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산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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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산군'''('''平山郡''')은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도/[[황해북도]]에 있는 군이다.
'''평산군'''(平山郡)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북도]]에 있는 군이다.


== 지리 ==
== 지리 ==
평산군의 지세는 험준하고, 북서쪽에서 동남부까지 뻗어있는 [[멸악산맥]]이 있다. 그리고 이곳은 대체로 [[평지]]로 구성되어 있다. [[예성강]]의 지류인 [[남천]]이 군 중앙을 통과해서 흐른다.
평산군의 지세는 험준하고, 북서쪽에서 동남부까지 뻗어있는 [[멸악산맥]]이 있다. 그리고 이곳은 대체로 [[평지]]로 구성되어 있다. [[례성강]]의 지류인 [[남천]]이 군 중앙을 통과해서 흐른다.


북쪽으로 [[서흥군]] · [[신계군]], 동쪽으로 [[금천군]], 서쪽으로 [[인산군]], 남쪽으로 [[황해남도]] [[봉천군]]과 접한다.
북쪽으로 [[서흥군]]·[[신계군]], 동쪽으로 [[금천군]], 서쪽으로 [[린산군]], 남쪽으로 [[황해남도]] [[봉천군]]과 접한다.


== 역사 ==
== 역사 ==
[[고구려]]때 이곳은 [[대곡군]](大谷郡) 또는 [[다실군]]이라고 불렸고, [[통일 신라시대]]에는 [[영풍군]]으로 성을, [[783년]]에는 진을 두고 한주를 삼았다. 통일 신라 시기 북방 거점이던 패강진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기도 하나 아직 이견이 많다. [[고려시대]]에는 평주라고 부르고 도호부를 두었다. 개성과 가깝고 건국에 공헌했던 많은 호족 세력의 중심지였던 이유로 신숭겸, 유금필과 같은 장수들은 평주를 본관으로 두어 성을 삼거나 왕건에게 성을 하사 받았는데 [[평산 신씨]]([[신숭겸]]) [[평산 유씨]]([[유금필]])가 그 예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전한|한]](漢)의 [[전한 소제|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에 두었던 외부(外部) 가운데 평나(平那) 및 [[현도군]](玄菟郡)에 두었던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가 바로 평산에 소재했다고 한다. 이후 [[고구려]](高句麗)의 영토가 되어 대곡군(大谷郡) 또는 다지홀(多知忽)이라고 불렸다. 고구려가 멸망하던 [[668년]] 한성(漢城)과 함께 [[신라]]에 항복하였다. [[경덕왕]]이 [[영풍군]](永豐郡)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단계(檀溪) · 진단(鎭湍)의 두 현을 영현(領縣)으로서 거느렸다.


* [[1914년]] [[4월 1일]] [[연백군]]에 일부를 주어 17면으로 개편하였다.
[[선덕왕]] 3년([[782년]])에 군사시설인 진(鎭)이 설치되고 아찬 체신(體信)이 군주(軍主)로 임명되었다. 통일 신라의 북방 거점이었던 [[패강진]](浿江鎭)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기도 하나 이설도 있다.
* [[1942년]] [[4월 1일]] 보산면을 남천읍으로 승격하였다.<ref>조선총독부령 제104호 ([[1942년]] [[3월 31일]])</ref> 1읍 16면

* 1952년에 일부가 린산군, 평천군으로 분리되었다. 평산군 남천읍 남천리와 신남천리를 평산읍으로 하였다.
[[고려]] 초에는 평주(平州)라 불렸으며, 수도 [[개경]]과 가까울 뿐 아니라 [[고려 태조|왕건]](王建)의 친할머니 용녀(龍女)가 평주 사람인 두은점(豆恩坫) 각간(角干)의 딸로 알려져 있는 등 고려 왕실과의 연도 깊었다. 고려 왕조의 개창에 공헌한 신숭겸, 유금필, 박수경과 같은 개국공신들이 평주를 본관으로 성을 삼거나 왕건에게 성을 하사받기도 했다([[평산 신씨]], 평산 유씨, 평주 박씨 등). [[고려 성종|성종]](成宗) 14년([[995년]])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고려 현종|현종]](顯宗) 9년에 방어사를 없애고 지주사(知州事)를 설치했다. 따로 '''연덕'''('''延德'''), 또는 '''동양'''('''東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 [[조선 태종|태종]](太宗) 13년([[1413년]])에 평산군으로 고쳤는데, 15년([[1415년]])에 평산의 호구 수가 2천이 찼다 하여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세종 연간([[1418년]] ~ [[1450년]])에 평산의 호수는 2,130호, 인구는 6,323명이었으며, 군정은 시위군이 290명, 영진군이 144명, 선군은 2백 단(單) 6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14년]] [[4월 1일]] [[연백군]]에 일부를 주어 17면으로 개편하였다. [[1942년]] [[4월 1일]] 보산면을 남천읍으로 승격하였다.<ref>조선총독부령 제104호 ([[1942년]] [[3월 31일]])</ref> 1읍 16면

