명
비고인동장씨 대종회

인동 장씨(仁同 張氏)는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仁同洞)을 관향(貫鄕)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인동 장씨에는 상장군(上將軍) 장금용(張金用)을 시조로 하는 상장군 장금용계 인동 장씨와 직제학(直提學) 장계(張桂)를 시조로 하는 직제학 장계계 인동 장씨가 있다. 그 중 상장군 장금용계 인동 장씨가 대다수이며 직제학 장계계 인동 장씨는 소수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관

인동(仁同)은 경상북도 구미시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신라 초에는 사동화현(斯同火縣)·이동혜현(爾同兮縣)이라 하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수동현(壽同縣)으로 고쳤다. 경덕왕 때 다시 인동현(仁同縣)으로 고치고 별호를 옥산(玉山)이라 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상주목(尙州牧) 경산도호부(京山都護府)의 속현(屬縣)으로 병합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감무(監務)를 두고 약목현(若木縣)을 속현으로 하였다. 1413년(태종)에 인동현에 현감(縣監)을 두었다가 1604년(선조 37)에 인동도호부(仁同都護府)로 승격되었다. 1896년 경상북도 인동군이 되었다. 1914년 칠곡군에 병합되어 인동면(仁同面)이 되었다가 1978년 구미시에 편입되어 인동동(仁同洞)으로 개편되었다. 인동은 옛부터 성현(聖賢)을 존경하며 도덕을 기리고 학문을 숭상하여 예의를 지키는 고장으로 도학군자(道學君子)와 홍유석학(鴻儒碩學)이 많이 배출되어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불리어 왔으며 각종 문헌(文獻)에 인동고을 대성(大姓) 가운데 인동장문(仁同張門)을 첫 번째로 기록하고 있다.


상장군 장금용계 인동 장씨

역사

시조 장금용(張金用)은 고려 초 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三重大匡神虎衛上將軍)을 역임했으며 그의 아들 선(張善)은 고려 문종 때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을 지냈다. 상장군공 이래 후손들이 옥산(玉山)[*인동의 고호(古號)]에 세거하면서 지명에 따라 본관(本貫)을 옥산(玉山)으로 하다가 그 지역의 정식 행정구역 명칭이 인동(仁同)으로 개칭(改稱)됨에 따라 지금은 본관을 인동(仁同)으로 쓰고 있다. 인동 본향에서는 역사적인 이름인 옥산(玉山)을 본관으로 고집하는 후손도 있다. 1천여년 인동에 세거하며 종가(宗家)와 유지(遺址)를 보존해 오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많은 명현석학(名賢碩學)과 공경대부충신효열(公卿大夫忠臣孝烈)을 배출한 옥산화벌(玉山華閥)로 불리는 명문거족(名門巨族)이다.

분파

대동보(大同譜)에는 27개 분파가 있었으나 안주파(安州派)는 북한에 거주하는 관계로 거황(居況)을 알 수 없고 성주파(城州派)는 세대(世代)가 끊어졌다고 하여 현재는 25개 분파만 전해온다.

  • 종파(宗派) : 시조 장금용의 직계 후손으로 중리파(中里派)로도 불림
  • 남산파(南山派) : 분파조는 15세 장우(張俁)이며 조선초 중직대부(中直大夫) 사천진병마첨절제사행현감(泗川鎭兵馬僉節制使行縣監)을 역임
  • 진가파(眞佳派) : 분파조는 16세 장맹창(張孟倡)이며 조선초 예빈시(禮賓寺) 참봉(參奉)을 역임
  • 진평파(眞坪派) : 분파조는 17세 장신손(張信孫)이며 조선 중종 2년 진사(進士)에 입격(入格)
  • 황상파(凰顙派) : 분파조는 18세 장잠(張潛)이며 대유학자로 조선 중종 진사(進士)에 입격(入格)
  • 함평파(咸平派) : 분파조는 6세 장백림(張百林)이며 고려조(高麗朝)에 우참찬(右參贊)을 역임
  • 흥해파(興海派) : 분파조는 6세 장세규(張世圭)이며 고려조에 직장영동정(直長令同正)을 역임
  • 화순파(和順派) : 분파조는 6세 장세재(張世榟)이며 고려조에 우교위(右校尉)를 역임
  • 청안파(淸安派) : 분파조는 9세 장인계(張仁溪)이며 고려조에 통훈대부(通訓大夫)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를 역임
  • 영광파(靈光派) : 분파조는 9세 장인연(張仁璉)이며 고려조에 소윤(少尹)을 역임
  • 청주파(淸州派) : 분파조는 10세 장득선(張得宣)이며 고려 충렬왕(忠烈王)때 사순위중랑장(司巡衛中郞將)을 역임하였으며 평장사(平章事)로 증직(贈職)되고 기성군(箕城君)에 봉해짐
  • 가평파(加平派) : 분파조는 11세 장게(張垍)이며 고려조에 감무(監務)를 역임하였으며 감무공파(監務公派)로도 불림
  • 경파(京派) : 분파조는 13세 장백(張伯)이며 고려말에 태상경(太常卿)을 역임하였으며 태상경공파(太常卿公派)로도 불림
  • 고흥파(高興派) : 분파조는 13세 장중일(張仲日)이며 고려말 내사(內寺)를 역임하고 조선초 한림(翰林)을 제수(除授)하였으나 불취
  • 금구파(金溝派) : 분파조는 14세 장기건(張紀乾)이며 조선조(朝鮮朝)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진안현감(鎭安縣監)을 역임
  • 의흥파(義興派) : 분파조는 16세 장맹우(張孟佑)이며 조선조 선무랑(宣務郞)을 역임
  • 영덕파(盈德派) : 분파조는 16세 장맹선(張孟善)이며 문장가 무전(文章家無傳)을 역임
  • 양월파(良月派) : 분파조는 16세 장맹순(張孟洵)이며 조선조 예빈사(禮賓寺) 참봉(參奉)을 역임
  • 안성파(安城派) : 분파조는 16세 장맹희(張孟僖)이며 조선조 금화서(禁火署) 별좌(別坐)를 역임
  • 양양파(襄陽派) : 분파조는 17세 장달손(張達孫)이며 조선조 훈도(訓導)를 역임
  • 초계파(草溪派) : 분파조는 17세 장지손(張智孫)이며 조선조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역임
  • 양주파(楊州派) : 분파조는 17세 장석손(張碩孫)이며 조선조 도사(都事)를 역임하였으며 通政大夫(통정대부) 左通禮(좌통례)로 증직
  • 호명파(虎鳴派) : 분파조는 18세 장도(張濤)이며 문장가(文章家)
  • 울진파(蔚珍派) : 분파조는 18세 장연(張演)이며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
  • 무안파(務安派) : 분파조는 18세 장부개(張傅凱)이며 조선 성종때 헌납(獻納)과 보국숭록대부영돈영부사(輔國崇錄大夫領敦寧府事)를 역임

과거 급제자

조선조 과거 급제자 409명 (문과 50명, 무과 148명, 진사시 79명, 생원시 77명, 역과 23명, 의과 9명, 음양과 1명, 율과 22명) 및 그 외 음서제(蔭敍制) 출신 음관(蔭官) 104명

항렬자

  • 중리파/종파(중시조로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