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양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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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 ==
== 기원 ==
제주 양씨는 [[탐라]]개국설화에 등장하는 세 신인(神人) 중의 한 명인 '''양을나'''(良乙那)를 시조로 한다.
제주 양씨는 [[탐라]]개국설화에 등장하는 세 신인(神人) 중의 한 명인 '''양을라'''(良乙那)를 시조로 한다.


삼성혈 전설이라 하는데, 탐라(제주의 옛 이름)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에서 세 신인이 솟아났다.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라는 이름을 가진 그들은 수렵을 하여 살았는데, 하루는 바다에 이상한 상자가 떠내려와 건져 보니 세 미녀와 오곡의 종자, 망아지, 송아지가 들어 있었다. 세 신인은 세 미녀와 각각 결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니 그로부터 탐라는 개척되었다.
삼성혈 전설이라 하는데, 탐라(제주의 옛 이름)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에서 세 신인이 솟아났다.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라는 이름을 가진 그들은 수렵을 하여 살았는데, 하루는 바다에 이상한 상자가 떠내려와 건져 보니 세 미녀와 오곡의 종자, 망아지, 송아지가 들어 있었다. 세 신인은 세 미녀와 각각 결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니 그로부터 탐라는 개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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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
== 인물 ==
* [[양팽손]](梁彭孫, 1488년 ∼ 1545년) : 1516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으며, 현량과(賢良科)에 발탁되어 정언(正言)·전랑·수찬(修撰)·교리(校理), 용담현령(龍潭縣令)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 [[양팽손]](梁彭孫, 1488년 ∼ 1545년) : 1516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으며, 현량과(賢良科)에 발탁되어 정언(正言)·전랑·수찬(修撰)·교리(校理), 용담현령(龍潭縣令)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또, 정암 조광조가 사약을 받아 죽었을 때 모두가 벌을 받을 까봐 하지 않았던 시체 묻기를 해주었다.
* [[양응정]](梁應鼎, 1519년 ∼ 1581년) : 1540년(중종 35)에 생원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고, 1552년(명종 7)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고, 공조좌랑으로 1556년 중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수찬(修撰)·진주목사를 거쳐 1574년(선조 7) 경주부윤, 1578년 [[공조]][[참판]]을 지냈으며, 대사성을 역임하였다.
* [[양응정]](梁應鼎, 1519년 ∼ 1581년) : 1540년(중종 35)에 생원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고, 1552년(명종 7)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고, 공조좌랑으로 1556년 중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수찬(修撰)·진주목사를 거쳐 1574년(선조 7) 경주부윤, 1578년 [[공조]][[참판]]을 지냈으며, 대사성을 역임하였다.
* [[양천운]](梁千運, 1568년 ∼ 1637년) : 사마시에 합격하여 벼슬은 동몽교관(童蒙敎官 )·감찰(監察 ) 등을 거쳐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를 지냈다.
* [[양천운]](梁千運, 1568년 ∼ 1637년) : 사마시에 합격하여 벼슬은 동몽교관(童蒙敎官 )·감찰(監察 ) 등을 거쳐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를 지냈다.

2021년 9월 26일 (일) 23:26 판

제주 양씨 (濟州 梁氏)
관향제주특별자치도
시조양을나(良乙那)
중시조양순(梁洵)
집성촌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전라북도 군산시
전라남도 영암군
전라남도 영광군
전라남도 함평군
전라남도 화순군
전라남도 진도군
충청북도 보은군
주요 인물양팽손, 양산보, 양응정, 양천운, 양한묵, 양기탁, 양주동, 양회경, 양회수, 양재봉, 양달승, 양정규, 양영식, 양영태, 양삼승, 양동관, 양승숙, 양형일, 양회문, 양창수, 양종수, 양방언, 양진석, 양향자, 양학선, 양민정, 양진우 양명진
인구(2015년)142,211명
비고탐라의 왕족

제주 양씨(濟州 梁氏)는 제주도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탐라개국설화에 등장하는 양을라(良乙那)이다.

기원

제주 양씨는 탐라개국설화에 등장하는 세 신인(神人) 중의 한 명인 양을라(良乙那)를 시조로 한다.

