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문정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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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金坵, [[1211년]]~[[1278년]])는 [[고려]] 후기 [[문신 (관료)|문신]]이다.<ref>{{서적 인용|저자1=이응백|저자2=김원경|저자3=김선풍|제목=국어국문학자료사전|장=김구|url=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88714&cid=41708&categoryId=41711|출판사=한국사전연구사|연도=1998}}</ref> [[ (이름)|]] 차산(次山), [[호 (이름)|호]]는 지포(止浦)이다. 1234년(고종 21)부터 1239년(고종 26)까지 [[제주]] [[판관 (벼슬)|판관]]을 맡았다.<ref>{{서적 인용|제목=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장=김구|url=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624811&cid=51955&categoryId=55527|출판사=한국학중앙연구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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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1234년(고종 21)부터 1239년(고종 26)까지 [[제주]] [[판관 (벼슬)|판관]]을 맡았다.<ref>{{서적 인용|제목=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장=김구|url=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624811&cid=51955&categoryId=55527|출판사=한국학중앙연구회}}</ref>

할아버지가 중이었기 때문에 대간이 될 수 없었으나 재주를 인정받아 1263년(원종 4)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었다. 이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추밀원부사·정당문학(政堂文學)·이부상서를 역임하였다.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라서는 문신들의 저술을 시험해 유능한 자에게 상을 주어 권장할 것을 건의하였다.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를 거쳐 1274년 충렬왕 즉위 뒤에는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참문학사(參文學事)·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를 역임하였다.


==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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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211년 태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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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278년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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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고려 사람]]
[[분류:고려의 문신]]
[[분류:부안 김씨]]

2016년 6월 25일 (토) 01:17 판

김구(金坵, 1211년~1278년)는 고려문신이다.[1] 본관은 부녕(扶寧). 초명은 백일(百鎰), 자는 차산(次山), 호는 지포(止浦)이다.

생애

1234년(고종 21)부터 1239년(고종 26)까지 제주 판관을 맡았다.[2]

할아버지가 중이었기 때문에 대간이 될 수 없었으나 재주를 인정받아 1263년(원종 4)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었다. 이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추밀원부사·정당문학(政堂文學)·이부상서를 역임하였다.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라서는 문신들의 저술을 시험해 유능한 자에게 상을 주어 권장할 것을 건의하였다.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를 거쳐 1274년 충렬왕 즉위 뒤에는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참문학사(參文學事)·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를 역임하였다.

각주

  1.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1998). 〈김구〉.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2. 〈김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