1952년에 일부가 린산군, 평천군으로 분리되었다. 평산군 남천읍 남천리와 신남천리를 평산읍으로 하였다.


== 행정 구역 ==
== 행정 구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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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광지 ==
== 관광지 ==
* [[태백산성]](太白山城): 평산군에 있는 산성으로 고구려시기에 지어졌다.
* [[태백산성]](太白山城): 평산군에 있는 산성으로 고구려시기에 지어졌다.

== 이북5도위원회의 평산군 ==
{{본문|황해도 (대한민국)}}

'''평산군'''(平山郡)은 황해도에 위치한 군으로, 면적 1,334.9㎢에 1읍 13면 161개 리로 편제되어 있다. 군청소재지는 남천읍 신남천리이다.

* 읍/면사무소 소재지는 굵은 글씨로 표기.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 center; font-size: 100%;"
! 읍면 !! 면적(㎢) !! 리 숫자 !! 리(里)
|-
| 남천읍(南川邑) || 151.84 || 12 || '''신남천'''(新南川) 남천(南川) 보산(寶山) 노동(盧洞) 양암(陽巖) 월하(月下)<br>운천(雲川) 두무(斗武) 삼가(三佳) 수구(水口) 갈탄(葛灘) 산막(山幕)
|-
| 고지면(古之面) || 50.08 || 8 || '''서오'''(書梧) 대룡(大龍) 송정(松亭) 금릉(金陵) 완정(浣亭) 달성(達城)<br>봉암(鳳巖) 세관(洗冠)
|-
| 금암면(金巖面) || 66.23 || 9 || '''한포'''(汗浦) 대촌(垈村) 강정(江亭) 필대(筆垈) 부정(斧亭) 재궁(齋宮)<br>용촌(龍村) 화암(花巖) 저탄(猪灘)
|-
| 마산면(馬山面) || 43.19 || 13 || '''한촌'''(漢村) 천초(泉草) 성기(聖基) 대경(大慶) 은촌(隱村) 서촌(西村)<br>가동(稼洞) 도평(桃坪) 간평(間坪) 석수(石手) 당후(堂后) 주답(注畓)<br>입암(立巖)
|-
| 문무면(文武面) || 131.27 || 16 || '''문구'''(文區) 화원(花院) 창평(昌坪) 고산(孤山) 양어(養魚) 구손(舊孫)<br>물안(物安) 자창(自昌) 미로(未老) 재명(才明) 금은(金銀) 지당(池塘)<br>대택(大澤) 화랑(花浪) 청수(淸水) 한정(寒井)
|-
| 상월면(上月面) || 54.31 || 8 || '''신촌'''(新村) 동막(東幕) 녹탄(綠灘) 계동(桂洞) 하월(下月) 석교(石橋)<br>용수(龍水) 대촌(大村)
|-
| 서봉면(西峰面) || 121.79 || 14 || '''당우'''(塘隅) 장륙당(藏六堂) 범안(泛雁) 봉동(鳳洞) 어사천(御史川)<br> 삼산(三山) 용두(龍頭) 월봉(月峰) 해수(海水) 주촌(舟村) 진포(進浦)<br>상령(商嶺) 철봉(鐵峰) 만탄(晩灘)
|-
| 세곡면(細谷面) || 100.95 || 15 || '''누천'''(漏川) 적성(赤城) 군동(群洞) 석교(石橋) 오포(梧浦) 진보(眞寶)<br>운봉(雲峰) 생금(生金) 죽동(竹洞) 응촌(鷹村) 덕촌(德村) 광평(廣坪)<br>수동(修洞) 은동(隱洞) 도천(道川)
|-
| 신암면(新巖面) || 143.10 || 17 || '''배천'''(白川) 수회(水回) 장동(長洞) 원전(院田) 재동(齋洞) 대촌(大村)<br>당평(堂坪) 주상(舟上) 성북(城北) 청룡(靑龍) 태봉(台峰) 반월(半月)<br>가정(柯亭) 월봉(月峰) 남산(南山) 검현(劒峴) 문림(文林)
|-
| 안성면(安城面) || 124.04 || 11 || '''물개'''(物開) 설현(雪峴) 총수(葱秀) 발참(撥站) 율실(栗實) 당인(唐仁)<br>마유(馬踰) 유천(楡川) 양촌(陽村) 덕암(德岩) 제암(祭岩)
|-
| 용산면(龍山面) || || 9 || '''석탄'''(石灘) 평촌(坪村) 두동(杜洞) 화촌(花村) 석사(石沙) 미수(眉秀)<br>광암(廣巖) 노동(老洞) 삼봉(三峰)
|-
| 인산면(鱗山面) || 136.41 || 12 || '''기린'''(麒麟) 낙촌(洛村) 허사(許沙) 건천(乾川) 평촌(坪村) 강도(綱桃)<br>주련(住輦) 진천(眞川) 대미(大美) 토옥(土沃) 진석(眞石) 수마(水麻)
|-
| 적암면(積巖面) || || 10 || '''온정'''(溫井) 송암(松巖) 신답(新畓) 갈산(葛山) 면곡(綿谷) 위동(位洞)<br>한정(寒井) 녹동(祿洞) 세동(細洞) 행정(杏亭)
|-
| 평산면(平山面) || 38.75 || 7 || '''은담'''(隱潭) 빙고(氷庫) 산성(山城) 단구(丹邱) 직하(稷下) 전도(傳道)<br>화산(花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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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석 ==
== 주석 ==