삼성혈 전설이라 하는데, 탐라(제주의 옛 이름)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에서 세 신인이 솟아났다.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라는 이름을 가진 그들은 수렵을 하여 살았는데, 하루는 바다에 이상한 상자가 떠내려와 건져 보니 세 미녀와 오곡의 종자, 망아지, 송아지가 들어 있었다. 세 신인은 세 미녀와 각각 결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니 그로부터 탐라는 개척되었다.

고려사 고기(高麗史 古記)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탐라는 남해 가운데 있다. 처음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삼신인이 땅에서 솟아나니 맏이를 양을나, 버금을 고을나, 셋째를 부을나라 하였다. 三人은 거친 들판을 돌아 다니며 사냥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한 나무 상자가 동쪽 바닷가로 떠내려 온 것을 발견하고 나가서 열어 보니 그 안에 또 석함(石函)이 있고 붉은 띠에 자줏빛 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한 사람 따라와 있었다.

석함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처녀 3人 및 망아지 송아지와 오곡 씨앗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이에 사자(使者)가 말하기를 "나는 벽랑국 사신입니다. 우리 왕이 이 3왕녀를 낳고 이르되 서해 한가운데 있는 산에 신자(神子) 3人이 강생(降生)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려는데 배필이 없다 하시고 이에 신(臣)에게 명하여 3왕녀를 모시게 하였습니다. 마땅히 배필로 삼아 대업(大業)을 이룩하시옵소서"하고 홀연히 구름을 타고 떠나가 버렸다.

3人은 나이 차례로 나누어 배필을 삼고 샘물이 달며 땅이 기름진 곳에 나아가서 활을 쏘아 터를 정하니 良乙那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徒), 高乙那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徒), 夫乙那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徒)라 하고 비로소 오곡을 파종하고 또한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니 날로 부유하고 번영하였다.

東國通鑑(동국통감)은 성종15년(1484) 간행되어 長曰良(장왈양)이라 하고 長爲良說(장위양설)이 굳어졌으며, 이후에도 살펴보면 효종4년(1654)에 李元鎭(이원진)牧使(목사)도 三姓穴條(삼성혈조)에 良高夫(양고부)라고 썼고 숙종29년(1703)에 李衡祥(이형상)牧使(목사) 역시 三姓祠 上樑門(삼성사 상량문)에 良高夫(양고부)로 썼다. 이때 사우(祠宇)를 완성하고 삼신인(三神人)의 위패(位牌) 순위를 정함에 있어서 삼성신인 강생(三姓神人 降生)의 사적문헌과 국사를 널리 상고(詳考)한 끝에 양을나(良乙那)를 제1위에 모시고 고을나(高乙那)를 제2위에, 부을나(夫乙那)를 제3위로 결정한 후 제문(祭文)을 지어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었다. 王朝實錄(왕조실록 42~P.163)에 의하면 영조5년(1771)에 高漢俊(고한준)등이 主上(주상)께 奏請(주청)하는 상소문에도 良高夫(양고부)로 썼다. 또한 李丙燾(이병도)著의 韓國史(한국사)에도 良高夫(양고부)요, 金泰能(김태능)著의 濟州島史論攷(제주도사논고)에도 良高夫(양고부)라 했으며 國史大事典(국사대사전)•한국사대사전 등에도 良高夫(양고부)라고 기록하였으며, 玄容駿(현용준)著 「濟州島神記(제주도신기)」에도 良高夫(양고부)라 수록이 되어 있다.

본관

제주목(濟州牧) : 본주(本州)는 전라도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그 주(州)의 고기(古記)에 이르기를,"태초(太初)에는 사람과 물건이 없었는데, 신선[神人] 세 사람이 땅으로부터 솟아나왔다. 지금도 주산(主山) 북쪽 기슭에 ‘모흥(毛興)’이라 하는 구멍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곳이다. 맏을 양을나(良乙那), 둘째를 고을나(高乙那), 세째를 부을나(夫乙那)라고 하였다.

