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박위

문서 내용이 다른 언어로는 지원되지 않습니다.
새 주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마지막 의견: 9년 전 (Realist8706님) - 주제: 저명성 틀 관련

가족관계에 대해 입력하면 왜 자꾸 없애는건가요?저는 박위장군의 직계후손입니다. 예전에 네이버 두산백과 등 여러 백과사전에 오기 되어 있던 사실들이나 누락되어 있던 사실들도 제가 수정요구하여 정식으로 반영 됐습니다. 그리고 이 위키에서도 오기 되거나 누락된 사실도 제가 다 고쳤고 전에는 안 달려 있던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사료 각주도 제가 다 달았고 장군의 사당인 신남서원도 제가 추가했습니다.

가족관계 기록하는게 잘못 된건가요?? 김방경은 가족관계 훨씬 더 많이 나오던데 그건 왜 남아있죠?

독자연구 및 중립성 문제[편집]

IP 사용자의 독자연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몽주는 평생 박위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다.
계림부윤으로 있을 때 폐허화 된 울산을 복구하는데 자문을 다하여 신학성을 축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대마도 정벌의 영웅
이러한 왜구들의 만행을 박위는 두고볼 수 없었다. 고려의 장수들은 수동적인 방어에만 연연하여 공을 세우고 있을 때, 박위는 마땅히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여 뿌리를 뽑는 것이 마땅히 나라지키는 사람으로써 해야 할 일이라 느꼈다. 대마도정벌은 결코 침략전쟁이 아니였다. 양민학살,약탈,무전취식,강간등을 일삼는 왜구들을 소탕하기 위한 정의의 전쟁이였다.

등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중립성 또한 침해되고 있습니다. --Neoalpha (토론) 2014년 6월 13일 (금) 19:51 (KST)답변

그러나 뒤이은 거듭된 파직 상소로 인하여 태조는 어쩔 수 없이 박위를 파직시켰다.
드라마 용의 눈물등을 보면 박위가 정도전,남은,심효생 등과 모의하여 이방원을 암살하기 위해 이방원을 밤에 궁궐로 불러서 암살하는 계획을 맞추어서 이방원이 궁궐로 군대를 이끌고 왔다고 나오는데 이것은 이방원의 측근세력이 구데타를 정당화 하기 위하여 만든 날조된 내용이다. 여러 사료들에 의하면 이방원은 큰 전투를 치루지 않았고, 오히려 힘들이지 않고 정적들을 제거했다. 그러한 이유는 친군위(親軍衛)군사들은 박위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친형제나 다름없이 성장해온 가별치(家別抄)들은 서로에게 칼을 겨눌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명백한 독자연구입니다. "서로에게 칼을 겨눌 필요가 없다"는 것은 누구의 판단이며, 드라마를 가지고 역사 인물의 행적을 논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며, "어쩔수 없이 파직시켰다"는 것은 태조가 직접 말하지 않은 이상 신뢰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Neoalpha (토론) 2014년 6월 13일 (금) 19:56 (KST)답변
또한 애초에 스스로 연구했다고 밝힌 만큼 독자연구입니다. --Neoalpha (토론) 2014년 6월 13일 (금) 20:07 (KST)답변

백:아님#교과서[편집]

위키백과는 사료를 열거하여 특정 주제에 대해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그건 위키인용집으로 가야할 내용이지, 위키백과에는 어울리는 내용이 아닙니다. --Neoalpha (토론) 2014년 7월 3일 (목) 12:53 (KST)답변

저명성 틀 관련[편집]

특수:기여/61.72.193.238 아이피에서 달아 놓은 것 같은데, 본 문서에 저명성 틀이 달려 있는 것도 그렇고, 저명성 지침도 그렇고.. 저명성 틀 삭제하겠습니다. --Realist (토론) 2015년 4월 27일 (월) 20:12 (KST)답변