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호경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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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견: 5년 전 (Tol6560님) - 주제: 신천 강씨

표제어[편집]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에서는 '호경'(虎景)으로 나오는데, 어느 것이 맞는 건가요?--백두 (토론) 2009년 4월 30일 (목) 22:16 (KST)답변

고려사 세가(世家) 고려세계(高麗世系)에 편년통록을 인용해서 虎景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름이 호경(虎景)이라는 사람이 있어 스스로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고 불렀다.참고바랍니다. --Leedkmn (토론) 2014년 11월 29일 (토) 14:39 (KST)답변
이미 백두님께서 2009년 7월 16일에 기존의 ‘강호경’에서 ‘호경’으로 문서를 옮기셨네요. 저도 ‘호경’이 표제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천 강씨 족보외에 ‘강호경’으로 표기하는 자료는 없어 보이고, 족보 자료는 객관적인 자료라 보기 어렵습니다. --Leedkmn (토론) 2014년 11월 29일 (토) 14:42 (KST)답변

신천 강씨[편집]

‘호경’이 신천 강씨의 시조인 ‘강호경’이라는 것이 과연 근거가 있는 것인지요? 호경을 ‘강호경’이라고 강씨 성을 붙여 표기하는 것은 신천 강씨 족보 관련 자료 외에는 검색이 되지 않습니다. 가문의 족보는 객관적인 자료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Leedkmn (토론) 2014년 11월 29일 (토) 14:26 (KST)답변

이 문서에서 신천 강씨의 시조라고 단정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섬서성 경조(京兆) 출신인 강숙(康叔)의 둘째 아들 강후(康侯)의 67대손이다”라고 기술돼 있는 것들은 족보 자료를 기초로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신뢰성에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Leedkmn (토론) 2014년 11월 29일 (토) 14:45 (KST)답변

강호경(康虎景)이 아닐 이유가 무엇 입니까? 호경이란 인물이 어떤 이유로 알려지게 됐습니까? 고려 의종 지시로 김관의가 고려 왕가 가계도 조사하면서 알려진 인물 아닙니까? 왕건 외가 康씨를 조사한 결과가 호경인데, 강호경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가문의 자료를 객관적인 자료로 보기 어려운 이유는, 조선시대 양반이 5%도 안됐고, 족보를 매매했고, 조상을 높이는 숭조 사업 개입됐기 때문인데, 강호경이란 인물이 그런것과 상관 관계가 있습니까? 아무리 숭조사업, 남의 조상이 부럽다해서 꾸미는 것을 넘어서, 자기 뿌리를 바꾸는 사람 있습니까?

康虎景에서 虎景되는 순간, 존재를 논할 가치 조차 없게 됩니다. 虎景은 성인이 되서 호랑이와 관련된 관명이고, 어릴 때 쓰는 아명은 강康기騎입니다.

관력이 뚜렷한 신천강씨 14세손 중시조 강지연공은 몽고항쟁 고려 호종공신인데, 무엇이 부족해서 자기 뿌리를 바꾸죠? 족보가 객관적인 자료로 보기 어려운 집안과 다르고, 그 집안에서 족보로 기록 할 수 있는 조상까지 기록한 것이 강호경이고, 강호경은 태조왕건 외6대조가 되는데 꾸밀 것이 뭐가 있습니까?

족보는 자기 조상과 일가 친척을 모두 기록하는 가문 기록이고, 상계는 자기 직계 조상만 간단하게 기록한 세보입니다. 신천강씨 족보엔 득성조부터 68세손 강康기騎까지 직계 조상 이름과 관직 세보는 있지만, 자세한 연대나 상세 내역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분명한 신라 문신을 지낸 강충 아버지인 康虎景을 시조로 본 것입니다.

편년통록 김관의가 고려의종 1127년~1173년 시대 사람이라 자기 조상 기록 쓴 족보 보다 더 상세 할 순 없기 때문에, 康虎景을 고구려 출신으로 기록했고, 그것과 연관지어 위키 검색해 보면 모두 고구려 출신으로 기록 돼있습니다. 자기 직계 조상 혈통을 기록하는 세보 역할 상계를 보면, 북쪽에서 내려온 것은 맞지만, 고구려와 전혀 상관없는 기자조선, 마한, 신라 벼슬을 기록하고 있고, 강충이 신라 문신인 것과 태봉국 김궁예 왕비 강康씨인 것에서 신라 귀족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康虎景은 고구려 출신이다 x, 신라 출신 o 입니다.

여기 위키 기록 방식도 웃긴 것은, 김관의 편년통록, 민지 편년강목, 옛 기록을 인용하는 것에만 치중, 오류가 발견되도 수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 고구려 출신인데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 자칭 타칭합니까? 성골聖骨은 신라시대 골품제도지, 고구려에서 쓰던 제도인가요? 편년통록에 그렇게 기록돼있다면 그자체가 오류, 신천강씨 상계 흐름은 마한 신하로 지내다 마한이 망하면서 신라로 건너가 5대쯤 후에 이벌찬 벼슬합니다. 이벌찬은 성골귀족 품계입니다.