역사

양(梁)씨의 시조인 양을나(良乙那)는 단군과 같은 시기에 제주도 한라산 기슭의 모흥혈(毛興穴, 삼성혈)에서 탄강하여 탁라국(탐라국)을 창건하였으며 그의 자손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고려 태조 때까지 탐라를 통치해왔다.(영주지). 그러므로 양씨는 가장 역사를 길게 갖는 토족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모든 양(梁)씨는 제주양씨에서 분적되었으며, 따라서 양을나를 단일 시조로 하는 동계혈족이다. 모흥혈 세 구멍에서는 양을나 외에도, 고(高)씨 시조 고을나, 부(夫)씨 시조 부을나도 태어났기 때문에 이곳을 삼성혈(三姓穴)이라 부르게 되었고, ‘모흥혈(毛興穴)’에서의 毛(모)자도 셋 건너 긋고 乙(을)자를 한 글자로서, 삼을나(三乙那)라는 뜻으로 毛(모)자를 썼다고 하며, 3성씨가 일어난(興) 곳이라 하여 모흥혈(毛興穴)이라 부르게 되었다. 양(梁)씨는 문헌에 70여 본관이 전하나 2000년 조사에서는 남원,제주,청주,남양,경주 등 31개 본관이 현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물

  • 양팽손(梁彭孫, 1488년 ∼ 1545년) : 1516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으며, 현량과(賢良科)에 발탁되어 정언(正言)·전랑·수찬(修撰)·교리(校理), 용담현령(龍潭縣令)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또, 정암 조광조가 사약을 받아 죽었을 때 모두가 벌을 받을 까봐 하지 않았던 시체 묻기를 해주었다.
  • 양응정(梁應鼎, 1519년 ∼ 1581년) : 1540년(중종 35)에 생원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고, 1552년(명종 7)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고, 공조좌랑으로 1556년 중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수찬(修撰)·진주목사를 거쳐 1574년(선조 7) 경주부윤, 1578년 공조참판을 지냈으며, 대사성을 역임하였다.
  • 양천운(梁千運, 1568년 ∼ 1637년) : 사마시에 합격하여 벼슬은 동몽교관(童蒙敎官 )·감찰(監察 ) 등을 거쳐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를 지냈다.
  • 양기탁(梁起鐸, 1871년 ∼ 1938년) : 구한말의 언론인·독립운동가,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 1907년 신민회를 조직, 193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 양회경(梁會卿, 1912년 ~ 1998년) : 대법관
  • 양세봉(梁世奉, 1896년 ~ 1934년) : 독립운동가, 조선혁명군 제1중대장
  • 양경민: 민족사관학교 출신 서울대 의대생 (특이사항: 황우석)

분관

과거 급제자

제주 양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4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양계벽(梁季璧) 양덕하(梁德厦) 양덕호(梁德浩) 양만용(梁曼容) 양봉래(梁鳳來) 양상기(梁相器) 양석관(梁奭觀) 양응정(梁應鼎) 양응정(梁應鼎) 양응태(梁應台) 양일위(梁日煒) 양정명(梁井明) 양진손(梁震孫) 양팽손(梁彭孫)

무과

양경하(梁擎厦) 양기만(梁起萬) 양덕윤(梁德胤) 양명웅(梁命雄) 양봉명(梁奉命) 양사숙(梁士淑) 양성표(梁聖表) 양시계(梁時啓) 양시흥(梁始興) 양심(梁沁) 양우급(梁禹及) 양운(梁澐) 양유성(梁有成) 양응정(梁應禎) 양응지(梁應池) 양응홍(梁應泓) 양익기(梁益沂) 양익표(梁益標) 양중욱(梁重郁) 양홍발(梁弘發)

생원시

양거안(梁居安) 양거웅(梁居雄) 양견석(梁堅石) 양달명(梁達溟) 양만용(梁曼容) 양산룡(梁山龍) 양상우(梁相瑀) 양수중(梁守中) 양응정(梁應鼎) 양응태(梁應台) 양진남(梁軫南) 양찬진(梁燦晉) 양천지(梁千至) 양천회(梁千會) 양택지(梁擇之) 양팽손(梁彭孫)

진사시

양경지(梁敬之) 양규호(梁圭浩) 양만용(梁曼容) 양명린(梁命麟) 양몽우(梁夢禹) 양우철(梁禹轍) 양위남(梁渭南) 양진영(梁進永) 양천운(梁千運) 양천장(梁千章) 양치남(梁致南) 양학연(梁學淵) 양회익(梁會益)

같이 보기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