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의 임시 수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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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자국의 실질적인 수도였던 [[평양]]까지 위협을 받게 되자 [[강계시]]를 임시 수도로 정하였고 중공군의 도움을 받았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자국의 실질적인 수도였던 [[평양]]까지 위협을 받게 되자 [[강계시]]를 임시 수도로 정하였고 중공군의 도움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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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기|대한민국}}과 {{국기|국제 연합}}군이 [[9월 27일]]에 [[서울]]을 수복하자, {{국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대, 기관, 정부 등이 [[평양]]에서 철수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10월 7일]]에 {{국기|국제 연합}}군이 38도선을 넘자 본격적으로 {{국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대, 기관, 정부 등이 [[평양]]으로 철수하여 [[강계]]를 임시 수도로 결정하였다. <ref>[http://www.youtube.com/watch?v=tiwq-2poMZM 한국전쟁 Korean war]</ref> 그러다가 {{국기|중화인민공화국}}의 개입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2월 6일]]에 [[평양]]을 수복하였고 {{국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는 곧 [[평양]]으로 환도하였다. |
* {{국기|대한민국}}과 {{국기|국제 연합}}군이 [[9월 27일]]에 [[서울]]을 수복하자, {{국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대, 기관, 정부 등이 [[평양]]에서 철수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10월 7일]]에 {{국기|국제 연합}}군이 38도선을 넘자 본격적으로 {{국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대, 기관, 정부 등이 [[평양]]으로 철수하여 [[강계]]를 임시 수도로 결정하였다. <ref>[http://www.youtube.com/watch?v=tiwq-2poMZM 한국전쟁 Korean war]</ref> 그러다가 {{국기|중화인민공화국}}의 개입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2월 6일]]에 [[평양]]을 수복하였고 {{국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는 곧 [[평양]]으로 환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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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기|미국|1912}}이 38선을 넘자 [[소련]]을 포함해 [[중국]]도 북진을 반대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과 [[트루먼]] 대통령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국기|대한민국}}이 [[평양]]을 점령한 후, [[대한민국]]과 [[미국]]이 [[평양]] 통치권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는데 결국 [[10월 21일]]에 {{국기|미국|1912}}의 [[트루먼]] 대통령은 결국 38선 이남에만 [[대한민국]] 통치가 가능할 뿐 [[평양]]은 아니라고 판단하여 [[평양]]은 미국의 통치권이 되었다. <ref> [http://www.youtube.com/embed/9gDmOsNM9sw?feature=player_detailpage 6.25전쟁 북진 (4)] </ref> |
* {{국기|미국|1912}}이 38선을 넘자 [[소련]]을 포함해 [[중국]]도 북진을 반대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과 [[트루먼]] 대통령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국기|대한민국}}이 [[평양]]을 점령한 후, [[대한민국]]과 [[미국]]이 [[평양]] 통치권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는데 결국 [[10월 21일]]에 {{국기|미국|1912}}의 [[트루먼]] 대통령은 결국 38선 이남에만 [[대한민국]] 통치가 가능할 뿐 [[평양]]은 아니라고 판단하여 [[평양]]은 미국의 통치권이 되었다. <ref> [http://www.youtube.com/embed/9gDmOsNM9sw?feature=player_detailpage 6.25전쟁 북진 (4)] </ref> 또 [[평양]]에서 철수한 {{국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일부는 [[만주]]의 [[하얼빈]]이나 [[중국]] 국경을 넘은 인민군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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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기|중국}}의 마오쩌둥이 10월 4일 {{국기|중화인민공화국}}이 한국전쟁에 개입을 결정하였다. <ref> [http://www.youtube.com/watch?v=9AqDuFooX24 Korean War (한국전쟁) 6/8] </ref>그리하여 {{국기|중화인민공화국}}은 [[10월 19일]]에 맨 처음으로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청천강을 넘은 {{국기|국제 연합}}군과 [[10월 25일]]에 [[온정리 전투]]와 [[장진호 전투]]를 벌였다<ref> [http://www.youtube.com/watch?v=02zFi_LDk0M 한국전쟁 (3/6)] </ref>.<ref> [http://www.youtube.com/watch?v=6xGUt7RCJpM 한국전쟁 (4/6)] </ref> 하지만 [[11월 27일]]에 터진 {{국기|중화인민공화국}}의 인해전술로 [[제2차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에서 패한 국제 연합군은 [[흥남 철수]]와 [[평양 철수]]를 실시하면서 {{국기|대한민국}}도 [[12월 4일]]에 [[평양]]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했다. |