모든 족보는 신뢰 할 수 없다는 일반화 논리 내세우기전에, 그것이 아닌 합리적인 근거부터 내놓은것이 순서 아닙니까?

강康씨 후손들은 중국 사람과 연관짓고 싶어서 짓겠습니까?

성씨 글자를 강康을 쓰고 있고,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강康씨 뿌리는 주나라 위강숙에 있습니다. 강康나라가 위강숙 희봉 첫 분봉지였고, 강후康侯로 불렸고, 최근에 군권을 상징하는 강후부 중국에서 출토 됐습니다. 조카 성왕 때 삼감의 난 발생이후 상나라 수도와 북쪽 지역에 위나라를 세우면서 분봉하면서 강康에서 위후卫=衛侯가 돼면서, 성왕의 숙부 위강숙衛康叔으로 불렸습니다. 초기 국가들은 성씨가 곧 국명입니다. 적장자는 위나라 왕계를 이엇기 때문에 위衛씨가 됐지만, 적장자가 아니거나, 특히 서자 출신일 경우는 가문을 떠나서 새 성씨를 쓸 가능성 높고, 아무튼 적장자가 아닌 사람들은 초기 강康나라 성씨를 그대로 썼을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중국에 강康씨가 그렇게 많을리 없습니다. 중국 100대 성씨에 포함돼있고, 파생된 성씨 인구가 3,000만명입니다.

성씨 글자를 강康을 쓰고 있는데, 성씨의 뿌리가 무엇인지 찾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자신이 강康 성姓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주나라 무왕의 동생 둘째 아들이 득성조란 것은 족보나 세보가 없어도 알게 됩니다. 강康 성姓을 고려에서 사성했다는 기록 있습니까? 신라에서는? 고구려에서는? 전 그런 기록 본적 없고, 관력이 뚜렷하지 않은 이름과 세손 수, 관명, 약식 기록인 세보는 족보에서 고려 때부터 제외했는데, 그 시조가 강호경인게 불편하다니, 강호경이 모든 사람이 아는 유명한 인물인가요? 그런 인물도 아닌데, 강호경에서 강을 빼자는 논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강호경이란 존재가 다른 위키 정보와 상충되는 정보도 아니고, 그냥 관력을 확인 할 수 있는 최대치, 가문의 시조일뿐입니다. 강숙의 둘째 아들 강후 아명은 모髦=모牟, 형제들 아명은 1글자 만쓰고, 백중숙계 순으로 붙였습니다. 장남 백모, 차남 중모, 아명이 중모, 관명이 강후, 처음부터 강후는 아니였고, 삼감의 난 이후에나 위나라로 확장 위강숙 활동 영역이 커지면서, 상나라 왕족 기자 감시자로 보낸 겁니다. 시간 흐름이 있는데, 그것을 생략하고 동일하게 보니까 오류가 발생, BC1122년을 BC1046으로 동북공정 할 만큼, 긴 시간 변화 속에서 바뀐 호칭입니다. 강康후가 아버지 관작이냐, 아들 관작이냐 논란은 있을 수 있지만, 강康씨 뿌리가 위강숙에 있다는 사실은 변할 수 없습니다. 삼감의 난 평정이후 주문왕 정비 태사 아홉째 아들인 위강숙은 형들에 비해서 활동해야 할 나이고, 위나라 위강숙 관할 활동 반경은 상나라 수도 조가를 중심으로 북쪽 백적족 기箕지역, 군권 상징 도끼 강후부 출토에서 전국적 위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족보와 상계=세보 차이점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체험한 것은, 족보는 일가 친척 모두 기록하기 때문에 두껍고 부피 커서 휴대 소지가 어렵습니다. 반면 직계 조상 혈통만 약식으로 적은 세보는 휴대가 간편합니다. 가문이 번창할 땐, 동성동본 금혼,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라도 거창한 족보를 쓰겠지만, 역적으로 몰려서 숨어다닐때나, 전란 상황에선 세보라도 있어야 조상 확인 할 수 있고 휴대가 간편합니다. 강조는 천추태후와 김치양 불륜의 씨 목종을 폐위하고 거란족과 전투에서 패배 사망했습니다. 사후에 목종 폐위로 역적 가문이 좋은 상황일리 없습니다.

강호경은, 아명이 강기, 신라 출신이 아닌, 약식 족보인 상계 흐름은 마한에서 조상들이 벼슬했고, 마한이 백제 온조에 망하면서 신라에서 관직 대대로 했습니다. 김유신 고구려 정벌때 대장군으로 참전했다는 한줄 기록있고, 그 때부터 평양 지역에 신라 호족으로 터를 잡게 된 겁니다. 고구려 출신은 김관의 편년통록 오류, 조상이 고구려 멸망에 앞장섰는데, 어떻게 고구려 출신일 수 있습니까? 더구나 고구려 부여계 백제 온조와 전투에서 조상이 전사했다는 기록 있습니다. 강씨와 고구려 백제는 BC17년부터 좋은 관계가 아닙니다.--Tol6560 (토론) 2019년 4월 30일 (화) 05:01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