2014년 3월 17일 (월) 01:17 판

평산군
평산군의 위치
평산군의 위치
현황
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면적 545.19 km2
총인구 123,646[1] 명 (2008)
1개
20개

평산군(平山郡)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북도에 있는 군이다.

지리

평산군의 지세는 험준하고, 북서쪽에서 동남부까지 뻗어있는 멸악산맥이 있다. 그리고 이곳은 대체로 평지로 구성되어 있다. 례성강의 지류인 남천이 군 중앙을 통과해서 흐른다.

북쪽으로 서흥군·신계군, 동쪽으로 금천군, 서쪽으로 린산군, 남쪽으로 황해남도 봉천군과 접한다.

역사

고구려때 이곳은 대곡군(大谷郡) 또는 다실군이라고 불렸고, 통일 신라시대에는 영풍군으로 성을, 783년에는 진을 두고 한주를 삼았다. 통일 신라 시기 북방 거점이던 패강진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기도 하나 아직 이견이 많다. 고려시대에는 평주라고 부르고 도호부를 두었다. 개성과 가깝고 건국에 공헌했던 많은 호족 세력의 중심지였던 이유로 신숭겸, 유금필과 같은 장수들은 평주를 본관으로 두어 성을 삼거나 왕건에게 성을 하사 받았는데 평산 신씨(신숭겸) 평산 유씨(유금필)가 그 예이다.

  • 1914년 4월 1일 연백군에 일부를 주어 17면으로 개편하였다.
  • 1942년 4월 1일 보산면을 남천읍으로 승격하였다.[2] 1읍 16면
  • 1952년에 일부가 린산군, 평천군으로 분리되었다. 평산군 남천읍 남천리와 신남천리를 평산읍으로 하였다.

행정 구역

평산군는 1읍(평산읍)과 2구(평화로동자구, 청학로동자구), 20리(월천리, 탄교리, 림산리, 산수리, 기탄리, 례성리, 부수리, 삼룡리, 산성리, 한포리, 옥촌리, 룡궁리, 주표리, 봉탄리, 해월리, 청수리, 봉천리, 삼천리, 와현리, 상암리)로 이루어져 있다.

경제

일제 강점기때 이곳은 일본인이 개발한 형석 광산과 농구를 수리하는 곳이 있었을 뿐이었다. 광복 이후에, 이곳은 크게 발전되었다. 현재 대리석광산, 화강석 광산 등이 있으며, 북조선의 석재 공업 중심지이다.

교육 기관

관광지

  • 태백산성(太白山城): 평산군에 있는 산성으로 고구려시기에 지어졌다.

주석

  1. 조선중앙통계국,2008년 인구 조사,2009년.
  2. 조선총독부령 제104호 (1942년 3월 31일)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