* {{국기|중국}}의 마오쩌둥이 10월 4일 {{국기|중화인민공화국}}이 한국전쟁에 개입을 결정하였다. <ref> [http://www.youtube.com/watch?v=9AqDuFooX24 Korean War (한국전쟁) 6/8] </ref>그리하여 {{국기|중화인민공화국}}은 [[10월 19일]]에 맨 처음으로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청천강을 넘은 {{국기|국제 연합}}군과 [[10월 25일]]에 [[온정리 전투]]와 [[장진호 전투]]를 벌였다<ref> [http://www.youtube.com/watch?v=02zFi_LDk0M 한국전쟁 (3/6)] </ref>.<ref> [http://www.youtube.com/watch?v=6xGUt7RCJpM 한국전쟁 (4/6)] </ref> 하지만 [[11월 27일]]에 터진 {{국기|중화인민공화국}}의 인해전술로 [[제2차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에서 패한 국제 연합군은 [[흥남 철수]]와 [[평양 철수]]를 실시하면서 {{국기|대한민국}}도 [[12월 4일]]에 [[평양]]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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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기|중화인민공화국}}은 [[국공 내전]]을 통해 쫓아낸 {{국기|대만}}이 [[한국전쟁]]으로 [[중국]]을 공격한다는 우려로 개입하기도 하였다. 또 [[중국]]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받은 [[무기]]를 이용하면서 [[유엔군]]과 맞서싸웠다.<ref>[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16465665 EBS다큐멘터리-6.25전쟁]</ref> |
* {{국기|중화인민공화국}}은 [[국공 내전]]을 통해 쫓아낸 {{국기|대만}}이 [[한국전쟁]]으로 [[중국]]을 공격한다는 우려로 개입하기도 하였다. 또 [[중국]]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받은 [[무기]]를 이용하면서 [[유엔군]]과 맞서싸웠다.<ref>[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16465665 EBS다큐멘터리-6.25전쟁]</ref> |
2013년 2월 25일 (월) 15:20 판
한국 전쟁에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수도가 점령당함에 따라 임시 수도로 수도를 잠시 이전하였다.
대한민국
대한민국 정부는 서울에서 대전, 대구까지 천도한 뒤에, 대구 부근에 전선이 형성되자 부산으로 천도하였다. 하지만 국제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과 낙동강 전선에서도 공격을 실시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은 1950년 서울 수복을 했지만 1·4 후퇴로 다시 뺏기고 다시 부산으로 천도해야 했지만 1951년 중반 안정적으로 서울을 되찾고 전선이 교착되었다. 이후 대전등지로 수도를 이전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1] 결국 전쟁이 끝난 후 1953년 8월 15일 환도하였다. 현재 부산에는 임시수도기념관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자국의 실질적인 수도였던 평양까지 위협을 받게 되자 강계시를 임시 수도로 정하였고 중공군의 도움을 받았다.
- 대한민국과 국제 연합군이 9월 27일에 서울을 수복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대, 기관, 정부 등이 평양에서 철수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10월 7일에 국제 연합군이 38도선을 넘자 본격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대, 기관, 정부 등이 평양으로 철수하여 강계를 임시 수도로 결정하였다. [2] 그러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의 개입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2월 6일에 평양을 수복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는 곧 평양으로 환도하였다.
- 미국이 38선을 넘자 소련을 포함해 중국도 북진을 반대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과 트루먼 대통령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대한민국이 평양을 점령한 후, 대한민국과 미국이 평양 통치권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는데 결국 10월 21일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결국 38선 이남에만 대한민국 통치가 가능할 뿐 평양은 아니라고 판단하여 평양은 미국의 통치권이 되었다. [3] 또 평양에서 철수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일부는 만주의 하얼빈이나 중국 국경을 넘은 인민군도 있었다.
- 중국의 마오쩌둥이 10월 4일 중화인민공화국이 한국전쟁에 개입을 결정하였다. [4]그리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은 10월 19일에 맨 처음으로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청천강을 넘은 국제 연합군과 10월 25일에 온정리 전투와 장진호 전투를 벌였다[5].[6] 하지만 11월 27일에 터진 중화인민공화국의 인해전술로 제2차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에서 패한 국제 연합군은 흥남 철수와 평양 철수를 실시하면서 대한민국도 12월 4일에 평양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했다.
- 중화인민공화국은 국공 내전을 통해 쫓아낸 대만이 한국전쟁으로 중국을 공격한다는 우려로 개입하기도 하였다. 또 중국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받은 무기를 이용하면서 유엔군과 맞서싸웠다.[7]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은 평양에서 덕천으로 철수하여 잠시 이곳에 머물렀는데 10월 19일에 덕천에서 철수하고 강계 근처에 머물렀다. 김정일은 만주의 장춘으로 피신하였다.[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